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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Jan 15. 2023

영화 이야기 <벌새>

벌새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입니다. 개체마다 다르지만 가장 작은 것은 몸길이가 5cm인 것도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도 날개짓은 초당 60회를 한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얼핏 봐서는 새라고 생각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5cm 남짓에 윙윙거리는 물체가 곁에 있으면 저라도 새보다는 곤충을 먼저 떠올릴 것 같네요. 


분명 새이지만 얼핏 보기에는 벌 같은 존재. 이것은 얼핏 아이에 대한 비유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이는 분명 사람이지만 우리가 흔히 사람이라는 명사를 사용할 때 떠올리는 어른과는 조금 다르니까요. 그리고 아이라는 명사에는 다 크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몸도 생각도 아직 덜 자랐다는 뜻이고, 몸도 생각도 덜 자랐기 때문에 이런 말을 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 애니까. 애라서 몰라. 애는 괜찮아 등등.


하지만 사람이 세상의 반영이라면, 아이야말로 가장 깨끗한 거울일지도 모릅니다. 유니세프를 비롯한 국제기구에서 사정의 열악함을 알릴 때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마르고 부은 아이들의 모습이고, 영화 <어 퍼펙트 데이>에서 전쟁이 끝났다고 말하지만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음을 알게 되는 것은 겨우 9살 남짓한 아이가 권총을 뽑아들 때입니다. 


한 사람은 태어날 때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이 가능성은 말하자면 자신과 세상 사이의 연결고리입니다. 커서 무엇이 될 지 아직 알 수 없으니까 뭐가 필요한 것이고 뭐가 불필요한 것인지 몰라서 온갖 코드를 모두 연결시켜 놓는 것이지요. 하지만 어른이 되면 슬슬 알게 됩니다. 자신과 세상 사이에 전원이 ON되어 있는 코드 중에는 불필요한 것도 있다는 것을. 거기에 굳이 전기를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까 별로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원을 OFF시키거나 자리가 없으면 아예 코드를 빼어버립니다. 그래서 어른은 어떤 종류의 일에는 놀라울 만큼 무관심할 수 있는 것이지요.


반대로 아이는 덜 자랐기 때문에 여전히 많은 코드가 연결되어 있고 대부분 전원이 ON되어 있습니다. 물론 갓난아이 때에 비하면 많은 전원이 꺼졌지만 그래도 어른에 비하면 훨씬 많은 숫자이고 나아가 갓난아이와는 달리 자신의 몸에 연결된 이 코드들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아이는 어른보다 훨씬 많은 양의 전력을 소비해서 훨씬 많은 양의 전파를 해독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보다 민감하다는 말입니다. 비유하자면 화면은 작아도 훨씬 많은 수의 픽셀을 가진 TV라고 할까요.


영화 <벌새>는 ‘서울, 1994’라는 문장 다음에 곧장 주인공 은희(박지후)를 보여줍니다. 요컨대 1994년의 서울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1994년의 아이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영화의 제목을 벌새로 지은 이유는 이런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벌처럼 보여도 엄연한 새인 벌새처럼 덜 자란 사람처럼 보여도 아이야말로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려주는 가장 민감한 징후라고요. 포스터에 적힌 가장 보편적인 은희라는 말은 아마도 그런 뜻에서 쓴 말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아이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세상의 수많은 이야기들은 자기에게도 생생히 전달된다는 것. 그러나 한편으로 자신을 통과하는 이야기들은 어른들에게 이해받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날개짓을 해서 자기가 새라는 것을 말하고 싶지만 오히려 날개짓이 늘어날수록 남들에게는 벌처럼 보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써놓고 보니 이것은 아이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그렇거든요.


그리고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남들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이해하고 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그 이야기가 ‘어쩌면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의구심으로 바뀐 경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NO라고 외칠 때 나는 YES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용기거나 소신일지는 몰라도 아주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면 그런 경우 상당히 외롭게 됩니다. 그리고 외로워지면 어쩐지 내가 뭔가를 잘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지요. 더 나아가면 어쩌면 나라는 사람 자체가 세상이 보내오는 전파를 잘못 해석하는, 이른바 고장난 교환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하기도 합니다.


영화 속 은희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은희가 보기에 자신을 둘러싼 세상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입니다. 왜 노래방을 가거나 남자친구를 사귀면 날라리가 되는지. 오빠는 대체 왜 날 때리는지. 부모님은 그런 오빠를 뭐라고 하지 않는지. 내가 좋아하는 남자애는 왜 다른 여자애와 바람을 피우는지. 내가 좋다던 여자애는 왜 이번 학기에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지. 엄마와 아빠는 피를 보면서까지 싸워놓고 그 다음 날 왜 같이 TV를 보면서 웃는지. 내가 좋아했던 선생님은 왜 다시 만날 수 없는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처음 생기면 묻기도 하고 따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계속 반복되면 그냥 입을 다물게 됩니다. 말해봤자 상대는 알아주지도 않고 오히려 나만 계속 이상한 사람 되기 일쑤니까요. 그래서 오빠가 때리기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 그냥 참고 있고, 친구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냥 모른 체하고,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애랑 만나는 걸 봐도 굳이 가서 따지지 않습니다. 또 이런 일이 생겼구나 하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경험상 이런 경우 따지거나 상대에게 내 기분을 이해시키는 것보다는 그냥 전원을 OFF시키는 게 훨씬 편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것은 어쩌면 나일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영화의 프롤로그에 심부름을 다녀온 은희는 벨을 눌러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 엄마에게 신경질을 냅니다.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치면서 난리를 피우지요. 그런데 알고 봤더니 우리 집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집은 10층인데 9층으로 와서 남의 집에다 대고 소란을 피운 겁니다. 이런 일이 심부름에서만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도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말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실컷 성질을 내고 소리를 질렀는데 알고 봤더니 10층이 아니라 9층이더라가 되면 도저히 고개를 들 수 없다는 거지요. 내가 이상한 것일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면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겼어도 선뜻 상대에게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요컨대 은희에게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동시에 이해받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한 셈입니다. 이 말은 이렇게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이해받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그래서 전원을 OFF하고 주변에서 이해하는 대로 혹은 시간이 지나가는 대로 내버려두게 됩니다. 마치 침샘에 생긴 혹처럼요. 나는 침샘이 어디 있는지 혹은 또 어디 있는지 전혀 모르지만 의사가 찢어서 꺼내 버려야 한다고 하니까 할 수 없이 수술대에 눕습니다. 그리고 마취가 끝나고 잠에서 깨어나면 혹은 사라져 버리고 없습니다. 분명히 뭔가 만져졌던 것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상처와 흉터뿐입니다.


이 상처와 흉터는 말하자면 억울함입니다. 내가 잘못했을지도 모르니까. 내가 이상한 것일지도 모르니까. 일단 남들이 시키는 대로 그냥 꺼내서 버리긴 했는데 도저히 잊어버릴 수가 없는 것은 이 감정. 전원을 OFF한 뒤에도 정전기처럼 남은 이 따끔함. 이것은 내가 틀렸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 안에 숨은 ‘이게 정말 내 잘못이야?’라는 회의입니다. 알고 봤더니 10층이 아니라 9층이었다고 해도 그걸 틀렸던 건 1층부터 맨 윗층까지 주변에 있는 모든 호수가 다 똑같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설령 내가 틀린 것이라고 해도 나에게는 틀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요컨대 나도 당신들과 똑같은 사람인데 라는 것입니다. 9층과 10층이 다르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아파트의 모든 호수는 다 똑같이 생기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이든 어른이든, 남자든 여자든 우리는 모두 다 같은 사람인데 왜 내가 느끼는 것만 잘못되었는지. 왜 나만 이해할 수 없는 건지. 만약 우리가 정말 다 다른 사람들이라서 하나부터 열까지 서로를 이해하는 게 불가능한 거라면 왜 우리는 이토록 닮았는지. 어쩌면 은희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런 점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자명한 이해할 수 없는 것만큼이나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겁니다. 내가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라면 설령 나머지 모든 거울에 똑같이 비치는 풍경이 있다고 해도 여기 나에게만은 다른 풍경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 다른 풍경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내게 보이지 않는 것을 봤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나는 나와 같은 풍경을 본 사람을 찾길 원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쩌다 한 두 번 혹은 그것보다 조금 더 많이 비슷한 풍경을 볼수는 있어도 끝내 나 외에 내가 본 풍경을 똑같이 볼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내가 본 풍경에 대해 동의하는 누군가가 아니라 설령 끊임없이 남들과 다른 풍경을 비춰도 여전히 내가 거울이라고 말해주는 누군가일지도 모릅니다. 은희에게는 한자 선생님인 영지(김새벽)가 그런 인물이지요. 병원에 입원한 은희를 찾아온 영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 이제 맞지 마. 누구라도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 절대로 가만히 있지 마.” 싸우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믿음입니다. 만약 내가 틀렸다고 생각한다면 목소리든 주먹이든 힘을 낼 수가 없겠지요. 그러니까 영지가 은희에게 싸우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는 틀리지 않았어.


영지의 말을 들은 이후 은희는 더 이상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숨기지 않습니다. 영지를 폄하하는 원장 선생님에게 은희는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라고 대들고, 다시 찾아온 남자 친구에게는 “나 사실 너 좋아한 적 없”다고 차갑게 응수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감정을 속이지 않고 느낀 그대로를 정당하게 표출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겠지요. 말하자면 맞은 만큼 때려준 것입니다.


하지만 은희의 입장에서 이 정당한 응징은 학원에서 쫓겨나고 집에서 성격 파탄으로 몰리는 등 극단적인 고립 상황을 불러오고, 남자 친구와 결별한 뒤에는 시원하기는커녕 가슴에 진 알 수 없는 응어리 때문에 날뛰면서 괴로워합니다. 영지의 말대로 맞고만 있지 않고 때렸는데 상황은 맞고만 있을 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습니다. 은희는 예전에 오빠한테 맞을 때마다 유서를 써놓고 자살함으로써 오빠와 가족들에게 복수하는 상상을 하곤 했습니다. 말하자면 때리는 상상을 하면서 억울함을 달래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때리고 나니 상상과는 달리 뭔가 나아지는 거라고는 없습니다. 오히려 남은 것은 맞고만 있는 것도, 때리는 것도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막막함뿐입니다.


이쯤되면 삶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생물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무기력함에 익숙해지는 것이 어른이 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른들이 전원을 하나씩 OFF하고 코드를 빼는 것처럼 나 역시 내가 느끼는 억울함이나 답답함으로부터 전원을 OFF시켜야 하는 게 아닌지.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 감각을 조금씩 둔하게 만드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은 그리고 삶은 도저히 길들일 수 없는 생물이며 만약 그렇다면 나는 내 삶의 주인이 아닐지도 모르니까요. 적어도 은희가 지금까지 겪은 바로는 그렇습니다.


1994년 10월 21일에 일어난 성수대교 붕괴 사고를 보면 삶은 통제할 수 없는 생물 정도가 아니라 나를 집어삼키는 흉폭한 맹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다리는 사람이 지은 것이니 다리가 무너졌다는 것은 엄연한 인재(人災)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책임질 사람이 없고 사전에 알아채지도 못했으며 난폭하게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뺏어갔다는 점에서 꼭 자연재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1995년 3월 20일에 한 종교단체에서 지하철 한복판에 독가스를 살포하는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언더그라운드>라는 책에서 이 사건의 피해자를 인터뷰하기도 했는데 이때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독가스를 뿌린 가해자들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꼭 자연재해처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른바 사람이 저지른 일이라고 해도 개인이 이해할 수 있는 지평을 넘어가 버리는 순간 그것은 곧 자연재해나 다름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대로라면 사람이 살아가는 일은 삶이라기보다 오히려 생존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맞고만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항할 수도 없는 무수한 이해 못할 일들은 자연재해처럼 사람을 덮치고 우리는 그 속에서 무엇이 옳은가를 생각하기 이전에 오직 살아남는 것만을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도요. 그렇게 생존이 최고의 가치라면 정의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게 정의라는 말도 일변 이해 못할 말은 아닙니다. 부당한 일이라고 해도 참는 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면 참고, 내가 잘못한 일이라고 해도 상대가 만만하면 때리는 게 보다 생존에는 유리한 일일지도 모르지요. 바로 은희가 겪었던 것처럼요.


하지만 그러한 ‘살아남기’가 곧 ‘살아있음’이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텅 빈 영지의 방에서 은희가 손가락을 움직여 보는 것은 선생님의 죽음이라는 난폭한 자연재해 앞에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을 느끼기 때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생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 이기도 합니다. 그 생의 흔적이란 다름 아닌 자신이 어렵고 힘들 때 항상 쉼터가 되어주었던 선생님, 너도 싸우라고 응원해 주었던 선생님과의 추억이겠지요. 말하자면 생은 생존만이 아니라 기억일 수도 있다는 것. 말하자면 누군가가 남겨준 좋은 기억은 숱한 몰이해 속에서도 생을 긍정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성수대교 붕괴가 은희에게 모두 나쁜 일로만 작용했던 건 아닙니다. 언니가 살아있다는 것을 안 날. 은희가 본 것은 가부장적이고 난폭하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오빠의 눈물이었지요. 영지의 말을 빌리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는 알 수 없어도, 다만 나쁜 일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그래서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얼핏 은희가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 대해 느끼는 몰이해의 원인을 가늠하게 합니다. 그건 바로 나쁜 일과 좋은 일이 함께 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둘 중 하나만을 보려고 했던 게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물론 둘 다를 본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쉽게 말할 수 없겠지만요.


영화의 말미에 은희는 성수대교가 무너진 잔해를 보러 갑니다. 이것은 이 자연재해에 대해 말하는 수많은 이야기 대신 스스로의 눈으로 확인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내가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는 풍경을 비춘다는 말은 거꾸로 말하면 이 세상에는 오직 나만이 비출 수 있는 풍경이 있다는 말도 됩니다. 은희가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곳에서 은희가 보았던 풍경이 바로 은희의 삶이 될 거라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란 어쩌면 타인과 공유했던 풍경이 아니라 자신에게만 비췄던 풍경들의 합일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비록 영지의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영지가 보았던 풍경이고 은희에게는 은희만이 볼 수 있는 풍경이 앞으로도 남아 있을 테니까요. 기억해야 할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를 해주려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23년 1월 6일부터 2023년 1월 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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