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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Feb 13. 2023

영화 이야기 <슬램덩크 더 퍼스트>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와 함께 캐릭터가 스케치되고 마침내 완성된 캐릭터는 종이 바깥으로 걸어나오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이야기에 대한 가장 절묘한 비유입니다. 모든 이야기는 종이에 쓰지만 결국은 현실로 걸어나오는 것이니까요. <슬랭덩크>는 1996년에 완결된 만화입니다. 무려 30년 전에 완성된 이야기가 오늘날에도 걸어나온다는 것은 이 이야기가 늙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좋은 이야기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불멸합니다. 그것은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항상 오늘의 이야기이며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인 동시에 나만 아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슬램덩크>에는 <슬램덩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수만큼의 입구가 있습니다. 그곳은 모두가 모여드는 광장이면서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혼자만의 방입니다.


<슬램덩크 더 퍼스트>는 원작의 마지막 경기인 북산과 산왕의 경기를 3D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영화입니다. 원작과 가장 큰 차이점은 서사의 중심이 송태섭이라는 점입니다. 원작에서 가장 스토리텔링이 부실했던 인물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부여함으로써 기존에 <슬랭덩크>를 알고 있는 사람들조차 이야기를 낯설게 만들었지요. 그러나 정말로 낯선 것은 송태섭의 이야기가 아니라 북산과 산왕의 경기입니다.


원작의 마지막 경기인 북산과 산왕의 경기는 전반적인 전개는 동일합니다. 하지만 세목은 부분적으로 바뀌거나 삭제되었고 원작과 동일한 부분도 중간중간에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 등 캐릭터의 서사가 삽입되어 흐름을 끊습니다. 원작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 기억하고 있는 원작과는 다릅니다. 만약 이 영화가 원작의 마지막 경기를 영상으로 재현하는데만 목적을 두었다면 절대 이렇게 했을 리가 없습니다. <슬램덩크 더 퍼스트>는 원작에 대한 기억을 모으고 집중시키는 대신 원작을 해체합니다. 그리고 갈라진 틈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은 바로 송태섭의 이야기이지요.


오히려 새롭게 등장한 송태섭의 이야기야말로 우리가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슬램덩크>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안의 기대주였던 형마저 사고로 죽은 뒤 죄책감을 가진 채 자라왔다는 송태섭의 이야기는 분명 이번 영화에서 처음 듣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말해주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생이 뒤틀려버린 자리에서 인간은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그것은 채치수부터 강백호에 이르기까지 원작에서 각각의 등장인물들이 보여준 이야기와 같습니다.


원작에서 채치수는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외로운 싸움을 하는 남자로 나옵니다. 선수층이 얇은 북산에서 전국제패는 사실상 불가능한 목표나 다름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렇게 말하지요. 1학년 때부터 전국 대회 출전권을 놓고 해남과 싸우는 장면을 매일 상상해 왔다고. 말하자면 채치수는 개인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꿈을 껴안아 버린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 꿈은 이제 자신과 분리할 수 없고 그로 인해 원래 꿈이었던 것은 스스로를 열등감에 빠뜨리지 않도록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적이 되었습니다. 


꿈이나 야망은 배와 같은 것이어서 미지의 대륙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바다라는 위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그렇지요. 언제나 상반된 힘이 작용하게 됩니다. 하물며 꿈은 자기 자신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세상으로 이동시켜 주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반대 급부도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혹시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공포와 언제쯤 도착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조바심.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드는 불안과 꿈을 이루지 못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괴감까지. 말하자면 꿈이라는 것은 나를 이끌어주는 친구인 동시에 가장 무서운 적이기도 한 셈이지요.


이런 면에서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고 끊임없이 되뇌는 채치수의 모습은 결국 꿈이라는 것은 투쟁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투쟁은 실력을 키우는 하드웨어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에서 계속 등장하는 사람들의 비웃음과 스스로의 초라함에 대한 한탄을 이겨내는 소프트웨어적인 면도 포함되는 것이지요. 요컨대 채치수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것은 자기가 만들어낸, 세상에서 가장 강한 적과 싸워야 하는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정대만은 중학시절 MVP로 실력과 의지를 모두 갖춘 선수였으나 우연한 사고로 농구를 할 수 없는 몸이 됩니다. 목표를 잃어버린 그는 불량배와 어울리고 운동을 그만두는 등 방황의 시기를 보내게 되지요. 심지어는 패싸움을 일으켜 농구부를 해체시킬 뻔하기도 합니다. 이후 너무나도 유명한 대사 “농구가 하고 싶어요”라는 말과 함께 상양전부터 복귀하게 되지만 2년간의 방황은 MVP까지 거머쥐었던 몸을 녹슬게 만들었고 그 후로도 계속 경기 후반이 되면 신체능력의 한계에 부딪히게 되지요.


정대만이라는 캐릭터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과거의 실패를 극복하고 최선을 다해 인생을 사는 태도를 보여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것은 복수극의 플롯이기도 합니다. <사기>의 오자서 열전부터 <몽테크리스토 백작> 등 수많은 복수극에서 주인공이 가장 먼저 죽이게 되는 인물은 다름 아닌 과거의 자기 자신입니다. 복수를 꿈꾼다는 것은 졌다는 것이고 졌다는 것은 과거의 자기 자신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기기 위해 가장 먼저 꺾어야 하는 상대는 바로 과거의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지요.


정대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체력의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자신이 보낸 헛된 시간을 한탄하면서도 끝내 스스로를 “포기를 모르는 남자”로 정의하는 것은 요컨대 그가 과거의 자신에게 발목이 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의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정대만에게 있어 최대의 적은 상양이나 해남 혹은 산왕이 아니라 바로 과거의 자기 자신인 셈이지요.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정대만을 좋아하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인생을 치열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과거의 자신을 극복하는 태도, 즉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만들려는 의지를 말합니다. 따라서 정대만 역시 채치수처럼 투쟁의 길에 있는 남자이며 그가 넘어서야 할 최강의 적은 바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강백호는 농구에 전혀 관심이 없는 초보자지만 채치수의 여동생인 채소연에게 반해 농구를 시작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기본적인 규칙도 몰라서 퇴장당하기 일쑤지만 타고난 신체능력과 승부욕을 바탕으로 점차 팀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가지요. 강백호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것은 무방비로 방치된 자연인이 건전한 동력에 의해 스스로의 삶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농구를 시작하기 전까지 강백호는 단순한 불량 학생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이 불량 학생은 그가 선택하거나 의도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사회의 탓이라거나 스스로의 책임이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단지 그가 반드시 불량 학생이 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살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삶이 인과관계의 누적이라고 한다면 강백호의 삶은 스스로 선택한 인과관계가 쌓인 필연의 산물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인과관계의 누적, 즉 우연의 산물인 셈입니다.


이것은 농구를 시작하는 과정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강백호가 농구를 시작하게 되는 것은 채치수의 여동생인 채소연을 좋아하기 때문이지요. 농구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채소연의 오빠가 유도를 하고 있었다면 유도를 했을 것이고 검도를 했다면 검도를 했을 테니까요. 또한 팀원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까지 놀라게 만드는 그의 신체능력 역시 훈련을 통해 체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타고난 자질에 가깝습니다. 요컨대 강백호가 농구를 시작하고 흥미를 붙이게 된 것은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과 같이 우연의 산물인 셈이지요.


이 우연이 “단호한 결의”로 바뀌게 되는 것이 강백호라는 인물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타고난 자질에 기대어 새로운 우연이 다가오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와 매번 마주함으로써 스스로를 계속해서 부수고 새롭게 만들어 가는 과정이지요. 화려한 한 번의 슬램덩크 대신 일 만번의 슛 연습이 즐거운 것임을 깨달아가는 강백호의 모습에는 시간에 자신을 내맡겨버린 인간이 스스로의 시간을 만들어나가는 인간으로 바뀌어가는 쇄신이 있습니다. 요컨대 우연이 지배하던 삶을 필연의 영역으로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필연이란 나를 둘러싼 앞과 뒤를 알게 된다는 것이며, 나를 둘러싼 앞과 뒤를 알 수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됩니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원작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중에 하나인 강백호가 채소연에게 경기 도중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고요.”라고 말하는 장면은 바로 이러한 스스로에 대한 앎에서 비롯하는 것이지요. 농구를 좋아하냐는 채소연의 물음에 강백호는 농구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단지 호감을 하기 위해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요컨대 강백호의 이 두 번째 대답은 먼저의 대답을 부정함으로써 우연에 방치되었던 과거의 자기 자신과의 단절을 암시하는 동시에 새로운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이 되는 것이지요.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는 것만큼 스스로에 대해 알게 되는 방법도 없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에 대해 알게 된다는 것은 곧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도 알게 되는 것이지요. 영광의 시간은 지금이라는 말은 자신의 시계를 알 수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니까요.


제목은 <슬램덩크>지만 마지막 경기를 결정지은 것은 덩크가 아닌 점프슛이었다는 점에서 삶을 결정짓는 것은 자질이나 재능 같은 우연의 영역이 아니라 고된 연습을 통해 몸에 익힌 필연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시작은 우연에서 출발하더라도 끝은 반드시 필연의 영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본다면 강백호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것은 결국 새로운 시간으로 진입하는 방법입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이유는 삶의 대부분을 우연이 잠식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시작이 우연일 수밖에 없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생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생을 필연의 영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 필연의 영역은 쌓인 것이 아니라 쌓은 것으로만 탐색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숱한 강자에게 당하는 패배와 패배 후에도 다시 도전하는 집념 그리고 집념을 단지 머릿속에서 끝내지 않는 부단한 연습 끝에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생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머쥐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부단히 자기 자신을 쇄신하는 과정에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송태섭의 이야기 역시 이들의 이야기와 같습니다. 송태섭이 마주한 최강의 적은 산왕입니다. 하지만 송태섭에게는 또 하나의 최강의 적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자기 때문에 형이 죽었다는 죄책감이지요. 자기를 놔두고 친구들과 낚시를 가는 형에게 송태섭은 두 번 다시 오지 말라고 악담을 합니다. 서운함에 무심코 한 이야기였지만 불행히도 형은 그날 바다에 빠져 돌아오지 못하고 맙니다. 말하자면 송태섭의 마음 속에서는 자기 때문에 형이 죽었다는 죄책감과 만약 누군가가 죽어야 했다면 그건 자신이었어야 했다는 열등감이 있는 것이지요.


산왕은 형이 최고의 농구 선수를 꿈꿀 때 항상 나타났던 최강의 적입니다. 송태섭은 산왕과 마주함으로써 항상 형보다 못한 자리에 있던 자신을 비로소 형과 대등한 자리에 올려두게 되지요. 그러나 형은 이미 죽었고 지금 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죄책감과 열등감입니다. 요컨대 송태섭은 산왕과의 경기에서 그간 늘 도망치기만 했던 자신의 죄책감과 열등감과 비로소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모든 싸움이란 결국 자신과의 싸움인 셈입니다. 채치수와 정대만, 강백호가 그랬듯 송태섭 역시 농구를 통해 스스로를 극복하는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이지요.


이 영화가 원작을 충실히 재현하는데 집중하지 않고 오히려 중간중간에 송태섭의 이야기를 삽입함으로써 원작을 흩어놓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산왕과의 경기가 내 앞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면 기억이란 내 뒤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경기 도중에 기억이 끊임없이 삽입된다는 것은 요컨대 싸우고 있는 것은 전방만이 아니라는 것이겠지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와도 싸워야 한다는 것. 반대로 말하면 과거와 싸우는 일이야말로 앞으로 나아가는 진정한 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모두 수정하고 싶은 과거가 있기 마련이고 그러한 과거에는 언제나 새로운 문을 열기 위한 열쇠가 숨겨져 있기 마련이니까요.


이 영화는 더 퍼스트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만약 북산과 산왕의 경기를 충실히 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면 여기서 퍼스트는 아마도 첫 애니메이션이라는 뜻이었겠지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 원작은 모여서 뚜렷해지는 대신 흩어져서 새로워집니다. 말하자면 더 퍼스트는 시작이라는 뜻이고 앞으로도 이렇게 원작을 재해석한 세컨드와 서드가 나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과거에 바치는 헌사가 아니라 새롭게 시작하는 출사입니다. 요컨대 <슬램덩크>는 다시 한 번 시작한다는 것이겠지요. 어쩌면 세컨드의 주인공은 서태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인기는 있어도 송태섭 못지 않게 이야기가 없었던 인물이니까요.


30년이 다 되어가는 과거의 이야기가 이제와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까. 저는 그 질문의 답을 극장에서 찾았습니다. 일부러 늦은 시간에 영화관을 찾았는데 예매할 때는 9명이었던 관객이 막상 상영이 시작할 때쯤 되니 거의 20명 가까이 되어 있더군요. 그런데 그 관객들의 대부분이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슬램덩크>가 연재하던 시절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아이들이 <슬램덩크>를 보면서 작은 목소리로 환호하고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저 아이들은 언젠가 자신의 아이들에게 <슬램덩크>에 대해 말해주겠지. 내가 너였을 때 좋아하던 이야기에 대해서. 내가 너였을 때 환호했던 것에 대해서.


좋은 이야기에는 시간을 넘나드는 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은 항상 열려 있지요. 어디에 있든 우리는 어디로든 갈 수 있습니다.



2023년 1월 29일부터 2023년 2월 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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