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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Dec 10. 2022

영화 이야기 <성월동화>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서사가 아니라 얼굴입니다. 히토미 역을 맡은 토키와 타카코의 비현실적인 외모도 그렇지만 도저히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가보 역을 맡은 장국영의 얼굴입니다. 이 영화 속 장국영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사람의 얼굴이란 순간의 인상이 아니라 나무의 나이테처럼 긴 여정의 흔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성월동화> 속 장국영의 얼굴은 말하자면 그가 이제까지 살아온 영화의 역사처럼 보입니다. 그 속에는 <천녀유혼>의 현실과 꿈을 구분하지 못하는 소년의 얼굴도, <영웅본색>의 바른 길을 가려다 세상에 꺾인 청년의 얼굴도, <아비정전>의 허무주의에 빠져 퇴폐와 자학으로 얼룩진 남자의 얼굴도 있습니다. <성월동화>의 장국영은 이제 막 허무주의에서 빠져나와 인생에는 어느 정도의 달콤함도 어느 정도의 씁쓸함도 있다는 것을 막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삶이란 원하는 것을 가질 수도 버릴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가비(장국영)의 관조적인 표정과도 일치합니다.


영화 속 가비는 조직에 숨어든 경찰입니다. 신분 노출을 막기 위해 모든 정보를 은폐한 그는 조직원도 아니지만 경찰도 아닙니다. 그러나 조직원이 아니라고 해서 총과 칼이 난무하는 싸움과 무관할 수도 없고 경찰이 아니라고 해서 언제 들킬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밀고를 멈출 수도 없습니다. 그는 두 사람이면서 동시에 두 사람이 아니며, 그 두 사람 중 하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결코 원하지 않는 것이었지만 끝내 어느 한 쪽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가비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질 수도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한 남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가장 먼저 멈추는 것은 발걸음이 아니라 표정입니다. 시야가 어두운 것은 거리 때문이라고 믿고 거리를 좁히기 위해 열심히 뛰고 걷고 때로는 기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선명해지지 않을 때 문득 드는 생각은 이런 것입니다. 어쩌면 세상은 어둠에 덮여 있는 것 아니라 어둠이 세상일지도 모른다는 것. 선명한 것은 오직 내 안에만 있어서 아무리 걸어도 밖에서 그 선명한 것을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앞으로 나가기 위해 들끊었던 심장은 식고 눈은 차가워지며 입가에는 냉소만 맴돌게 됩니다. 


영화 속 가비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거는 것은 물론 약혼녀마저 잃어버리게 되지만 그러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끝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합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위험한 상황 속으로 스스로를 몰아붙이게 되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는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위해 자신이 사랑해야 하는 것들을 버렸기 때문이지요.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곧 자신의 삶입니다. 만약 사랑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삶은 텅 빈 것이나 다름없지요. 말하자면 가비는 목적을 위해 스스로의 삶을 수단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세상을 살아가던 가비가 히토미(토키와 타카코)를 만난 후 생기를 되찾아가는 이유는 바로 그의 마음 속에 다시 사랑이 피어났기 때문입니다. 가비와 히토미의 사랑은 바로 가비가 경찰로부터 쫓기는 탈주 속에서 시작됩니다. 가비가 경찰로서의 사명감을 위해 자신의 삶을 버렸다면 거꾸로 경찰로부터 멀어지는 과정은 그의 버렸던 삶을 되찾아가는 것이지요. 이것은 삶의 모양에 대한 은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흔히 삶에는 어떤 모양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유한 삶의 모양, 부유하진 않아도 자유로운 삶의 모양 혹은 꿈을 위해 헌신하는 삶의 모양 같은 것들이죠. 이러한 모양들은 물론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법을 가르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삶을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찰흙을 어떤 틀에 끼워넣으면 안 맞는 부분들이 삐져나오거나 떨어져 나오는 것처럼요. 어쩌면 떨어져 나온 부분에 삶의 정수가 들어 있는지도 모르는 일인데 말입니다.


가비에게 있어 삶의 모양이란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경찰의 모습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조직에 잠복하는 위험한 일을 시작했던 것이겠죠. 하지만 그 결과로 가비는 자신이 생각했던 모양대로 사는 게 아니라 그 모양에 맞게 구겨진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자신에게 중요했던 모든 부분들을 틀 바깥에 흘려버린 채로요. 따라서 경찰로부터 도망쳐 히토미와 함께 지낸 시간은 자신이 생각한 틀에 맞게 스스로를 구겨넣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그 틀로부터 멀어지면서 틀 바깥에 떨어진 삶의 파편을 줍는 시간인 셈입니다. 


이 영화에서 경찰이나 조직을 보여줄 때 그곳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혹은 마약이나 총과 칼, 제복과 자동차, 혼잡한 거리뿐입니다. 그러나 히토미와 함께 도망치는 장면에서 끊임없이 보여주는 것은 홍콩의 아름다운 야경이거나 먼 바다 혹은 아무도 없는 둘만의 공간입니다. 영화가 시작할 때 두 연인을 보여주는 장면도 원경으로 찍었습니다. 마치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라 풍경이 주인공인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이러한 대비가 보여주는 것은 결국 삶이란 틀 속의 좁은 공간이 아니라 틀 바깥의 넓은 세계라는 것이겠지요.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모양을 고집하는 자는 또 다른 삶의 모양을 고집하는 자와 충돌하게 됩니다. 그러면 세상은 한 뼘만해지며 그 한 뼘의 세상은 각자의 모양대로 맞추려는 자들의 각축전으로 바뀌게 되지요.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세상 속으로 스며드는 일이어서 나는 세상만큼 커질 수도 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조제가 세상을 향해 좋아해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니까요.


여전히 퇴폐와 자학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두 사람이 재회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장국영의 얼굴은 환하게 빛납니다. 그것은 아무런 때도 묻지 않은 태양의 웃음이 아니라 캄캄한 밤을 말없이 비추는 달과 별의 웃음을 닮았습니다. 태양의 빛은 눈을 가리지만 별과 달의 빛은 길을 비춰주지요. 세상이 어둠이라는 것은 이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길을 잃어버릴 염려는 없을 거에요. 우리가 누군가에게 별빛이 혹은 달빛이 되어준다면. 



2022년 11월 27일부터 2022년 11월 2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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