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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Jan 29. 2023

영화 이야기 <정이>

<터미네이터>나 <매트릭스> 같은 영화의 세계관을 디스토피아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토마스 모어가 쓴 <유토피아>라는 책에서 유래했습니다. 유토피아는 보통 낙원으로 해석하지만 직역하면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읽으면 NO WHERE인 셈이지요. 그런데 이 문장은 띄어쓰기에 따라 NOW HERE도 됩니다. 요컨대 유토피아란 어디에도 없는 곳이면서 지금 여기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어디에도 없으면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을 두고 현재라고 합니다. 현재는 지금을 말하는 것이지만 붙잡으려는 순간 과거가 되어버립니다. 또한 현재는 늘 그곳에 있는 자에게는 낙원이지만 늘 그곳을 잃어버리는 자에게는 세상에 없는 곳이기도 하지요.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의 반대말입니다. 말하자면 실낙원인 셈이지요. 유토피아가 낙원을 현재라고 부른 것과 달리 디스토피아의 시간은 가깝거나 먼 미래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분명 미래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행복은 영원하지 않다고 말할 때 그 행복의 적은 다름 아닌 미래이며 시간은 금이라고 할 때 가장 두려운 도둑 역시 미래입니다. 말하자면 시간은 모든 것을 허물어뜨리는 메뚜기떼와 같고 이 메뚜기떼를 일컬어 사람들은 노화라고 부릅니다. 단단한 것도 굳센 것도 노화 앞에서는 모두 낡고 부스러집니다. 말하자면 디스토피아라는 것은 사라지는 것에 대한 공포인 것입니다.


디스토피아를 상징하는 여러 가지 미래 중에 기계가 꼭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기계는 늙지 않는 것입니다. 늙지 않으므로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기계란 인간이 지닌 최대의 약점을 극복한 존재입니다. 리처드 도킨슨은 <이기적 유전자>에서 인간은 유전자가 살아남기 위한 생존기계이며, 이 생존기계는 유전자가 안전하게 다음 세대로 이어지기 위한 목적으로 진화해 왔다고 말합니다. 유전자가 자기 유전자 정보를 다음 세대로 넘기려는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이라는 생존기계는 언젠가 죽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이라는 바디는 유효기간이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바디에 유효기간이 없어진다면. 그러니까 유효기간이 없는 생존기계는 진화의 종점이 아닐까. 유전자가 복제를 하려는 이유는 생존기계가 소멸하기 때문인데 만약 소멸하지 않고 영원히 사용할 수 있다면 굳이 자기 유전자 정보를 복제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가정이 맞다면 인간은 더 이상 유전자에게 필요한 바디가 아닙니다. 기계로 유전자를 복제하고 나면 유전자의 입장에서 인간은 할 일을 모두 다 한 셈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은 진화가 끝난 세상입니다. 말하자면 최종 진화 사회인 셈이지요. 그런데 왜 이곳은 암울하고 어둡게만 그려지는가. 이유는 한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인간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터미네이터>에서 기계가 존 코너를 죽이려는 이유는 기계 입장에서 봤을 때 진화가 완성된 사회를 인간이 파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매트릭스>는 인간을 열에너지원으로 사용하지요. 이것은 기계 입장에서 보면 인간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은 노예가 된 것이나 다름없지요.


말하자면 디스토피아란 인간의 디스토피아인 것입니다. 미래라는 개념이 없는 기계는 늘 현재에 있습니다. 즉 유토피아에 있는 셈이지요. 그렇다면 인간이 죽음에 대한 공포,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벗어나 기계가 살고 있는 유토피아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그건 바로 노화를 막을 수 없는 인간의 육체를 버리고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기계와 결합하는 방법입니다. 영화 <정이>의 예를 든다면 뇌를 복제해서 기계에 이식하는 것이지요.


인간의 유한한 부분을 폐기하고 무한한 것으로 갈아타는 이야기는 <정이> 이전에도 많이 있습니다. 애니메이션 중에는 <은하철도 999>의 기계인간, <강철의 연금술사>의 호문클루스가 그렇고 영화 중에서는 기계가 나오는 건 아니지만 <더 게임>처럼 뇌를 이식해서 영생을 추구하거나 <아일랜드>처럼 복제인간의 장기를 사용해 수명을 연장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요컨대 유한성의 폐기가 인간을 유토피아로 이끌어줄 것인가 라는 질문은 아주 오래된 질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이제 어떤 면에서는 식상하기도 한데 그건 질문이 낡아서가 아니라 모든 이야기의 대답이 항상 같았기 때문입니다. 유한성의 폐기는 디스토피아를 초래한다는 것이 이제까지 모든 이야기의 결론이었지요.


이것은 분명 납득할 만한 부분도 있고 윤리적으로 설득력 있는 대답이기도 합니다만 분명한 것은 아직 인류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을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유한성의 폐기가 디스토피아를 불러온다는 말은 유한성을 폐기할 수 없는 인간이 한 말입니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고 해도 여기에는 어쩐지 여우의 신포도 같은 뉘앙스가 있습니다. 영화 <정이>가 이제까지의 디스토피아와 차별점을 보이는 지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이 영화는 인간과 로봇이 결합한 존재를 괴물이 아니라 신인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정이(김현주)와 서현(강수연)의 가계도를 보면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할머니도 있고 엄마도 있고 딸도 있는데 할아버지나 아빠는 없습니다. 요컨대 세대는 전승되는데 남성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유성생식을 하기 때문에 생명을 낳기 위해서는 반드시 남성과 여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필요한 것은 정자와 난자 그리고 자궁입니다. 가정의 사회적, 윤리적 가치를 제외하고 오직 생식만을 논할 때 육체가 필요한 것은 여성뿐이라는 겁니다. 실제로 방송인 사유리 씨는 남성과 가정을 만들지 않고 오직 정자만을 제공받아 홀로 가정을 만들기도 했지요.


말하자면 생식을 위한 인간의 가계구조가 바뀌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성과 여성이 결합하여 아이를 낳고 키우는 가계를 1세대라고 칭한다면, 여성이 정자만을 이용해 아이를 낳고 키우는 가계는 2세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로지 생식에 관해서만 말한다면 기계의 몸에 인간의 뇌를 복제해서 만드는 AI는 3세대가 됩니다. 물론 이쯤되면 가계라는 말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뇌를 복제해서 증식하게 되면 유성생식의 시대가 끝나고 무성생식의 시대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여성이 정자를 제공받아 가계를 만드는 2세대는 이러한 무성생식의 단초가 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여성은 홀로 임신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사람이 없이도 생식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기술의 발달이라는 판타지를 사용하면 굳이 여성의 육체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자궁의 역할을 할 기계를 만들고 거기에 정자와 난자를 넣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단지 생식만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면 유성생식은 아주 번거로운 방법입니다. 일단 난자와 정자가 결합하기까지 많은 시도가 필요하고, 결합에 성공해도 인간의 모양을 갖추기까지 1년 가까운 시간이 걸리며, 출산에 성공해도 성인이 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을 양육해야 합니다.


그런데 뇌를 복제해서 기계에 이식해 버리면 단숨에 성인이 태어납니다. 영화 속에서 연구소장(류경수)은 회장(이동희)의 뇌를 복제해서 만든 AI지만 회장은 그를 두고 전혀 자신과 같지 않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외모도 다르고요. 말하자면 뇌를 복제해도 똑같은 인간이 대량 생산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이의 테스트만 봐도 뇌의 어느 부분이 더 활성화되고 덜 활성화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인격들이 등장합니다. 말하자면 복제된 AI는 제각기 다른 인간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생식만을 목적으로 한다는 가정 하에서 성인의 뇌를 복제해서 기계에 이식하는 것은 시간과 비용 그리고 효율성 측면에서 능률이 높은 생식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을 디스토피아로 그린 여러 이야기에서 이런 AI는 현생 인류를 위협하는 괴물에 속합니다. 가령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동명의 직업은 인간 행세를 하는 AI, 즉 리플리컨트를 사살하는 역할이지요. 하지만 <블레이드 러너>에서 주인공을 살려주며 과거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리플리컨트의 모습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모습입니다. 요컨대 <블레이드 러너>는 인간과 기계는 다르다고들 하는데 정말 그런가, 진정 인간은 기계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가 라고 역으로 묻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그렇습니다. <블레이드 러너>나 앞서 예를 든 <은하철도 999>에서 세계를 디스토피아로 만드는 것은 기계와 인간이 결합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기계와 인간을 차별하는 계급제도에 기인합니다. 이 영화에서도 정이의 비극은 AI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C타입이 되었기 때문에 발생하지요. 나아가 정이가 AI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경제적으로 하위 계급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요컨대 문제는 기계가 아니라 계급이다. 영화 <정이>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의 말미에 서현은 뇌의 미확인 영역이 확인된 AI정이를 구출합니다. 이 미확인 영역은 아이를 생각할 때 활성화되는 것으로 아마 모성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이는 바로 그 모성으로 인해 식물인간이 되었고 AI정이 역시 모성으로 인해 테스트마다 매번 죽고 맙니다. 말하자면 정이나 AI정이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모성, 즉 인간성이란 인간의 존엄을 지켜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초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현이 AI정이를 구출하기 위해 인간성 영역을 비활성화시키는 것은 이런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윤리적 인간성보다 오히려 냉정한 기계의 메커니즘이 필요하다는 것. 그러니까 기계가 된다는 것은 인간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생을 선택하는 것이며, 살아남기 위해 기계로서의 생을 선택한 자들이야말로 괴물이 아니라 신인류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인간성이 비활성화된 AI정이는 죽어가는 서현을 안아줍니다. 이것은 아무리 온몸이 기계로 이루어져 있어도 뇌라고 하는 인간의 영역이 남아 있는 이상 그것은 단순한 기계라기보다는 인간과 기계가 조합된 새로운 존재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겠지요. 영화의 제목인 <정이> 역시 <情E>로 읽는다면 인간-기계를 뜻하는 신인류의 이름이 됩니다. 만약 <정이2>가 나온다면 이 신인류는 아마도 계급제도를 무너뜨리기 위한 레지스탕스가 되어 있겠지요. 물론 그 상대 역시 인간-기계가 결합한 ‘정이’들일 것이고요.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는 건 다가오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컨대 푸쉬킨이 말한 것처럼 마음을 미래에 두지 않고 현재에 둘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영생의 욕망이란 곧 유토피아에 대한 동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얻은 영생의 사회에도 위와 아래가 있다면 과연 그 신인류는 지금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진정으로 두려운 것은 미래가 아니라 위일지도 모릅니다. 과거를 보면서 위안을 얻는다고 했던 것이 실제로는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는 것처럼요.



2023년 1월 23일부터 2023년 1월 2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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