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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Feb 18. 2023

영화 이야기 <리스본행 야간열차>

라이문트(제레미 아이언스)는 고전문학을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출근길에 다리 위에서 자살을 시도하던 여자를 구해준 그는 여자의 옷에 있던 책을 읽은 뒤 그 책의 저자를 만나러 리스본으로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저자와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아가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를 발견하게 되지요. 여기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라이문트가 알아가는 저자의 이야기, 즉 아마데우(잭 휴스턴)의 이야기가 자신과 전혀 무관한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라이문트는 아마데우의 이야기에 매혹되어 리스본으로 떠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관심을 갖게 되는 이야기나 잊을 수 없는 이야기에는 내 영혼의 요구가 반영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예전에 영화 이야기 <마돈나>를 쓸 때 저는 이야기에는 통로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통로는 현재의 삶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 새로운 삶을 열어주는 통로이지요. 말하자면 어떤 이야기에 끌린다는 것은 그 이야기가 지금 내 영혼이 갈망하는 요구에 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라이문트가 느닷없이 리스본으로 향한 이유도 아마 그러한 요구를 느꼈기 때문이겠지요. 라이문트의 직업은 앞에 말한 것처럼 고전문학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수많은 책을 읽었고 학생들에게 책의 내용을 설명할 수 있는 이해도도 갖췄을 것입니다. 요컨대 그는 수많은 이야기에 둘러쌓여 있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본 적은 없습니다. 말하자면 이야기를 말해본 적은 많아도 이야기를 살아본 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데우의 이야기에 끌린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겠지요. 라이문트는 리스본에서 알게 된 안경사 마리아나(마르티나 게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았다고. 타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만 끊임없이 반복할 뿐 정작 자신의 이야기를 한 번도 만들어 보지 못한 라이문트에게 아마데우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는 분명 매혹적인 것이었을 것입니다.


다만 궁금한 것은 이런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마데우의 책에만 나오는 게 아닙니다. 라이문트는 고전문학 교사입니다. 고전문학은 세대를 뛰어넘고도 살아남은,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그 생명력이 강해져 불멸의 지위를 획득한 이야기들입니다. 요컨대 인생의 강렬함에 대해 말한다면 굳이 아마데우의 이야기에만 끌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라이문트를 태어나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리스본으로 떠나게 만든 아마데우의 이야기에만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데우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곳을 떠날 때 우리의 일부를 남긴다. 떠나더라도 그곳에 머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는 그곳에 돌아가야만 다시 찾을 수 있다. 어떤 곳에 갈 때 자신을 향한 여행이 시작된다. 그리고 자신을 알아간다. 그 여정이 얼마나 짦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곳을 떠날 때 함께 가져갈 수 없는 것은 과거의 나입니다. 만약 어디론가 떠날 때 과거의 나도 함께 데려갈 수 있다면 나쁜 기억으로 고통받을 이유도 없겠지요. 또한 무슨 문제가 생기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기만 하면 됩니다. 이곳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재의 나입니다. 과거의 나는 내가 머물렀던 곳에서 영원히 떠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데려가지 못하는 과거의 나를 끊임없이 뒤돌아보면서 아파하고 또 슬퍼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아마데우는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바로 과거의 나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내가 잃어버린 일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나라는 것은 정확히 말하면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맴도는 과거의 기억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과거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단지 어떤 과거만을 기억할 뿐입니다. 그리고 기억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과거의 나라는 것은 이른바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생긴 수많은 이야기 중에서 왜 어떤 이야기들만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저는 앞서 사라지지 않는 이야기라는 것은 영혼의 요구가 반영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요컨대 현재의 삶을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통로가 그 이야기 속에 있다는 것이지요. 이 말을 아마데우의 말에 적용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라지지 않는 과거의 이야기에는 우리가 수정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그것을 수정하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자기 자신을 회복하는 것이라고요.


사람마다 내면에 사라지지 않는 이야기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기쁜 일일수도 있지만 고통에 관한 것일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이 영화 안에서만 말한다면 그것은 죄책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마데우의 이야기, 즉 카네이션 혁명과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모두 제각각이지만 단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누군가에 대한 미안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데우가 가진 죄책감은 독재 권력에 편승한 아버지 밑에서 호의호식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리스본의 도살자라고 불렸던 비밀경찰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에서 기인합니다. 스테파니아는 연인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고 조지는 연인을 빼앗겼다는 분노에 휩싸여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와 연인을 쏘려고 했다는 죄책감을, 주앙은 그런 조지에게 총을 빌려줬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책감이라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자각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내가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타인의 삶이 고통받았다고 생각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이 죄책감이지요.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잘못을 하면 사과를 해야 한다는 것을. 사과를 해서 죄책감을 덜어내는 것은 비유하자면 내 몸에 난 종기를 없애는 일과 같습니다. 누가 봐도 잘못된 것을 얼른 잘라내서 깨끗한 새 살이 돋도록 해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어떤 잘못은 그렇게 쉽게 사과하고 죄책감을 잘라내 버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결코 잘라버릴 수 없는 자기 자신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데우가 리스본의 도살자를 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의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아마데우가 권력의 편을 들었다고 비난하지만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리스본의 도살자를 죽이려고 했던 이유는 그가 경찰이라는 직업상의 윤리를 어기고 권력에 기생해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거울의 양면입니다. 만약 아마데우가 시민이 원한다는 이유로 리스본의 도살자가 죽도록 방치했다면 그것 또한 다수 대중이라는 힘에 근거해 직업상의 윤리를 어긴 것이 됩니다. 요컨대 아마데우가 리스본의 도살자를 살린 것은 그의 편이어서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그와 다른 편이기 때문인 것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수한 시민을 고문하고 죽인 악인의 목숨을 구했다는 죄책감은 아마데우의 가슴 속 깊이 파고듭니다. 구제할 수 없는 악인을 살린 것은 분명 잘못이기도 하지만 그 잘못에는 결코 함께 떼어내 버릴 수 없는 의사로서의 양심, 즉 자기 자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죄책감은 사과할 수도 잊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아마데우가 저항 운동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죄책감을 보상하기 위해서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사라지지 않는 이야기를 외면하지 않고 그 속에 있는 통로를 찾아 뛰어든 것입니다.


스테파니아는 조지의 연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조지에 대한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 의존이었음을 깨닫고 아마데우를 사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자기를 탈출시켜준 아마데우마저 그녀는 버리고 떠나게 되지요. 말하자면 그녀는 자신을 사랑해준 남자들을 생존을 위해 이용하고 버렸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조지는 연인이자 혁명의 동지로 그녀를 원했고 아마데우는 연인이자 이상향을 공유할 상대로 그녀를 원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라는 스테파니아의 특별한 재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의자할 곳이 없어서 자신을 지켜줄 남자로 조지를 만나고 아무런 조건 없이 순수한 사랑을 느껴 아마데우에게 향했던 것처럼 어쩌면 스테파니아가 가장 원했던 것은 바로 평범한 삶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가까운 것입니다. 요컨대 정부에서도 저항 운동에서도 주목한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는 그 누구보다도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던 여자'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자기를 탈출시켜 준 아마데우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였겠지요. 아마데우와 함께 가는 삶. 아마존과 세계의 오지를 떠돌아다니며 자신들만이 이해하는 언어를 만드는 삶은 스테파니아가 스스로를 버려야만 가능한 삶입니다. 아마데우가 원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봐도 스테피아나가 원한 평범한 삶과는 다른 것이니까요. 요컨대 스테파니아가 느끼는 죄책감이란 누군가가 자기 자신을 사랑해주는 일이 곧 그녀가 말한 것처럼 자신이 줄 수 없는 것만을 원하는 일이 되어버리는 것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일이란 자기 자신을 새롭게 하는 것이고 자기 자신을 새롭게 하는 일은 생명력에 다름 아닙니다. 하지만 스테파니아에게 있어 사랑하는 일이란 곧 자기 자신을 버려야만 하는 일이었던 것이지요.


그 누구보다 자신을 이해하고 격려해준 친구에게 총구를 들이대야만 했던 조지의 죄책감과 이제껏 사력을 다해 함께 해온 동료를 죽이는데 손을 빌려준 주앙의 죄책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는 하나 같이 버릴 수 없는 자기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지요. 죄책감을 잘라내는 것은 말하자면 온전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죄책감을 잘라내는 일이 곧 자기 자신을 잘라내는 일이 되어버린다면 거기에는 어떤 구원도 찾을 수 없게 되고 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는 죄책감이라는 것은 영혼을 멍들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은 죄책감을 씻지 못하는 일이 되고, 죄책감을 씻는 일은 자기 자신을 버리는 일이 됩니다. 이 딜레마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이야기로 남아 있습니다. 라이문트가 만난 사람들, 주앙과 조지 그리고 스테파니아가 말 그대로 강렬한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표정에 자부심 대신 회한이 서려 있는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이겠지요.


아마데우는 자신의 묘비명에 독재가 현실일 때 혁명은 의무라고 썼습니다. 이 말은 독재라는 이야기 속에서 신음할 때 이 현실을 벗어나 새로운 현실로 이동할 수 있는 이야기는 혁명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리고 이 혁명의 이야기를 위해 주앙도 조지도 스테파니아도 모였고 그들은 마침내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말한다면 혁명이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이 원하던 현실을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목숨을 건 뜨거운 생을 살았음에도 남은 것은 그때의 동지들과 거리를 두면서 후회와 그리움에 젖은 표정뿐이지요.


말하자면 일생에 혁명도 크나큰 사건도 없이 오직 책에만 파묻혀서 살아온 라이문트나 혁명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운 주앙들이나 종류는 다를 지언정 회한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은 같다는 것입니다. 한 편이 아무런 죄책감도 없는 삶이라면 한 편은 온통 죄책감으로 일그러진 삶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은 과거의 나이거나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한 과거의 나이거나 양쪽 모두 수정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같습니다. 어쩌면 라이문트가 아마데우의 책에 끌린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허무주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마데우는 앞서 인용한 이야기처럼 현재의 자기 자신을 바꾸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의 자기 자신을 수정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요컨대 혁명이 의무인 것처럼 자기 자신을 쇄신하는 일 역시 의무인 것입니다. 허무주의에 대해 말한다면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없죠. 하지만 과거를 바꾸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누구도 시간을 역행할 수는 없습니다. 라이문트가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것도 아마데우가 부활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과거를 바꾸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가능한 것은 오직 과거를 다르게 이야기하는 것뿐입니다.


라이문트가 주앙과 조지, 스테파니아와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은 묻고 대답한다는 점에서 인터뷰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그것보다는 고백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 고백은 자신의 과오와 죄책감을 고백한다는 점에서 가톨릭의 고해성사와 같습니다.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신부에게 죄를 지은 사람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처럼 아무런 죄책감을 갖고 있지 않은 라이문트에게 주앙들은 자신들의 죄책감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책감이 내면의 후회와 고통, 부끄러움을 겨냥하고 있다면 죄책감의 고백은 용서와 화해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말하자면 죄를 지은 자가 신부에게 죄를 고백하고 죄책감에서 풀려나듯이 주앙과 조지 그리고 스테파니아는 라이문트에게 자신의 죄책감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항상 눈을 뗄 수 없었던 내면의 고통으로부터 눈을 돌려 용서와 화해를 응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구원은 이야기 그 자체가 아니라 이야기하기에 있다. 그리고 사람들 속에 갇혀 있던 사라지지 않는 이야기는 바로 그것을 이야기함으로써 줄곧 자기 자신을 향해 파고들었던 방향을 바꾸어 자기 바깥으로 사라진다.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라이문트가 가장 위무를 받았던 말. “당신, 재미없지 않아요.”라는 마리아나의 말에서도 그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재미없지 않다는 건 이야기를 해보라는 뜻이니까요. 그리고 이야기를 해보라는 건 여기 당신의 자리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죄책감이 세상에 네 자리는 없다고 말해주는 것과 완전히 반대이지요. 리스본에서 라이문트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고전문학이든 혹은 주앙들이든 이야기를 들어주는 입장에서 이제 이야기를 하는 입장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당신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말한 마리아나 덕분이지요.


라이문트의 리스본 여정은 다리 위에서 자살을 시도하던 한 여자를 구하는데서 시작합니다. 그 여자는 리스본의 도살자의 손녀로 아마데우의 책을 읽고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죠. 요컨대 이 영화는 죄책감에 관한 영화입니다. 저는 저를 비롯해 누구나 마음 속에 사라지지 않는 과거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야기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똑같은 목소리로 우리에게 수정을 요구하지요. 말하자면 우리는 누구나 긴 밤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야간열차를 타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모든 밤은 반드시 끝나고 언젠가는 아침이 찾아올 겁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곳에서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누군가를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요. 다만 분명한 것은 라이문트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열차가 그를 리스본으로 데려다줬기 때문이 아니라 라이문트 스스로 누군가의 이야기를 알기 위해 리스본을 열심히 걸었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요컨대 시간이든 무엇이든 저절로 도착지에 내려주는 법은 없다는 것.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걸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 이런 말을 듣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당신, 재미없지 않아요.”



2023년 2월 3일부터 2023년 2월 1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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