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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Feb 19. 2023

영화 이야기 <퍼시픽 림>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를 보다 보면 그의 영감의 원천은 동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판의 미로 : 오필리어와 세 개의 열쇠>는 추방 당한 공주의 이야기이고, <세이프 오브 워터>는 인어와의 사랑 이야기였지요. <퍼시픽 림>은 거인의 이야기입니다. 동화 속에서 거인은 크게 두 종류로 등장합니다. 하나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강대한 적, 다른 하나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을 넘도록 도와주는 조력자지요. <퍼시픽 림>에 등장하는 거인 역시 이와 같습니다.


심해에 이계와의 통로가 열리면서 카이주라고 불리는 거대 괴수가 등장합니다. 인류는 초국가적 연합을 결성해 예거라는 거대 로봇을 만들어 카이주와 싸우게 되지요. 예거 파일럿 롤리(찰리 허냄)은 카이주와의 전투에서 형을 잃고 방황하다가 최후의 예거 프로젝트에 복귀해서 마침내 이계와의 통로를 파괴하고 인류를 카이주의 공포에서 해방시킵니다.


카이주는 우주가 아니라 심해에서 나타납니다. 이른바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거대한 적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솟아난다는 것입니다. 네 안에 있는 거인을 깨우라고 말할 때 그 거인은 가능성의 다른 이름이지만 사람의 마음 속에는 잠자는 거인만이 아니라 항상 깨어서 활동하고 있는 거인도 있습니다. 그것은 걱정과 불안, 두려움과 긴장, 혐오와 공포로 뒤덮여 있고 우리가 앞으로 나가는 것을 막으며 늘 주춤거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른바 니체가 심연이라고 부른 거인이지요.


니체는 네가 심연을 쳐다볼 때 심연도 너를 쳐다본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대개 심연과 눈을 마주치는 것을 피합니다. 걱정하는 것이나 두려워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사람이 온 힘을 다해 갈망하는 것, 말하자면 구원의 빛은 아이러니하게 항상 심연 속에 아른거립니다. 요컨대 구원을 향해 다가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심연과 마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주서서 심연을 쳐다보고 반대로 나를 쳐다보는 심연의 눈동자를 견뎌야 합니다.


심연의 눈동자는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눈입니다. 그것은 공포를 깨우고 절망을 부르며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목을 조여옵니다. 구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심연의 눈을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그 속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천사의 손이 아니라 짐승의 앞발입니다. 이 앞발은 내 속으로 파고들어와 나의 소중한 것과 내가 이제까지 지켜온 것들을 온통 할퀴고 흔들어 놓습니다. 이 때 내 속에서 깨어나는 것은 위대한 가능성이 아니라 내가 그토록 외면하고 싶었던 내 안의 가장 추악한 성질들입니다. 


더러움을 가장 쉽게 견디는 방법은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공포에 적응하는 가장 쉬운 방법도 공포에 동화되는 것입니다. 나보다 강한 누군가의 폭력에 맞서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는 일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나보다 약한 자를 똑같이 폭력으로 대하는 일은 쉽습니다. 내 안의 추악한 성질과 마주할 때 그것을 견디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거기에 동화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무서운 일은 피해버리고 부끄러운 일은 잊어버리며 힘든 일은 도망치고 어려운 일은 남에게 넘겨버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다 그래.


원래 그런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 심연 속에 있는 구원을 빛을 찾았지만 심연의 눈동자를 견뎌내지 못하면 오히려 그 누구보다 더 그런 인간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니체는 괴물과 싸울 때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지요. 요컨대 내가 심연을 쳐다볼 때 심연이 내 속에 있는 나의 어둠을 흔들어 깨울 것이며, 이 때 이 어둠에 잠식당하면 심연 속에 있었던 빛을 잃어버리고 되려 심연에 잡아먹히고 만다는 것입니다. 


<퍼시픽 림>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카이주와 싸우기 위해 출격하는 롤리의 모습은 꼭 스포츠 경기에 나가는 흥분된 선수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그는 이 싸움이 본인과 형의 안위는 물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전쟁이라는 것을 잊고 단지 극도의 아드레날린을 방출하는 짜릿한 경기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거는 인류를 지키기 위해 만든 로봇입니다. 같은 말이라도 인류를 지키는 일과 카이주와 싸우는 일은 다릅니다. 괴물과 싸우기 위해 괴물을 만들었다는 대사처럼 영화의 첫 장면에서 사람이 탄 선박을 가운데에 두고 대치한 카이주와 예거의 모습은 괴물과 인간의 싸움이 아니라 단지 피아가 구분된 괴물 간의 싸움처럼 보입니다. 오히려 인간은 그 사이에서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을 뿐입니다.


카이주가 그 자체로 괴물이라는 뜻이라면 예거는 사냥꾼입니다. 그런데 사냥꾼은 괴물을 사냥할 때는 인간이지만 인간을 사냥하게 되면 괴물이 됩니다. 카이주가 심연의 상징이라면 예거는 심연과 맞서 싸우기 위해 심연만큼 커진 인간의 모습입니다. 심연을 사냥하기 위해 칼을 빼들었지만 인간을 지킨다는 의식 없이 오직 전투가 목적이 되어버리고 나면 그 칼로 찌른 것은 괴물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입니다. 오만과 흥분, 전투의 격정에 도취된 아드레날린 중독자는 요컨대 인간을 상실한 괴물과 같은 것이지요. 사실상 파괴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카이주가 부수는 것이나 예거가 부수는 것이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입니다.


예거는 어떻게 생각하면 <알라딘>의 지니와 비슷합니다. 알라딘은 지니의 도움으로 왕자가 되어 신분을 상승시키는데 성공합니다. 요컨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와 싸울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지요. 하지만 이 지니는 자파의 손에 넘어가자 세상을 파괴하는 괴물이 되고 맙니다. 예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길 수 없는 상대와 싸움으로써 인간을 지키는 것이 목적인 도구이지만 그 거대함과 존재감에 취해버리고 나면 그 속에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단지 방향만 다를 뿐 맹목적으로 무언가를 파괴하기 위해 만들어진 카이주와 다를 바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롤리가 형을 잃고 긴 시간을 방황한 뒤에 돌아와 다시 카이주와 싸우는 여정은 괴물이 되어 심연에게 패배한 남자가 다시 인간이 되어 심연에 도전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전투에 도취되어 형을 잃었고 무언가를 지켜내는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하지만 마코(키쿠치 린코)와 팀을 이루면서 다시 소중한 것을 만드는 능력을 되찾았고 마침내 그것을 지켜냅니다. 요컨대 이것은 심연과 싸우는 방법에 이야기이며, 심연과 싸우는 방법이란 바로 진정한 승리는 상대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것을 지켜낼 줄 아는 것임을 깨닫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심연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심연보다 더 짙은 어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심연 속에서 뻗어나온 짐승의 앞발이 아무리 마음 속을 헤집어도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지켜내는 일이라는 것이지요. 영화의 말미에 카이주도 예거도 모두 파괴된 자리에 오직 인간만이 남아 서로를 부둥켜안는 모습은 결국 최후의 자리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해줍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거인의 이야기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인간의 이야기라는 것이지요. 규모에 대한 찬가로 시작해서 규모의 무의미로 끝나는 결말은 어쩐지 동화가 주는 교훈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으로 이 영화의 이름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목은 태평양이고 카이주는 일본어 그리고 예거는 독일어입니다. 태평양과 일본 그리고 독일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세계 2차 대전입니다. 일본과 독일은 2차 세계 대전의 전범국이고 태평양 전쟁은 2차 세계 대전 중 가장 많은 피해를 일으킨 전쟁입니다. 그렇다면 같은 전범국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카이주(괴물)로 표기된 반면 독일은 왜 예거(사냥꾼)으로 표기되었을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치 독일의 패망 후 새롭게 일어선 독일은 본인들이 일으킨 전쟁 범죄에 대해 사과했습니다. 말하자면 괴물에서 인간으로 돌아오는 긴 여정을 치른 셈이지요. 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고 위안부 문제를 외면하는 등 세계를 검게 물들였던 그 바다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일본의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역사에 한해서는 그들은 여전히 카이주로 남아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말은 인간이란 바로 역사적 인간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요컨대 인간이란 단독자가 아니라 그 하나하나가 마치 DNA와 같이 인류의 역사를 새기고 있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인간의 역사란 어둠과 싸우기 위해 불을 피웠던 원시 인류부터 현생 인류에 이르기까지 모두 심연과 싸워온 투쟁의 역사인지 모릅니다. 그 역사 속에는 심연과 싸운 무수한 사례가 있습니다. 이긴 자의 기록도 있고 패배한 자의 기록도 있지요. 우리는 역사를 기억함으로써 바로 심연과 싸우는 방법을 배워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하면 역사를 잊는 순간 심연에 잡아먹힐지도 모른다는 것. 괴물을 겨눈 무기가 다시 인간을 향할 지도 모른다는 것이지요.



2023년 2월 13일부터 2023년 2월 1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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