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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Feb 03. 2023

영화 이야기 <혼자 사는 사람들>

진아(공승연)를 보면서 정말 저런 사람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가 문득 그녀의 말과 행동이 누군가와 겹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로 저입니다. 저는 담배를 피우지 않고 후배 교육에 냉담했던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아마 영화를 본 많은 분들이 진아를 보면서 자기 자신을 떠올렸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렇게 한 적은 없지만 저것과 다르다고 할 수도 없는 것. 진아와 우리는 일치하지는 않지만 교집합입니다. 이 교집합은 구체적인 행동이나 말과 같은 양식이 아니라 그런 양식을 만들어내는 동력에서 비롯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개인이라는 자각이지요.


진아는 금융회사 콜센터 직원입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와는 왕래하지 않습니다. 일할 때는 헤드셋을 끼고 일하지 않을 때는 이어폰을 낍니다. 점심은 혼자 먹고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습니다. 친한 동료도 친구도 없고 퇴근하면 집에 가서 TV를 봅니다. TV는 끄지 않습니다. 저녁을 먹으면서 보는 것은 물론 잘 때도 출근할 때도 틀어져 있습니다.


요컨대 진아는 철저하게 혼자지만 항상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업무 시간에는 민원을 듣고 이동할 때는 노래나 유튜브 소리를 들으며 집에 가면 TV 소리를 듣습니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혼자를 고집하는 것 같아도 사실은 타인과의 관계를 갈구하는 무의식의 반영처럼 보이기 쉽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진아가 듣는 소리들은 일할 때 어쩔 수 없이 들어야만 하는 민원을 제외하면 모두가 기계에서 나오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기계 소리가 가진 특징은 바로 사람을 혼자로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출근할 때 지하철을 타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어폰을 꽂고 있습니다. 음악을 듣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사람마다 목적은 다르지만 이어폰이 하는 기본적인 역할을 똑같습니다. 그건 바로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고립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귀가 열려 있을 때 우리는 세상에 생각보다 많은 소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람이 부는 소리, 바람이 불면서 낙엽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 낙엽을 밟는 구둣소리, 구두와 보도블럭이 부딪히는 소리, 버스가 서는 소리, 버스에 타는 사람 소리. 이런 무수한 소리들은 마치 신경처럼 세상과 나를 연결시켜줍니다. 이어폰은 말하자면 차단기와 같습니다. 귀에 꽂는 순간 세상과 나 사이에 연결된 신경은 차단됩니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공간 속에서도 오롯이 내 공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집이나 차 같은 물리적인 격리 혹은 눈을 감거나 귀를 막는 감각의 격리일 수도 있고 취미나 좋아하는 사람처럼 영혼의 격리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형태이든 간에 이러한 혼자만의 공간은 세상과 분리된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나를 확인시켜 줍니다. 가정이나 학교, 직장을 비롯한 수많은 관계 속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나와 남의 영역이 섞여 버리기 마련입니다. 요컨대 금을 그어놓고 여기까지가 내 영역이고 나머지가 네 영역이라는 식의 구분은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면 어쩐지 점점 나의 존재가 희미해지는 기분이 듭니다. 이 부분만큼은 나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게 있는지조차 선명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 나는 혼자만의 공간으로 들어가 섞이고 섞여서 희미해진 와중에도 분명한 나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혼자만의 공간이란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곳인 셈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면을 감안하더라도 진아의 행동에는 보통을 넘어서는 강박이 있습니다. 하루 종일 바깥에서 이어폰을 끼다가 집에 들어오면 내내 TV 소리를 듣습니다. 요컨대 혼자만의 공간에 가끔 들어오는 게 아니라 하루 종일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확인하려는 강박이며 반대로 말하면 자기 자신이 사라질 것만 같은 불안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렇다면 진아를 이토록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가족입니다.


진아의 아버지는 외도로 가족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진아는 17년간 엄마와 둘이서 살았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돌아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갑작스럽게 엄마는 돌아가시고 재산은 아버지에게 상속됩니다. 진아 입장에서 아버지는 용서할 수 없는 타인이겠지요. 하지만 아버지와 절연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엄마의 휴대폰을 사용합니다. 진아는 아버지에게 전화가 올 때마다 엄마라는 이름을 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호의 이름을 아버지로 바꾸지 못하는 것은 그렇게 하면 엄마를 지워야 하기 때문이지요. 엄마를 지우지 못하기 때문에 엄마의 남편인 아버지는 가족으로 남게 됩니다. 하지만 진아에게 있어 아버지란 자신을 낳아준 가족인 동시에 가족을 버린 남이기도 합니다. 가족과 남이라는 상반된 성질을 가진 존재를 진아는 버리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결국 버리게 되는 것은 다른 것이 됩니다. 바로 자기 자신이지요.


아버지를 받아들이기 위해 진아는 아버지를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을 버려야만 합니다. 자신을 버렸기 때문에 진아는 온갖 고객이 해괴한 요구를 하는 콜센터에서 일할 수 있습니다.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사과해야 하냐고 묻는 수진(정다은)과 달리 진아는 어떤 맥락에서도 죄송하다는 말을 할 수 있고, 타임머신을 가졌다는 남자나 거래명세서를 읽으라고 요구하는 여자도 여느 고객과 똑같이 응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용납할 수 있는 것과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한 자기 자신이 누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이 분명한 수진은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을 참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지요.


자기 자신이 누락되어 있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영혼을 잃어버린 것과도 같습니다. 진아가 죽은 남자를 볼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겠지요. 영혼을 잃었다는 것은 몸은 이승에 있어도 영혼은 저승에 있다는 말이니까요. 말하자면 생과 사의 중간에 진아는 걸쳐 있는 것입니다. 죽음에 한 발을 딛고 있어서 죽은 자를 볼 수 있고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무관심할 수 있지만 나머지 한 발은 생에 딛고 있어서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며 자기 자신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다만 이 모든 것이 아버지 때문이다 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자기 상실은 특정한 원인이 문제가 되어 발생하는 트라우마 같은 것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출구가 막혀 있는 딜레마에 가깝습니다. 어머니의 영정사진을 앞에 두고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 아버지부터 상담원을 스트레스 해소 창구로 생각하는 듯한 고객에 이르기까지. 가족에서도 직장에서도 진아가 가는 곳마다 마주치는 것은 스스로를 상실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는 환멸의 세상입니다. 말하자면 영혼의 자리를 비워두지 않고서는 세상과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장소가 이어폰을 꽂거나 TV를 켜는 등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곳이 아니라 바로 타인이라는 점입니다. 수진이 회사를 그만둔 후 진아는 늘 먹던 점심을 먹지 못합니다. 자리에 돌아와서 수진이 준 선물을 모두 버리고 업무를 시작하지만 갑자기 수진이 말했던 환청이 들리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고장난 로봇처럼 업무를 중단하고 맙니다. 하지만 이것은 영혼이 없는 로봇에게는 고장이지만 영혼을 가진 인간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지요. 진아에게 장애를 일으킨 것은 바로 죄책감이기 때문입니다.


가족도 그랬고 직장도 그래서 진아 역시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진아는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것이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아가 그렇게 했던 이유는 바로 그것이 세상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라는 것은 결국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수진에게 냉담하게 대했지만, 수진이 떠나고 수진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면서 진아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상처를 받을만큼 받아서 굳은살이 생겼다고 생각한 자리에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을요. 그렇기 때문에 진아는 아버지에게 달려가 말하는 것입니다. “나한테 미안하다고 해요.” 말하자면 나의 영혼을 유폐시킨 것은 타인이 아니라 타인의 무례함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결국 예의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입니다. 단순히 타인은 지옥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왜 지옥인지 말해주는 것이지요. 나아가 이 지옥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영화는 성훈(서현우)을 통해 보여줍니다. 자살한 남자가 살던 집으로 이사 온 성훈은 이 집에서 있었던 일을 알고 속았다고 분노하는 대신 아파트 사람들을 모아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냅니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니는데 하나는 히키코모리나 성인 잡지에 파묻힌 고독사 등으로 모욕당한 인간을 위무함으로써 그가 누구였건 어떤 일을 했건 간에 인간에게는 인간을 대하는 예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 제사가 집을 떠나지 못하는 귀신을 내보낸다는 의미에서 예의를 지키는 것과 섞여 사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각자의 고유한 영역이 있고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면서 그 영역을 지켜야 한다는 것. 진아가 수진에게 했던 두 가지 말 역시 이와 같습니다.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사과는 수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이며, 혼자 하는 모든 것들이 서툰 것이었다는 고백은 자신 역시 누군가로부터 고유한 영역을 침범당해 도망친 인간이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말하자면 나는 너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이지요.


영화의 말미에 진아는 엄마의 이름을 아버지로 바꿉니다. 아버지에게 말한 ‘딱 그렇게까지만 지내요’라는 말처럼 이른바 ‘상처를 주고받는 우리’가 아닌 ‘서로의 영역을 정한 혼자 사는 사람들’로 남겠다는 것이지요.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개인주의라는 건 공동체를 배신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개인주의란 개인을 상처입히지 않는 것이겠지요. 공동체가 무례와 다른 의미인 것처럼요.



2023년 1월 27일부터 2023년 1월 2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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