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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Dec 14. 2022

영화 이야기 <마돈나>

한 번도 제자리를 떠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장르는 로드 무비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삶을 추적하다가 마침내 원래 있던 자리가 아닌 곳에 도착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이동’이야말로 이야기가 가진 본질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많은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이야기가 내 삶을 바꿀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야기는 삶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주는 통로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영화 속 해림(서영희)이 미나(권소현)의 삶을 추적하다가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귀결은 자연스럽습니다. 모든 이야기는 본래 삶의 이야기니까요


이야기에는 구멍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구멍이 없다면 사람은 그 이야기를 통해 다른 곳으로 건너갈 수가 없겠지요. 여기서 구멍이란 이른바 삶의 공백과 같은 것입니다. 삶에 구멍이 뚫렸을 때 사람은 그 구멍을 막기 위한 이야기를 찾습니다. 삶의 구멍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자신의 구멍과 이야기의 구멍을 맞춰서 그 통로를 타고 넘어가는 방법뿐이니까요. 영화 속 해림이 미나의 삶을 추적하기 시작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해림이 가지고 있는 삶의 구멍이란 다름 아닌 자기가 낳은 아이를 죽였다는 죄책감입니다. 어떤 사정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가 아이를 죽인 이유는 스스로 고백하는 바와 같이 자기가 살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미나는 원치 않는 아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삶을 희생합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 아이를 죽인 여자와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기를 죽인 여자. 이 서로 다른 대칭구조 속에서 해림이 자각하게 되는 것이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자신의 삶과 혼수상태에 빠졌어도 신성을 지키고 있는 인간의 삶 사이의 괴리입니다. 말하자면 해림은 미나를 만남으로써 자기 삶에 난 구멍을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고 동시에 다른 곳으로 건너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즉 구원 역시 미나의 이야기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직감하게 됩니다.


이야기가 통로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구멍이 있어야 합니다. 닫힌 이야기에서 길을 찾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미나의 이야기에 있는 구멍이란 곧 미나의 삶에 난 구멍과 같습니다. 미나는 어쩌면 이렇게 가혹할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구멍투성이인 여자입니다. 부모가 없고 경제적 여건도 없으며 유일한 혈육인 할머니는 투병 중입니다. 말하자면 받은 것은 없고 갚아야 할 것만 있는 여자인 셈이지요.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사랑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회사에서 박과장(이명행)을 만난 다음입니다.


회사 계단에서 관계를 맺은 후 미나는 박과장의 여자가 됩니다. 이때 여자라는 것은 아내나 여자친구를 말하는 것이 아닌 오직 성적 쾌락만을 제공하는 여자입니다. 박과장이 미나에게 요구하는 것은 구강성교입니다. 이것은 성교이되 임신의 가능성을 처음부터 차단했다는 점에서 오직 쾌락만을 위한 행위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박과장에게 미나는 이른바 쾌락의 도구 같은 것이지요. 


하지만 미나에게 있어 그것은 태어나 처음으로 받은 사랑의 징표입니다. 나아가 이 사랑의 징표는 자신도 누군가로부터 사랑받는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 암시하고 있습니다. 짧은 치마를 입고 굽이 높은 구두를 신는 등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니까요. 문제는 이러한 자기애가 홀로 이룩한 것이 아닌 누군가에게 기대어 자랐다는 점입니다. 미나가 변화하고 있는 방향은 인간으로서 성숙해지는 방향이 아니라 성적 매력을 극대화시키는 방향입니다. 이른바 얼마나 남자를 자극시킬 수 있는가가 곧 자기를 사랑할 수 있는 기준이 되는 것이죠.

 

스스로를 사랑하는 기준이 내가 아닌 타인의 만족에게 설정되어 있을 때 사람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허기에 시달리게 됩니다. 미나는 이 허기를 채우기 위해 때로는 박과장의 성기를 삼키고 때로는 정크 푸드를 삼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 그대로 정크입니다. 삼키지 말아야 할 것을 계속해서 삼킬 때 인간의 정신은 균형을 상실합니다. 공장에서 상의는 유니폼을 입고 하의는 미니스커트를 입는 이 기괴한 불균형은 말 그대로 정신의 균형이 무너진 미나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이 무너진다는 것은 곧 스스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악이 노리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아닌 자들. 종대(진용욱)가 미나에게 추악한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녀가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미나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채 거리를 떠돌게 되지요.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것입니다. 미나에게 삶의 가능성이 남아 있었을 때, 비록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그래도 네일 샵을 차리겠다는 꿈이 있었을 때 그녀는 구강성교와 같이 스스로를 소모하는 방식으로만 허기를 채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강간범의 아이를 임신한 채 유곽에서 매춘을 하는 지금, 미나는 여전히 구강성교를 하지만 이것은 스스로의 허기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이를 키우기 위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녀는 비로소 무언가를 소모하는 방식의 삶이 아닌 무언가를 지키기 위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미나와 관계를 맺은 두 명의 남자들이 얼마나 부도덕한 인물인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박과장이 구강성교를 통해 임신을 방지하는 것은 이른바 책임질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말하자면 박과장의 인식에 아이란 곧 책임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반대로 말하면 아이만 생기지 않으면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뜻도 됩니다.


하지만 모든 관계는 그 자체로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에 자신의 권리와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야 말로 우리의 삶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삶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직면하는 것입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내 삶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내가 원하는 부분과 원하지 않는 부분을 선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전체가 아닌 부분만을 원한다면 그것은 영리한 것이 아니라 교활한 것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교활하다는 것은 곧 무책임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종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박과장이 책임질 일을 만들지 않으면서 책임을 회피하는 인물이라면 종욱은 책임질 일이 발생하든 말든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 인물입니다. 둘은 표면적으로 봤을 때 대기업 과장과 공장 버스 운전수라는 직함으로 상하 구분이 이뤄지지만 실제로는 화이트 칼라나 블루 칼라냐 하는 입은 옷의 색깔만 다를 뿐 근본적으로 같은 인물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고도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못하는 무책임한 인간의 표본이지요.


미나가 두 남자에게 이용당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보다 높은 윤리적 지위를 점하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닌 그녀가 자신이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부가 된 것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미나가 임신한 아이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강간범의 아이입니다. 말하자면 이 아이는 비록 자신의 배 안에 있어도 자신이 의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우고 싶은 대상이지요. 그러나 그녀가 지우는 것은 아이가 아니라 오히려 아이를 둘러싼 상징들입니다. 강간범의 아이가 아닌 그냥 아이. 원치 않은 아이가 아니라 그냥 아이. 인생의 짐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 즉 미나는 가장 원치 않은 방식으로 자신의 인생에 들어온 타인을 내쫓거나 외면하는 대신 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나로 하여금 누군가에게 사랑을 구걸하는 삶이 아닌 스스로 사랑하고 지키는 삶을 주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미나가 아이에게 달려 있는 모든 기표를 떼어내고 자신의 아이로 삼고 기른다는 것은 말하자면 생명의 독립성을 보장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모든 아이는 부모에게서 태어납니다. 그리하여 태어나는 아이는 부모와 사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박과장이 미나에게서 임신의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 역시 이런 연결고리를 배제하기 위함이며, 미나가 아이를 키우는 일이 힘든 가장 큰 이유는 이 아이가 제가 앞서 사용했던 말과 같이 강간범의 자식이라는 연결고리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연결고리가 사적인 것이기 때문에 미나와 같이 부모가 없이 태어나는 아이들은 빈곤과 폭력 속에 노출되어도 공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이며, 이 연결고리가 사적인 것이어서 상우(김영민)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어도 매달 억대의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영화를 비극으로 만드는 가장 결정적인 키워드가 있다면 그건 바로 상속입니다. 부모가 없이 태어난 아이는 빚을 상속받고, 유복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아이는 빛을 상속받습니다. 영화 <마돈나>가 겨냥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속입니다. 해림은 뇌사상태의 회장(유순철)을 살해함으로써 상우에게 지급되던 상속을 차단하고, 미나는 아이를 세상 밖으로 꺼낸 뒤 사망함으로써 강간범의 아이라는 굴레를 끊어버립니다. 말하자면 이 아이는 세상에 태어남으로써 부계와 모계를 포함한 자기 주변의 모든 상속관계를 소거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와 그 보호자의 관계가 사적 연결이라는 점에서 태어난 아이는 아마도 다시 고아라는 꼬리표를 붙은 채 살아가야 하겠지요. 해림이 자기의 아이를 죽인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그 아이 역시 비참한 삶을 살게 될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점으로 미루어 추측하건대 해림 역시 고아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녀가 회장을 살해하면서까지 미나의 아이를 살려내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자신의 아이를 죽였다는 죄책감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이것이 일종의 속죄로 기능하다고 하더라도 영화 말미에 버스를 타고 사회의 바깥을 방황하는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도와줄 사람도, 책임져줄 보호자도 없는 고아의 형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마 미나의 아이 역시 그녀와 비슷한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높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림이 사진관에 걸린 미나의 임신 사실을 보면서 미소 짓는 것은 자신과 전혀 무관한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경험을 떠올리게 만들어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마음들이 모인다면 언젠가는 부모가 없이 태어나는 아이들도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면서요. 아이는 부모가 아니라 마을이 키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아이가 누구의 아이가 아니라 모두의 아이인 세상. 아무것도 상속받지 않지만 모든 것을 상속받는 세상. 만약 그런 세상이 온다면 자기와 같은 사람도 마치 처음인 것처럼 세상을 살아볼 수 있지 않을까. 처음인 것처럼. Like a virgin



2022년 12월 3일부터 2022년 12월 1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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