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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Mar 03. 2023

영화 이야기 <아바타 2>

이 영화는 제가 처음으로 본 3D 영화입니다. 아이맥스나 4D 상영관도 있는 걸 생각하면 꽤 늦은 편이지요. 극장을 자주 가는 편이 아니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사실 2D나 3D나 내용을 이해하는데는 차이가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물론 이야기는 이야기의 양식에 따라 달라집니다. 가령 <아바타 2>를 영화로 보는 것과 책으로 읽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지요. 하지만 2D나 3D는 영상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본다면 오락의 체험을 얼마나 극대화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지 이야기에는 영향을 끼칠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바타 2>도 원래는 집에서 볼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런 영화는 대형 스크린에서 눈치 볼 필요 없는 사운드로 봐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더군요. <탑건 : 매버릭>을 집에서 봤는데 만약 영화관에서 봤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거든요. 마침 집 가까운 극장에서 마지막 3D 상영이 어제였습니다. 영화도 보고 3D 체험도 하고 극장에서 파는 콜라도 마시고 하면 나쁘지 않을 것 같더군요. 저는 영화를 볼 때 약간은 일을 한다는 기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보고 나면 써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3D 영화를 보러 간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놀러간다는 기분이 들어서 즐거웠습니다. 넷플릭스 등 영화를 볼 수 있는 수많은 플랫폼이 있지만 그래도 영화관이 있어야 하는 이유를 대라면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관에 설렘이 있습니다. OTT에는 그런 건 없죠.


안경을 끼고 있기 때문에 3D 안경을 끼면 불편할 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했는데 막상 써보니 금방 적응됐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해서 중간 중간에 벗었다 썼다 해보았는데 쓰고 있을 때는 전혀 위화감이 없던 화면이 벗었을 때는 마치 두 개의 화면을 겹친 것처럼 초점이 맞지 않더군요. 아무튼 신기했습니다. 멀리서 영화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아이맥스나 4D, 돌비 서라운드, 스크린X 같은 기술들은 아마도 앞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게 해줄 지도 모릅니다. 요컨대 영화는 보는 것에서 체험하는 것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너무 늦은 깨달음인지 모르지만 <아바타 2>를 보면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그런 것입니다.


보는 것과 체험하는 것의 차이는 거리의 차이입니다. 보는 것은 대상과의 거리가 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체험하는 것은 대상과의 거리가 가깝거나 없습니다. 대상과의 거리가 사라질 때 그것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 됩니다. 가족이나 정말 친한 친구의 일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요. 영화에 한정지어 말한다면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과 자신 사이의 거리가 제로가 되면 발생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개인의 특성이 영화가 제시하는 방향과 충돌하는 경우입니다. <아바타 2>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바다에 관한 이야기인데 사실 저는 바닷속을 꽤 무서워하는 편입니다. 수영이나 해안가에서 즐기는 레저는 좋아하지만 깊은 바닷속으로 내려가는 다이빙이나 스킨스쿠버 같은 것은 도저히 못하지요. 그런데 <아바타 2>에 나오는 것은 거의 대부분이 그런 것입니다. 깊은 바다에 사는 다양한 해양 생물부터 크기를 잴 수 없는 거대한 심해어까지. 설리 가족이 물의 종족으로 살기 위해 적응해 가는 장면에서 영화의 목적은 아마도 발리나 기타 해양 휴양지에서 제공하는 아쿠아 레저의 가상 체험이었을 것입니다. 설리 가족이 즐거워하는 모습만 봐도 그것을 알 수 있지요.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 말한다면 얼른 물 밖으로 나갔으면 싶었습니다. 게다가 3D로 보고 있자니 어느 정도는 물 속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까지 들어서 약간의 답답함도 느꼈지요. 그래도 이 정도는 그 후에 등장하는 파야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로아크(브리튼 달튼)이 위기에 처했을 때 갑자기 나타난 파야칸을 보는 순간 정말 몸이 얼어붙는 줄 알았습니다. 마치 바다 위에서 튜브에 떠 있는데 등 뒤에서 흰수염고래가 솟구친 기분이었다고 할까요. 파야칸과 친구가 되어가는 로아크를 보면서 계속 생각했던 것은 이런 것입니다. 어떻게 저게 즐거울 수 있을까. 정말 조금의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는 건가.


요컨대 영화의 의도와 제 개인의 체험이 완전히 엇갈렸다는 거지요. 보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설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닷속에서 즐겁게 노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면 그것을 본 사람들은 바닷속에서 노는 일은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과 같지요. 하지만 체험하는 것은 느끼는 일이어서 거기에는 개인의 특성이 고스란히 적용됩니다. 가령 로아크나 키리(시고니 위버)는 바닷속이 즐거울지 몰라도 저는 정말 아니거든요. 말하자면 개인적 특성이 등장인물에 대한 이입을 가로막는 요소로 작용하는 셈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것과 완전히 반대인데 바로 영화가 의도하는 목적에 완전히 사로잡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언가를 판단하는 것은 대상과의 거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거리가 멀수록 객관적인 판단을 하게 되고 가까울수록 주관적인 판단을 하게 되지요. 그런데 거리가 없다면 영화가 의도하는 방향성에 거의 무방비 상태가 되고 맙니다. 가령 <아바타 1>을 2D로 볼 때 제국주의나 인종차별 같은 메시지를 느끼기는 했어도 인간에 대한 증오 같은 것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3D로 본 <아바타 2>에서 툴쿤 사냥꾼은 정말 싫다거나 부도덕하다거나 하는 차원을 넘어 얼른 물어뜯어버렸으면 싶더군요. 네테이얌(제이미 플래터스)이 죽을 때는 정말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것 같아서 눈물이 났습니다. 저 영화관에서는 잘 안 우는데 말이죠. 그런데 이 툴쿤 사냥꾼에 대한 적의나 네테이얌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관객이 저절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영화가 명백히 의도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체험하는 상상 속에서는 영화가 지시하는 방향에 쉽게 저항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툴쿤 사냥꾼을 변호할 여지가 있다거나 네테이얌의 죽음이 애도할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단지 이야기가 얼마나 합리적이고 타당한가를 떠나 사람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 줄어드는 것은 경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주제의식이 뚜렷하다 못해 노골적인 만큼 <아바타 2>의 캐릭터들은 거의 다 닫혀 있습니다. 말하자면 제이크 설리(샘 워싱톤)는 보수적인 아버지로, 네테이얌은 희생정신과 책임감을 가진 맏이, 로아크는 모험심과 독립심을 가진 둘째로 나오는 식이지요. 다만 한 캐릭터는 이상할 정도로 열려 있습니다. 그건 바로 시고니 위버가 연기한 키리입니다. 키리는 그레이스 박사(시고니 위버)가 아바타에 접속해 있을 때 임신하여 낳은 아이로, 네테이얌이나 로아크처럼 판도라 행성에서는 소위 혼혈 혹은 이종으로 취급받는 존재입니다.


특이한 점은 그녀의 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정통 나비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판도라 행성에서 ‘위대한 어머니’ 혹은 ‘대지의 여신’으로 불리는 에이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녀는 뿌리를 알 수 없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뿌리와 연결되어 있는 셈이지요. 스파이더(잭 챔피언)과의 특별한 유대감과 타종족으로부터 받는 멸시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고뇌라면 에이와의 목소리를 듣고 세계수에 다가가는 모습은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대한 물음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과 같습니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곧 자신이 속해 있는 곳과 자신이 맞지 않는다는 이질감에서 기인하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판도라를 침략한 인간들이 판도라에서 태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반대로 키리는 자신이 태어난 땅에서도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은 알베르 까뮈가 동명의 소설에서 보여준 것과 같이 그 누구의 시선 이전에 스스로를 타인으로 여기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키리는 로아크가 자신의 생각을 옳다고 믿고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주관대로 행동하는 것과 반대로 무엇이 옳은지 그리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녀의 태도는 자신이 인간도 나비족도 아니며 심지어 부모조차 모른다는 근원의 상실감에 연유합니다. 비유하자면 그녀는 발 딛을 땅이 없는 것입니다. 건강한 힘으로 서서 하늘을 향해 박차고 뛰어오를 대지가 그녀에게는 없습니다. 나의 행동과 나의 생각이라는 것은 나의 존재의 당위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면 남들도 믿어주지 않는 것처럼 존재의 당위성이라는 대지가 없는 키리는 말하자면 발 디딜 곳 없이 부유하는 자아인 셈이지요.


난생 처음 들어가는 깊은 물 속에서 오히려 숲에 살 때보다 더 편안함과 친숙함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이런 부유하는 자아에 대한 비유인지도 모릅니다. 물 속에 있는 모든 것은 부유하고 있으니까요. 땅과 달리 물 속에는 단단한 것도 없고 고정된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생명은 대지가 아니라 물로부터 흘러나오지요. 키리가 에이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러한 부유하는 자아야말로 어쩌면 생명의 원초적인 형태로서 자연에 가장 가까운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로아크보다 키리가 훨씬 더 많습니다. 확고한 신념과 저돌적인 태도 그리고 신념과 일치하는 행동력을 가진 사람도 물론 있습니다만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늘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약간의 회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컨대 어찌어찌해서 여기까지는 왔지만 꼭 처음부터 여기에 올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자기가 어떻게 해서 여기에 왔는지 그리고 여기가 정확하게 어디인지 모르는 이 무지야말로 어쩌면 생명의 속성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생각에 의하면 키리가 스스로를 정의하는 이방인은 근원과 현재 사이에 일관성을 만들어내려는 일종의 강박에 의한 것입니다. 즉 부자연스러운 것은 오히려 그쪽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생이라는 것은 말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분명히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아도 이야기를 하다보면 어느새 전혀 다른 말을 하다가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지요. 하지만 그러한 무방향성이야말로 말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은 자아의 요구이고 생각나는대로 하는 말은 바로 자아가 자유로울 때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일관성 있는 말이야말로 가장 부자연스러운 상황에서만 발화되는 것입니다. 친구에게 하는 잡담과 정치 연설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쉽게 드러나지요.


따라서 키리라는 캐릭터가 보여주는 것은 생을 인위적으로 재편하려는 문화적 강박과 본질대로 부유하는 자아 사이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1편부터 이어진 <아바타> 시리즈의 메인 테마이자 인간이 살아가면서 만드는 모든 이야기의 원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생이란 생명이라는 자연과 문명이라는 강박 사이에 벌어진 전쟁터이니까요. 70세가 넘은 시고니 위버가 10대 소녀를 연기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전쟁의 고뇌가 10대에서부터 70대까지 공유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출중한 개인 기량 덕분이기도 합니다만.


<아바타>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비용을 투입해서 만든 영화 중 하나일 것입니다. 1편이 그랬고 2편도 그랬으며 앞으로도 그렇겠지요.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배를 만들어 놓고 사랑을 이야기했던 것처럼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과학기술을 사용해 자연을 이야기하는 제임스 카메론의 화술에는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총동원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3편은 아이맥스로 보고 싶습니다. 내년이 기다려지는군요.



2023년 2월 18일부터 2023년 2월 19일까지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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