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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Mar 05. 2023

영화 이야기 <여행자>

저는 여행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입니다. 다만 여행에 관한 말은 좋아합니다. 여행에 관한 말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인도의 작가 아니타 데사이가 한 말입니다. “어디를 가든 그곳은 당신의 일부가 될 것이다”라고 했지요. 이 말은 여행이 사람의 외연을 확장하는 동시에 내연의 깊이를 더해준다는 말입니다. 내가 새롭게 본 것은 새로운 내가 되고, 원래의 나와 새로운 나는 길항하면서 내 안에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놓습니다. 이해할 수 없지만 잊을 수 없는 이야기. 거기에는 언제나 내 안에 잠겨진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이제까지 한 번도 여행지에서 새로운 나를 만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디를 가도 저는 늘 같습니다. 이곳에서 한 생각은 저곳으로 가도 사라지지 않고 이곳에서 했던 습관은 저곳에서도 여전히 습관으로 살아 있습니다. 요컨대 제게 여행이란 장소만 바뀔 뿐 제 자신의 변화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단지 장소만 바뀔 뿐이라면 굳이 많은 비용을 써가며 여행을 할 필요가 없겠지요.


다만 이것이 순전히 제 탓인가 하는 질문에는 순순히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낯선 곳에서 낯선 나와 조우하는 경험은 지금도 선망하는 것이지만 과연 여행이 정말 낯선 것일까요. 요즘 여행을 하면 인터넷으로 미리 모든 정보를 확인해 봅니다. 가볼 만한 곳, 먹을 만한 것, 해볼 만한 것들을 찾아서 일정을 짜고 나면 막상 거기에 도착해도 낯선 것이라고는 없습니다. 모두 이미 봤던 것이고 머릿속에서 이미 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계획했던 것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견하는 것은 계획을 입안한 단단한 나입니다.


아무런 계획 없이 여행을 가본 적도 있습니다. 대학생 때였는데 별다른 이유 없이 순천행 열차를 타고 새벽에 내려갔습니다. 목적지는 선암사였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선암사>라는 시에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중략)…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울고 싶은 일이 있었나 봅니다. 당시는 스마트폰이 없을 때여서 낯선 곳을 찾아가는 방법은 미리 갈 길을 외워두거나 택시를 타거나 만나는 사람마다 길을 묻거나 셋 중 하나였습니다.


택시 탈 돈은 없고 머리가 좋지 않아서 외웠던 길은 순천역에 내리자마자 까먹어 버렸고 그래서 결국 보는 사람마다 길을 물을 수밖에 없었는데 원래는 선암사로 가는 버스 정류장을 찾으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나는 사람마다 다들 걸어서 얼마 안 걸린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낯선 곳에서 낯선 나를 만나려면 좀 특별한 경험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미심쩍으면서도 결국 걷기 시작했습니다. 중간에 소나기가 심하게 왔는데 국도를 따라 걷고 있었기 때문에 비를 피할 곳도 없었습니다. 결국 새벽 기차를 타고 초췌해진 모습에 비까지 맞아 처량한 꼴로 하염없이 걸어야만 했지요. 뭐, 낯설다면 낯설다고 할 수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강 4시간 정도 걸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검색해 보니 약 25 km 정도로 나오는군요. 4시간에서 5시간 정도 걸렸지 싶습니다. 여름이라서 다행히 옷은 금방 말랐는데 또 그늘이 없어서 뜨거운 햇볕에 계속 노출되어 있다보니 무척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절이 산에 있다보니 가는 길은 죄다 오르막이었고 보이는 거라고는 밭이나 산등성이 밖에 없었어요. 그래도 이 고생을 하면서 도착하면 뭐라도 있지 않을까. 몸이 힘들면 서러워서 더 쉽게 눈물이 나오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꼭 울고 와야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시원하게 울고 나면 속이 후련할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말하면 정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라서 사람은 많고 초행이라서 해우소가 어디인지 찾는데도 한참 걸렸습니다. 게다가 막상 해우소 앞에 서니까 등굽은 소나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또 사람들이 끊임없이 돌아다니는데 화장실 앞에서 울면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할까 싶기도 하고 뭐랄까 시인이 말해준 것과는 다르게 여기가 쉽게 울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는 것만 오히려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무것도 못해보고 다시 돌아와야 했지요.


여름이라도 선암사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5시 내외였습니다. 둘러보고 해우소도 찾고 하니까 금세 6시를 넘어버렸지요. 산이라서 해가 빨리 지니까 금방 어둑어둑해졌던 것 같습니다. 절에서 자고 갈 수도 있다고 말해준 스님도 있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나진 않습니다. 다만 얼른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원래는 숙소를 잡아서 저녁에 술도 한 잔 하고 다음 날 구경할 만한 곳이 있으면 들렀다가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하루종일 고생한 탓인지 한시라도 빨리 집에 가서 눕고 싶은 마음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버스를 타고 순천역으로 되돌아와 가장 빠른 기차를 타고 올라왔지요.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여행이라는 생각보다는 고생했다는 기분밖에 들지 않습니다.


한 번의 경험을 가지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성급한 일입니다. 다만 그것이 인상으로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여러 번 어딜 다녀온 적이 있는데 이 인상을 바꿔줄 새로운 풍경을 목격한 적은 없습니다. 말하자면 계획을 하든 하지 않든 여행이 일상을 초월하는 일상으로 저를 안내한 적은 없는 것이지요. 그때 일을 소재로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까 분명 제 일부가 된 것은 맞긴 합니다만.


다만 짧은 경험에 근거해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장소에 도착하는 일은 계획과 무관하게 어렵다는 것. 사전 정보를 모두 파악해도 그렇고 아무 정보 없이 출발해도 그 장소에 닿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가령 선암사의 예를 든다면 저는 그 후에도 두 번인가 선암사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두 번 다 계획을 세우고 갔고 그때는 스마트폰도 자동차도 있어서 고생하진 않았지요. 다만 그 두 번 다 해우소 앞에서 운 적은 없습니다. 말하자면 고생고생해서 닿거나 준비해서 닿거나 어느 쪽이든 제가 도착하고 싶었던 ‘속이 후련하게 울 수 있는 장소’에는 도착하지 못했던 셈입니다.


여행이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은 내가 원하는 도착지가 어딘지 알려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곳도 가보고 저곳도 가보면서 내가 살고 싶은 장소에 대해 알게 되고 내가 먹고 싶은 음식도,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내가 온전히 담기고 싶은 문화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모든 여행은 결국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소에 한정해서 말하지 않는다면 나이를 먹어가는 것과 새로운 일을 구하는 것,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과 경험을 쌓아가는 것도 여행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다양한 장소와 여러 개의 시간을 거치면서 사람은 변하게 됩니다. 좋아하는 음식도 바뀌고 찾는 옷도 바뀝니다. 생각도 바뀌고 삶에 대한 태도도 바뀝니다. 여행이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때 여기서 나는 숨겨진 보물처럼 한 자리에 못박혀 있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이동하는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여행은 나를 찾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를 잃어버리는 일이기도 한 것이지요. 말하자면 우리가 그토록 도착하고 싶어하는 목적지는 움직이는 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어쩌면 여행을 통해서 발견하는 것은 새로운 나가 아니라 잃어버린 나일지도 모릅니다. 요컨대 이것은 덧셈이 아니라 뺄셈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에는 새로운 일이 얼마든지 기다리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삶은 기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결국 그곳에 닿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얘기지요. 그리고 끝내 자신이 원하던 곳에 도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삶은 일종의 수동성을 띠게 됩니다. 기필코 내가 원하는 도착지에 도착하겠다는 의지 대신 주어진 것에 스스로를 맞춰나가는 적응을 배우게 되는 것이지요.


영화 <여행자>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이가 새로운 부모를 찾는 이야기입니다. 보육원에 맡겨진 진희(김새론)는 언젠가 아버지가 돌아올 거라는 기대 때문에 입양되는 것을 피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함께 지내던 언니들이 모두 떠나면서 결국 자신이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머나먼 이국으로 입양되어 떠나게 되지요.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아마 대부분이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진희가 스스로를 매장시키는 장면을 꼽으실 겁니다. 실제로 그 장면은 꽤 충격적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파묻는다는 것은 이른바 상징적인 자살에 해당합니다. 이때 진희가 죽인 진희는 바로 아버지가 돌아오길 기대하는 진희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는 진희이지요.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결국 구원에 대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기독교에서 주님이 인간을 구원하러 언젠가 내려오시리라 믿는 것과도 같지요. 하지만 진희가 이 보육원에서 본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모두가 결국에는 떠나간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끝내 아버지는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육원을 떠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진희와 가깝게 지낸 두 언니가 그 두 가지 방법의 현실적인 사례입니다. 숙희(박도연)처럼 입양되어서 떠나는 방법도 있고 입양되지 않고 나이를 먹으면 예신(고아성)처럼 식모살이로 떠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숙희는 생리를 숨기고 나이를 속여서 아이로 보이려고 합니다. 그 덕분에 숙희는 외국인 부부에게 입양되지요. 반면 예신은 누가 봐도 아이가 아닌 여성입니다. 즉 더 이상 아이가 아니기 때문에 입양되지 못하고 식모살이를 떠나게 됩니다.


입양과 식모살이 중에서 어느 것이 낙원에 가까운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표면적으로 낙원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아이인 것처럼 보입니다. 아이인 척하는 숙희는 입양되고 어른이 되어버린 예신은 식모가 되고 말았으니까요. 하지만 사실은 반대입니다. 숙희가 입양될 수 있었던 것은 실제 성장의 변화를 숨기고 겉으로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보여야 한다는 계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아이처럼 보여야 한다는 어른의 속셈이 숙희를 입양으로 이끈 것이지요.


반대로 예신은 몸만 성장했을 뿐 마음은 천진난만한 아이와 다름없습니다. 예신이 보육원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바깥 세상이 자기를 받아주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예신은 계략과 술수로 무장해서 어떻게든 바깥으로 나가려는 대신 자신을 지키고 보호해준 요람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른이 아니라 아이의 마음입니다.


나아가 사랑의 가능성에 희망을 걸고 그것이 실패하자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현실적 태도라기보다는 동화적 상상에 스스로를 투영하고 있는 것에 가깝습니다. 건조한 현실보다는 격정적인 비극이 자신이 살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반대로 말하자면 예신은 삶의 무미건조함을 견뎌낼 수 없는 것입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인생이 비극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요컨대 예신이 입양되지 못하고 식모로 떠나는 것은 어른이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녀가 전혀 자라지 못한 아이이기 때문인 셈입니다.


아버지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진희는 말하자면 예신과 같습니다. 진희는 한 번 아버지에게 배신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숙희를 새롭게 믿게 됩니다. 미국에 함께 가자는 말을 믿고 숙희와 함께 영어 공부를 합니다. 이때까지 진희에게는 세상에 대한 기대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타나건 숙희의 모습으로 나타나건 적어도 이때까지는 진희의 마음 속에 누군가 자신을 구원해줄 거라는 아이의 마음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예신이 떠나고 숙희마저 자신을 배신하자 마침내 진희는 알게 된 것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래서 진희는 땅을 파고 자신을 묻는 것이지요. 바로 아이였던 자기 자신을 매장하는 것입니다.


이 장면도 그렇지만 제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보육원을 나가기 위해 진희가 철문 위로 올라가는 장면입니다. 떨어지면 다칠 게 뻔하니까 보모 아주머니는 철문을 열어주며 네 마음대로 하라고 말하지요. 모두가 사라지자 진희는 철문 아래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열린 철문 밖으로 몇 걸음 발걸음을 옮겨보지요. 하지만 결국 돌아오고 맙니다.


이 장면이 인상 깊은 이유는 바로 진희가 처음으로 목적지의 상실을 경험하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열린 문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올 때 진희는 자신이 보육원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문이 잠겨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진희가 보육원을 떠날 수 없는 것은 다름 아닌 갈 곳이 없어서지요. 그리고 갈 곳이 없어졌다는 것은 바로 예전에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는 말과 같습니다.


가령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버린 게 아니라면 단지 멀리 여행을 왔다가 부모를 잃어버린 것뿐이라면 주소를 기억하고 있는 진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집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아버지의 딸이고 또 아버지와 함께 사는 집에 확실한 자기 자리가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보육원에 버려진 진희는 더 이상 아버지의 딸도 그리고 돌아갈 집도 없습니다. 즉 진짜 버려진 것은 살아있는 육체로서의 진희가 아니라 바로 아버지의 딸이라는 정체성인 것입니다. 요컨대 진희는 버림받는 동시에 이전까지 가지고 있었던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지요. 


이것은 여행의 메커니즘과 같습니다. 여행을 떠날수록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진희는 자기 자신을 상실함으로써 비로소 인생의 여정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이 원치 않은 것이었기 때문에 아이로 머물기 위한 노력, 즉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과 보육원을 도망치려는 것 그리고 숙희에 대한 믿음과 기대를 품는 것이 그러한 예입니다. 


하지만 예신이 떠나고 숙희가 떠나면서 진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한 번 시작된 여행은 두 번 다시 출발한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스스로를 매장하는 진희의 모습은 장례라는 양식을 통해 비로소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는 셈입니다. 앞서 썼던 영화 이야기 <노킹 온 헤븐스 도어>에서 저는 작별이란 다시 시작하기 위한 의례라고 말했습니다. 진희의 장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진희는 마침내 영원히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여행을 떠나기 위해 기존의 자기 자신과 작별하는 것이지요.


자기를 입양한 부모를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진희의 머릿속에는 아버지와 함께 살았을 때 기억이 떠오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살아남기 위해 어른이 되기를 선택한 진희의 유년인 셈이지요. 유년은 어른만이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행을 떠나기 전의 자신이며 자기 자신의 원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담겨져 있습니다. 더불어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세상의 모습이기도 하지요.


말하자면 아버지와의 기억을 스스로의 유년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진희는 어른의 여행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생과 점점 멀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생존과 생의 간극은 시간이 갈수록 벌어지고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 할수록 오히려 잃어버린 것과 점점 멀어지는 긴 여행은 언제나 외국으로 떠나는 것처럼 스스로를 낯선 곳으로 몰아넣겠지요. 적응할수록 낯설어지는 세상으로요. 어쩌면 여행자라는 제목은 머무를 곳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떠나야만 하는 모순된 숙명의 이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023년 2월 22일부터 2023년 3월 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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