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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Jan 15. 2023

영화 이야기 <박쥐>

박쥐는 많은 상징을 가진 동물입니다. DC코믹스를 좋아하시는 분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배트맨이겠지요. 우라사와 나오키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빌리 배트>가 생각나실 수도 있고요. 하지만 박쥐하면 가장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건 아마도 흡혈귀일 겁니다. 드라큘라 백작이 왜 수많은 동물 중에 왜 하필 반려동물로 박쥐를 고른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박쥐는 흡혈귀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실제로 흡혈을 하는 박쥐도 있다고 합니다만.


흡혈귀에도 종류가 여러 가지입니다. 영화 <드라큘라>에서는 외경의 대상이고,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나 <트와일라잇>에서는 매혹적인 대상으로 나오며, <블레이드>나 만화 <피안도>에서는 혐오스러운 괴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니까 실제로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하나의 공통점은 바로 흡혈을 해야 살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남의 피가 없이는 살 수 없는 대상이라는 것이죠.


살아있는 모든 동물. 사람이든 짐승이든 혹은 파충류든 식물을 제외한 모든 동물은 몸에 두 가지 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병에 걸리면 색이 또 달라지긴 하지만 대개 건강한 동물의 예를 들면 투명한 색의 액체와 짙은 색의 액체가 기본적으로 세팅되어 있지요. 눈물과 침은 투명한 액체에 속하고 피는 짙은 액체에 속합니다. 두 가지 액체는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불가결한 것이고 몸 안에서 자동 생성되는 것이지만 색깔 외에도 분명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투명한 액체와 달리 짙은 액체는 상처를 내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흡혈귀는 남에게 상처를 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태생부터가 일단 평범하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가기 쉬운데, 사실 이 생존 방식은 아주 이질적인 것입니다. 저편에서 뭔가를 얻기 위해서는 이편에서 뭔가를 꺼내야만 합니다. 가령 물건을 사기 위해서는 돈을 지불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나의 시간과 육체를 소모해야만 합니다. 말하자면 얼마나 균형이 잡혀 있는가는 제외하더라도 모든 교환은 기본적으로 등가 교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흡혈귀의 경우를 보면 이편에서 지불하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피를 제공하는 것도 상처를 얻는 것도 모두 저편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나에게 마이너스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흡혈귀가 매혹적인 캐릭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이런 이유도 한 몫 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상상은 아주 즐거우니까요. 하지만 그건 흡혈귀 쪽에 감정을 이입할 때나 그런 것이고 먹이가 되는 쪽에서는 상당히 불합리한 거래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합니다.


지나치게 뻔뻔한 거 아니냐고 물어도 분명 할 말이 없으리라고 생각되지만 그렇다고 흡혈귀에게 아주 할 말이 없는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기 때문입니다. 분명 세상에 죽고 싶어하는 생명은 없지요. 다만 그 주장을 인정한다면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만약 어떤 존재가 살기 위해서 누군가를 반드시 죽여야만 한다면 그 존재는 사라지는 것이 맞는가 아니면 누구나 인정하는 생명의 정당성에 의거해서 누군가를 죽이더라도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는가. 윤리적으로 보면 아주 간단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어려운 질문입니다. 적어도 그 어떤 존재의 자리에 ‘나’를 대입하면 간단히 대답할 수 없지요.


박쥐가 가지고 있는 상징에는 또다른 것도 있습니다. 어쩌면 흡혈귀보다 이쪽이 더 유명할 수도 있는데 바로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네 발 짐승과 두 발 짐승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 양쪽 모두에게 쫓겨나 어두운 동굴 속에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 여기서 생긴 박쥐의 상징은 바로 기회주의입니다. 두 발 짐승 편에 붙을 때는 네 발 짐승의 특징을 버리고 네 발 짐승 편에 붙을 때는 두 발 짐승의 특징을 버렸겠지요. 그러나 실제로 박쥐가 버린 것은 다름 아닌 양심입니다. 말하자면 이익을 위해 양심을 버리는 것을 기회주의라고 하고, 이 기회주의를 일컬어 박쥐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기회주의는 비윤리적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별로 논의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확실히 이익을 위해 양심을 파는 것은 교과서에서 가르칠 만한 것은 아니지요. 다만 여기에는 한 가지 물어야 할 게 있다고 생각하는데 바로 양심을 파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익을 얻겠다는 목적 그 자체는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양심을 판다는 행위인데 이것은 대개 상대를 속이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리고 상대를 속이는 방법은 딱 두 가지입니다. 바로 비밀과 거짓말입니다.


비밀은 말하지 않은 것이고 거짓말은 다르게 말한 것입니다. 이 둘은 얼핏 다른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 그 울타리가 낮습니다. 가령 알고 있는 것을 말하라고 했을 때 실제로 알고 있음에도 말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비밀이기도 하고 거짓말이기도 합니다. 말하지 않는 것은 때로는 다르게 말한 것이 되고 반대로 다르게 말한 것은 때로는 말하지 않는 게 됩니다. 가령 박쥐는 두 발 짐승에게는 날개에 달린 발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반대로 네 발 짐승에게는 두 발로 걸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박쥐는 침묵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침묵이 두 발 짐승과 네 발 짐승에게는 거짓말이 된 것이지요.


말하자면 양심을 파는 것은 바로 침묵으로 인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존재하는 네 발과 두 발 중에 어느 하나를 모른 체함으로써 박쥐는 이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바로 이 모른 체야말로 양립할 수 없는 난제를 해결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편한 것과 불편한 것이 동시에 발생하면 불편한 것을 모른 체함으로써 편한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거짓말이 잘못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아도 비밀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말하자면 비밀, 즉 모른 체라는 것은 이익과 당위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방법인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흡혈귀의 생존법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죽이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을 때 저울의 양 편에 놓인 것은 각각 나의 생명과 타인의 생명입니다. 이 때 나의 생명과 타인의 생명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모른 체하면 타인의 생명은 단지 먹이가 됩니다. 살기 위해서는 누구나 먹이를 먹어야 한다는 점에서 흡혈귀의 흡혈은 정당해지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흡혈귀의 살고 싶다는 욕망을 뒷받침하는 것은 바로 기회주의라는 침묵인 것입니다. 나아가 욕망을 위해 침묵하는 것은 비단 흡혈귀의 일만은 아니지요. 영화 <박쥐>가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지점입니다.


불치병 환자를 돌보는 가톨릭 병원의 신부 상현(송강호)은 매일 찾아오는 죽음과 죽음 앞에 무기력한 자신의 처지를 괴로워하다 임마누엘 연구소로 떠납니다. 임마누엘 연구소는 이브라고 불리는 불치병 바이러스의 백신을 연구하는 곳인데 상현은 이곳에서 결국 이브에 감염되고 사망하게 되지요. 하지만 정체 불명의 피를 수혈받고 살아나 흡혈귀가 됩니다.


이 영화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동력은 평행한 대립항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감에서 옵니다. 상현이 임마누엘 연구소에 도착하자 소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가 무력해졌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극적인 자살’의 수단으로 이곳을 찾기도 한다”는 것. 실제로 상현이 임마누엘 연구소에 자원한 이유는 매일 같이 일어나는 죽음에 무기력한 스스로를 죽이기 위해서지만 그 죽음은 누군가를 살리는데 소용된다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삶에 대한 의지이기도 합니다. 또한 상현이 외는 기도문은 스스로를 절망적인 상황에 가두라는 죽음에의 천명이면서 동시에 신의 품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삶의 천명이기도 하지요. 말하자면 상현을 둘러싼 죽음과 삶은 서로 구분되지 않는 것입니다. 꼭 죽었지만 살아난 흡혈귀와 같지요.


흡혈귀가 된 상현은 신부로서의 자신을 상실하고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괴로워하게 됩니다. 마치 이브에게 이끌려 금단의 열매를 먹은 아담과 같지요. 상현은 친구의 아내를 탐하고 코 상태에 빠진 환자의 피를 마시며 심지어 살인까지 저지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적 욕망과 생존 욕망을 위해 무수한 타인을 희생시켰다는 이야기이지만 다른 하나는 불쌍한 여인을 구하기 위해 그 여인을 둘러싼 악을 제거할 수밖에 없었고, 그 악을 제거하기 위해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대립되는 두 개의 이야기 중에서 상현이 선택한 것은 후자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전자에 대해서는 침묵한 것입니다. 간음하고 살인을 저질렀다는 명확한 사실은 상현이 설정한 정당한 동기에 의해 당위성을 갖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정당한 동기가 있어도 가톨릭 신부인 상현이 간음과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도저히 침묵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그가 죽어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신은 신 외에 부활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상현은 흡혈귀로 부활한 순간부터 행위의 문제 이전에 존재 자체가 신의 대적자가 된 셈입니다. 자기를 더 이상 신부로 부르지 말라는 상현의 말에는 그러한 자기 인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에 귀속된 신부로서의 자신을 부정하는 동시에 욕망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지요.


영화 속에서 태주(김옥빈)는 아담을 파멸시키는 이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태주의 유혹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감응하는 것은 바로 상현 내부에 있는 욕망입니다. 상현이 감염된 바이러스의 이름처럼 이브는 바깥이 아니라 안에도 있었던 것이지요. 게다가 성경에서 이브는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었습니다. 요컨대 씨앗은 이미 심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박쥐가 기회주의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것을 다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한편으로는 두 발 짐승과 네 발 짐승 모두가 자기 안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상현이 신부에서 괴물이 되어가는 것은 태주의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안에 신부로서의 자신과 괴물로서의 자신이 동시에 존재했기 때문이지요. 요컨대 상현이 저절로 신부가 된 게 아닌 것처럼 괴물 역시 바이러스에 걸려 저절로 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괴물은 선택된 것입니다. 다른 한 쪽에 침묵함으로써.


흡혈귀가 되어 욕망을 주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상현의 모습은 말 그대로 욕망에 지배당한 시체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바로 그러한 시체들의 은유에 다름 아닙니다. 아들을 위해 고아가 된 여자 아이를 제멋대로 결혼시킨 라 여사(김해숙), 호시탐탐 태주를 노리는 승대(송영창)와 영두(오달수), 눈을 뜨기 위해 흡혈귀가 되고 싶다는 박신부(박인환)까지. 이 모두는 바로 자신의 욕망을 위해 자기 안에 있는 다른 이야기에 침묵한 시체들인 셈입니다. 이들이 모이는 장소인 라 여사의 집이 검고 파란 톤인 것은 다름 아닌 이들의 어둡고 내내밀한 바닷속 같은 욕망이 반영된 공간이기 때문이지요. 해서 나중에 상현과 태주가 집을 온통 하얀 색으로 그러니까 병원과 같이 바꾸는 것은 바로 그들을 죽이는 자신들을 의사의 위치에 놓고 반대로 살해당하는 그들은 병균의 위치에 두는 이른바 역전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위가 온통 자신을 둘러싼 욕망으로 가득 차 있을 때 그 당사자의 욕망은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주위가 바닷속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지요. 욕망은 피의 온도를 높입니다. 따라서 아무런 욕망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은 피의 온도가 내려갈 수밖에 없겠지요. 태주가 파란색 옷을 입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온도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그녀가 밤마다 밴발로 밤거리를 뛰는 이유는 바로 자기보다 더 차가운 바닥을 맨발로 밟음으로써 아직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온도를 확인하는 것이자 동시에 뜀으로서 그 온도를 높이려는 것이겠지요. 상현을 처음 유혹하면서 하는 “나는 부끄럼타는 사람이 아니에요.”라는 말은 바로 그러한 차갑지 않은 자신의 온도, 즉 죽지 않은 욕망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한편으로 온도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흡혈귀가 빛에 노출되면 화상을 입는다는 것은 대개 그 빛의 온도로 마치 레이저에 공격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그것은 빛에 노출되는 순간 바로 자기 안의 체온이 과열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외부적 요인이 아니라 내부적 요인이라는 것이지요. 욕망의 과열로 인해 스스로를 불태우는 것이라고 할까요. 욕망은 분명 피를 뜨겁게 만드는 것이니까요.


실제로 상현이 태주와 함께 죽음을 결심하는 이유는 바로 그들의 욕망이 그들 자신을 더 갈 곳 없이 몰아붙였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말하면 침묵했던 이야기, 즉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했던 이야기의 반대편에 선명하게 살아있던 이야기를 더 이상 모른 체 할 수 없었다는 말도 되겠지요. 라 여사를 죽이지 않고 살려둔 채 계속 데리고 다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죄의식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죄의식이란 원래 말하거나 성토하지 않는 법입니다. 죽거나 자연히 사라지지도 않지만요.


다만 이것이 전부라면 이 이야기는 갈 곳 없는 죄의식만 남겨둔 구원 없는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구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태주가 마지막에 신는 상현의 구두입니다. 그 구두는 태주가 맨발로 달리기를 할 때 상현이 벗어준 것으로 바닷속 같은 세상에서 태주가 처음으로 느낀 온기입니다. 그리고 그 온기로 말미암아 태주의 차가운 피는 덥혀지게 되지요. 물론 그것은 온기를 넘어 열기로 변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불태우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지만 적어도 그 온기가 시체 같이 차가운 여자를 욕망을 가진 인간으로 변모시킨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태주는 재로 변하지만 신발은 재로 변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결정짓는 것은 언제나 내부의 것이지 외부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2023년 1월 10일부터 2023년 1월 14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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