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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Jan 27. 2023

영화 이야기 <그린 북>

이것은 분명 색깔에 대한 이야기지만 색깔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흑인을 비롯해 소위 유색인종에 관한 이슈는 오래된 과거의 유물 같다가도 불쑥 고개를 내밀어 그것이 현안임을 깨닫게 합니다. 2020년 플로이드 사건부터 지금도 인터넷에 흑인이라고만 검색하면 차별에 관한 온갖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컨대 문제는 늘 거기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흑인이 노예였던 시절에 인종차별이라는 용어는 아마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대신 평등이라는 말은 있었겠지요.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지금도 인권에 대해 말하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미국 독립선언문에도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사람에는 여자와 흑인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평등이라는 단어는 제한적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사실 지금도 그렇지요. 모든 단어는 그릇과 같습니다. 똑같은 말이라도 무슨 의미를 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말이 됩니다. 가령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독재국가의 이름에도 여럿 붙어 있는 것처럼요.


인종차별이라는 단어가 나온 것은 추측컨대 흑인을 독립선언문에 나온 사람의 범위에 포함시켜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투표 때문일 수도 있고, 전쟁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든 상관은 없습니다. 중요한 건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흑인들은 듣기 시작했겠지요. 우리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며 백인들과 대등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어도 링컨과 로자 파크스, 말콤X와 킹 목사를 거쳐서 이 이야기는 물줄기에서 강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이야기라는 건 원래 제 역할을 다하면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인종차별에 관한 이야기는 사라질 기미는커녕 점점 바다로 나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내버려두면 이 바다는 언젠가 해일을 일으킬 것입니다.


영화 <그린 북>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천재 피아니스트 셜리(마허샬라 알리)는 남부 순회 공연을 위해 운전기사를 모집합니다. 흑인을 싫어하지만 실직 때문에 할 수 없이 운전기사가 된 토니(비고 모텐슨)는 남부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흑인이 받는 차별대우를 실감하고 그를 지키기 위해 싸우게 됩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대개의 경우와 달리 흑백의 지위를 바꾸었다는 점입니다. 영화 <노예 12년>이나 <장고 : 분노의 추격자>, <파워 오브 원> 등 흑인에 대해 말하는 거의 모든 영화는 흑인을 피지배층의 자리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고용주는 흑인이고 백인은 피고용자로 나옵니다. 말하자면 상황을 전도시킨 것이지요. 다 쏟아진 모래시계를 뒤집으면 새로운 시간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흑인과 백인의 상투적인 지위를 바꿔놓음으로써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어쩌면 그 동안 색깔의 문제라고만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색깔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셜리는 흑인입니다. 그는 미국의 유력 정치인과 친분을 가진 정상급 피아니스트이고 상류층의 양식을 갖춘 사람입니다. 칼과 포크를 써서 식사를 하고 사적인 자리와 공적인 자리에서 사용하는 말을 구분할 줄 알며, 문법에 능하고 다양한 표현을 쓸 줄 압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할 뿐만 아니라 영어 외에도 러시아어, 이탈리아어를 할 수 있을 만큼 외국어 실력도 뛰어납니다. 흑인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사실상 미국 최상류층이나 다름없습니다.


토니는 백인입니다. 거의 평생을 나이트 클럽에서 일해왔고 말보다 주먹이 먼저이며 이탈리아어와 영어를 둘 다 할 줄 알지만 둘 다 엉성합니다. 끊임없이 담배를 피우며 대중음악을 주로 듣고 눈치껏 도둑질도 합니다. 한 손으로 음식을 먹으면서 다른 한 손으로 운전을 하고 먹다 남은 음료수를 도로에 버려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전형적인 미국 하류층에 속하지요. 그의 말처럼 백인보다는 오히려 흑인에 더 가까운 사람입니다.


표면적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이토록 다른데도 불구하고 셜리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싸구려 모텔에서만 잠을 자고 토니는 깨끗한 숙소에서 잘 수 있다는 것. 옷을 살 수는 있지만 사기 전에 입어볼 수는 없고 바에서 술이라도 한 잔 하려들면 어김없이 시비가 붙는다는 것. 말하자면 피부색으로 인해 그의 개인적 성취와 사회적 지위 그리고 고결한 영혼이 모두 폐허가 된다는 말이지요. 반대로 아무것도 없는 토니는 단지 백인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초점을 여기에 맞추면 문제는 흑백논리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흑인은 피해자이고 백인은 가해자라고 해버리면 더 이상 어떤 말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물론 바에서 시비를 걸었던 자들이나 무고한 사람을 별 이유 없이 가둔 경찰관, 화장실을 쓸 수 없다고 말하는 공연 주최자들은 분명 백인 가해자들입니다. 하지만 토니의 아내 돌로레스(린다 카델리니)는 일하러 온 흑인에게 음료수를 대접하고 토니의 가족은 셜리를 크리스마스 파티에 끼워주기도 합니다. 반대로 몰래 차에 숨어 강도짓을 하려고 했던 자들은 흑인이었죠. 말하자면 도덕성을 결정하는 것은 색깔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셜리와 토니의 조합은 분명 흑인과 백인의 조합이지만 한편으로는 상류층과 하류층의 조합이기도 합니다. 흑인을 싫어하는 토니가 셜리의 운전기사가 된 것은 기본적으로 셜리가 그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난데없이 경찰이 두 사람의 차를 세우고 모욕을 가하는 이유도 경찰이 그들보다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같은 이유로 주지사에게 전화가 오자 경찰은 셜리와 토니를 풀어줍니다. 말하자면 흑백 이전에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위아래가 분명한 계급의 논리인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대부분의 백인은 공연장이나 고급 식당에 있습니다. 반대로 흑인은 밭에서 일하거나 싸구려 주점에 모여 있지요. 요컨대 피부라는 것은 단지 기호일뿐 그 기호가 가리키는 내용은 바로 백인은 상류층이고 흑인은 하류층이라는 인식입니다. 앞전에 본 영화 <라파예트>에서도 흑인과 같은 방을 배정받자 노예와 한 방을 쓸 수는 없다고 거절하는 백인이 등장하죠. 인종차별의 저변에는 백인은 주인이고 흑인은 노예라는 계급의식이 깔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흑인의 공연을 볼 수 있어도 흑인과 같이 식사를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조선시대에는 광대를 불러 공연을 시키는 일은 많아도 겸상은 하지 않는 문화가 있었지요.


요컨대 이것은 인종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셜리는 호텔에서 백인 남성과 밀회하다가 경찰에 체포당합니다. 이때 붙잡히는 건 셜리만이 아닙니다. 백인 남성 역시 수갑만 차지 않았을 뿐 억류되어 있지요. 말하자면 백인이 표준인 사회에서 흑인이 노예로 여겨지듯이 이성애자가 표준인 사회에서 성소수자는 하위 계급이 되고 맙니다. 이른바 표준이 정해지고 나면 그 표준에 속하지 않는 것은 아래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차이가 차별로 변하는 것이지요.


흑인이나 성소수자 외에도 이런 예는 영화 속에서 여럿 등장합니다. 대중음악과 클래식, 정장과 작업복, 운전사와 고객, 월세집과 성. 이러한 것들은 형태만 다를뿐 동일한 차별의 원리로 작동하는 흑백들입니다. 셜리가 피아노를 치고 외국어를 배우는 등 위로 올라가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차별의 메커니즘을 빠져나오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피부색은 바꿀 수 없는 것이지만 나머지는 바꿀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셜리의 생각입니다. 토니에게 하는 말에서도 그러한 그의 지향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지요. “저들은 들어올지 말지 선택할 수 없었지만, 당신은 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경찰서를 나오면서 토니와 다투는 와중에 셜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난 성에 살아. 혼자서. 돈 많은 백인은 피아노 치라고 돈을 주지. 문화인 기분 좀 내보려고. 하지만 무대에서 내려오는 순간 그 사람들한텐 나도 그냥 깜둥이일 뿐이야. 그게 그들의 진짜 문화니까. 그런데 하소연할 곳도 없어. 내 사람들도 나를 거부하거든. 자신들과 다르다면서. 충분히 백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흑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남자답지도 않으면 난 대체 뭐죠?”


차별이 싫어서 있는 힘을 다해 위로 올라갔는데 셜리가 다다른 곳은 백인도 아니고 흑인도 아닙니다. 그곳은 성이지만 혼자인 곳입니다. 어느 무리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 대해 물어야 하는. 분명 위로 가고 있다는 실감은 있지만 그 방향은 원래 도착하고자 했던 곳과 점점 멀어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렇습니다. 그는 차별이 싫었지만 그 차별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바로 그 차별의 메커니즘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차별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라 아래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 것입니다. 위로 가면 이 지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는 믿음. 차별의 메커니즘은 바로 이 믿음으로 작동합니다. 요컨대 셜리 식으로 말하면 흑인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나머지는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이 흑인이라는 한계에 발목이 잡힌 것이지요.


흑인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나머지는 바꿀 수 있다는 것. 이 말은 얼핏 그럴듯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피부색은 타고나는 것이지만 피아노 실력이나 고급스러운 언어와 행동 양식 그리고 재산은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여기에는 뭔가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분명 피부색은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 나머지는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일까요.


노력보다 유전이다 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저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한다는 말은 진리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무언가를 얻는 데 실패했을 때 그것을 단지 노력이 부족해서 라는 말로 간단하게 끝내버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가령 가난은 개인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가난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은 나와 세상 사이의 긴장관계에서 발생합니다. 따라서 노력 때문이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책임을 개인에게 미루는 셈이 됩니다.


이런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슬로건이지요. 기회의 땅이라는 말의 이면에는 실패는 땅의 책임이 아니라는 뜻도 들어가 있습니다. 셜리가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막다른 길에 몰리게 된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흑인은 앞서 말했듯이 다른 여타 비주류와 마찬가지로 하위 계급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계급 문제는 당연히 사회적인 이슈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아메리칸 드림에서는 계급의 이동을 개인의 몫으로 넘기고 있습니다. 즉 노력을 통해 위로 올라가려는 셜리의 방식, 즉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이관하는 아메리칸 드림의 방식으로는 계급 문제라는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요컨대 흑인이나 가난 같은 문제는 모두 사회적인 이슈임에도 불구하고 해결은 개인에게 맡겨버린다는 것입니다. 아메리칸 드림이니 개인주의니 하는 슬로건은 얼핏 개인의 자유도를 존중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사회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이면을 가지고 있다는 거지요. 흑인은 어쩔 수 없지만 나머지는 바꿀 수 있다. 이러한 셜리의 생각에는 세상에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존재하지만 그 문제를 푸는 것은 개인의 몫이라는 기묘한 패러독스가 반영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는 대체 뭐냐고 울부짖는 셜리의 내적 갈등은 바로 이 패러독스에서 발생합니다. 사회가 준 가이드대로 혼자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지만 문제는 풀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모두의 문제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풀어야 할 숙제를 한 사람이 풀어야 할 숙제로 만드는 것은 입체적인 것을 단면화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말하자면 복잡한 사회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축소시켜 버리는 해결책과 수많은 다양성을 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을 단지 흑인 혹은 단지 성소수자로 만들어버리는 문제점은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진짜 문제는 이러한 구조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영화의 제목인 그린 북은 흑인만을 위한 가이드북입니다. 여기에는 인종차별은 백인과 흑인 모두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흑인만의 문제라는 인식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지요. 실제로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은 이 그린 북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흑인 숙소를 벗어나 바에 가고, 통금 시간을 넘어서 활동하는 것은 분명 그린 북에 명시된 내용은 아닙니다. 하지만 왜 흑인만이 그런 가이드북을 따라야 하는 것일까요. 그린 북이라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흑인 가이드북이지만 실제로는 양측의 문제를 일방의 문제로 돌려버리는, 말하자면 입체적인 것을 단순하게 바꾸고 그렇게 단순해진 것으로 입체적인 것을 판단하라고 안내하는 사회의 가이드북 그 자체인 셈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그린 북을 거꾸로 썼습니다. 입체적인 것을 단순하게 안내하는 대신 단순한 것을 입체적으로 안내하고 있지요. 영화 속에서 셜리는 단순한 흑인이 아니라 피아니스트이면서 성소수자이고 정장을 좋아하면서 클래식을 하고 싶어하는 사회 상류층이자 무시당하는 흑인으로 나옵니다. 토니 역시 단순한 백인이 아니라 이민자이면서 가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부색 때문에 흑인보다는 나은 대우를 받는 백인으로 등장하지요. 요컨대 그린 북과 달리 영화 <그린 북>은 압축되어 버린 대상 속에 있는 수많은 요소들을 하나씩 하나씩 모두 꺼내놓음으로써 입체적인 것을 단순하게 만든 시대의 편견을 입체적인 것을 입체적으로 보는 정견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만드는 것은 문제를 간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해결책을 간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영화 <그린 북>이 던지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토니와 셜리가 가까워지는 것은 바로 서로가 가진 수많은 다른 점들이 교차하면서 생각지도 못한 공감대를 형성하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흑인과 백인, 고용주와 피고용인 같은 단순한 명제들로 서로를 대했다면 절대 알 수 없었을 서로의 집합점입니다. 요컨대 사람은 바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모래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누구에게나 바위는 있습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위도 처음에는 모래였다는 것. 말하자면 그것은 강한 것이 아니라 굳어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지요.



2023년 1월 17일부터 2023년 1월 2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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