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시 Mar 11. 2023

영화 이야기 <왕의 남자>

영화 <왕의 남자>는 2005년 개봉작입니다. 당시 새내기였던 저는 갓 상경해서 뭐가 뭔지 모르고 정신없이 1년을 보낸 뒤였습니다. 그러다 겨울방학이 되어 ‘1년 동안 한 게 대체 뭐지’ 라는 질문을 껴안고 빈둥거리고 있었지요. 고향에 내려가도 됐었는데 문득 서울 여행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외로 나간 유학생들이 짬이 나면 여행을 하는 것처럼 서울로 유학을 온 저는 서울 구경을 해보자는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말하자면 그때 서울은 제게 외국처럼 낯선 곳이었습니다.


하숙집에서 살고 있을 때라서 다행히 숙소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만약 외국 같았으면 숙소를 정하고 그 인근 관광지만 둘러볼 수 있었을 텐데 작고 혼자 쓰는 방도 아니지만 어쨌든 잘 곳이 있어서 굳이 효율성을 고려한 계획을 짤 필요가 없었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해서 가보고 싶은 곳이 있으면 그냥 갔습니다. 하루는 몽촌토성, 하루는 경복궁에 가는 식이었지요.


갓 서울에 올라온 후배가 여기저기 다니는 걸 보니 같이 살던 형들이 재미있어 보였나 봅니다. 어느 날 코엑스를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자고 하더군요. 두 명이었는데 한 사람은 1년 선배였고 한 사람은 편입해서 나이는 저보다 훨씬 많았지만 서울 생활은 저처럼 올해가 처음이었습니다. 요컨대 촌티를 벗지 못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코엑스에 들어간 겁니다. 처음 방문한 코엑스는 정말 복잡했습니다. 이정표를 보고 열심히 따라다녔는데 몇 번이고 제자리로 돌아왔던 기억이 납니다. 여기까지 왔으니 뭐라도 해야 할 텐데 사실 코엑스에서 뭘 하면 좋을지 전혀 알 수 없어서 결국 밥을 먹고 영화를 보기로 했습니다. 새로운 걸 해보고 싶어서 새로운 곳에 왔지만 어떤 것이 새로운 것인지 그건 또 어떻게 하는 건지 전혀 몰랐던 셈이지요. 그때 봤던 영화가 바로 <왕의 남자>였습니다.


<왕의 남자>는 연산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입니다. 남사당패인 장생(감우성)은 남자이면서도 여사당처럼 몸을 팔아야 하는 공길(이준기)과 함께 사당패를 탈출해 한양으로 향합니다. 한양 사당패와 함께 왕을 풍자하는 공연을 만들어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거꾸로 왕(정진영)의 신임을 얻어 궁궐에 머무르게 되지요. 하지만 왕은 공길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사당패의 공연은 왕과 신하들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다가 결국 파국을 맞게 됩니다.


천만 영화라는 것과 함께 이 영화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것은 공길이라는 캐릭터입니다. 배우 이준기 씨가 연기한 이 캐릭터는 여자보다 예쁜 남자로 유명했지요. 저도 포스터만 봤을 때는 당연히 여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퀴어적인 요소를 전면에 내걸고도 이례적인 흥행을 기록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퀴어 소재가 대중성을 얻기 힘들다는 점을 고려하면 확실히 인상적인 부분입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에서 퀴어가 단순히 사람들을 자극시키는 용도로만 사용된 건 아닙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사당패를 불러들인 양반이 공길의 몸을 더듬는 와중에 장생이 공길을 데리고 떠나는 장면처럼 영화는 퀴어의 자극적 이용을 떠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장생과 공길이 사당패를 탈출해 한양으로 떠나는 것은 공길의 매춘을 혐오스러운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약자를 제물로 삼아 생명을 보존하는 생존 수단은 물론 부도덕한 것입니다만 이 윤리적 대답에는 틈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장생이 혐오한 것이 약자에 대한 희생 강요인지 아니면 연인을 빼앗긴 남성의 열등감인지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장생이 공길에 대한 연정을 품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 연정이 플라토닉인지 에로스인지 명확히 구별하기는 어렵습니다. 가령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눈이 먼 장생은 공길과 호흡을 맞추며 광대짓을 하는데 눈이 멀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플라토닉한 것입니다. 하지만 공길을 대하는 장생의 모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현실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극 속의 관계입니다. 현실의 관계에서 장생이 공길을 대할 때 그의 감정은 절제되어 있습니다. 적어도 연산군처럼 느닷없이 입술을 훔치는 모습은 보이지 않지요. 하지만 반대로 극 속의 관계, 즉 공연 중에는 어느 하나 에로스적 관계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첫 공연에서는 사당과 기생으로, 한양에서는 연산군과 장녹수로, 궁궐 내에서는 탐관오리와 내연녀로 심지어는 성종과 폐비 윤씨의 모습으로까지 나타납니다.


요컨대 장생과 공길은 현실에서는 플라토닉한 관계를 유지하지만 극 속에서는 에로스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입니다. 어느 쪽이 진실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두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점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영화 속에서 사당패가 벌이는 공연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항상 내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궁궐 안에서 공연을 할 때마다 누군가 피를 보는 것은 말하자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 속에는 칼이 들어 있다는 뜻이지요. 다시 말해 영화 속에서 극은 말하고 싶으나 말할 수 없는 것의 말하기입니다. 이른바 억압된 것의 표출이지요.


가령 장생 일행이 궁궐에 붙잡혀 와서 왕 앞에서 처음으로 하는 공연을 보면 출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왕으로 분한 장생이 인형을 들고 자신의 아이라고 말할 때 녹수로 분한 공길은 그 아이가 누구 아이인줄 아느냐고 묻습니다. 이때 연산군의 표정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아이의 아비를 대라는 말에 공길은 대가를 요구하고 장생은 윗입과 아랫입 중에서 어느 것을 채워주면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공길은 물구나무를 하면서 가랑이를 벌리고 이를 윗입이라고 말하지요. 연산군은 크게 입을 벌리고 웃게 됩니다.


비록 인형이지만 왕의 적자를 두고 출생 운운할 때 연산군의 표정이 달라지는 것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이 폐비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은 신분을 정할 때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는 종모 사회입니다. 가령 아버지가 양반이어도 어머니가 평민이면 서얼이 되는 식이지요.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는 원래 후궁이었다가 중전이 된 인물입니다. 당시 윤씨는 임신을 한 상태였는데 만약 아들을 낳으면 후궁 소생인 것보다는 중전 소생인 것이 왕권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중전으로 간택되었지요. 요컨대 정통성이란 오히려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에 의해 결정된 것입니다. 따라서 윤씨가 폐비가 되어 중전의 자격을 박탈당하는 순간 함께 박탈된 것은 다름 아닌 연산군의 정통성입니다.


공길이 아이의 출생과 관련해 누구 아이인줄 아느냐고 물을 때 그 질문은 당연히 아버지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연산군의 출생 콤플렉스는 누구의 씨인가가 아니라 누가 낳았느냐입니다. 요컨대 공길이 쏜 화살은 엉뚱한 과녁을 쏜 것이지만 그렇다고 빗나간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화살이 맞은 곳은 어찌됐건 출생이라는 과녁이기 때문입니다. 연산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다만 공길이 가랑이를 벌리며 윗입이라고 말하는 순간 이 분노는 풀려버립니다. 왜냐하면 공길의 퍼포먼스는 앞에서 말한 윗입, 즉 여성 성기가 상징하는 출생이라는 기원을 조롱함으로써 그것이 가진 정치적 의미를 무화시켜버리기 때문입니다.


연산군이 자신의 권위가 무시당하는 이유를 어머니에게서 찾지만 이러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무시당하는 현상의 이후에 탐색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연산군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반대하는 신하들의 말들에서 권위의 하락을 느끼고 그 이유를 어머니로부터 찾는다는 것이지요. 즉 연산군을 궁지로 모는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신하들의 ‘윗입’입니다. 하지만 연산군은 그 이유를 출생이라는 ‘아랫입’에서 찾고 있고, 자신을 무시하는 윗입의 근원에는 아랫입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공길이 가랑이를 벌리며 아랫입과 윗입의 위치를 바꿔버리는 것은 분명 위와 아래의 위치를 바꾸는 전도에 해당하지만 연산군의 입장에서 그것은 오히려 올바른 위치입니다. 신하들은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지만 사실은 그들이 겨냥하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출생이라는 것이 연산군의 생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진정한 윗입은 바로 출생이라는 아랫입이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공길의 퍼포먼스는 연산군에게 신하들의 가식을 폭로하는 것과 같고, 이 폭로는 그것이 광대의 몸짓이라는 점에서 조롱으로 바뀌어 끝내는 신하들을 비웃고 싶은 연산군의 심정을 수면 위로 끌어올립니다. 즉 연산군의 웃음은 결국 신하들에 대한 비웃음이자 억눌러진 콤플렉스의 출구와 같은 것입니다.


나아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폭로자의 정체, 즉 공길이라는 인물의 속성입니다. 공길은 성별로는 남자지만 실제 수행하는 모든 사회적 행위는 여성입니다. 요컨대 섹스는 남성이지만 젠더는 여성인 셈이지요.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성질이 한 몸에 존재한다는 것은 모순이고, 이 모순은 일면 존재의 부정이라는 자기 파괴의 형태로 나아가기도 하나 한편으로는 진실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에 해당하는 광대입니다. 광대는 천한 신분과 숭고한 인간성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모순된 성질을 가지고 있고 그 모순된 성질은 끝내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가지만 역설적으로 그 죽음으로 향하는 돌진이야말로 생의 의미라는 진실에 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모순된 존재라는 것은 자기 파괴의 욕망과 생의 충동을 함께 가진 존재로서 프로이트의 말을 빌리면 타나토스와 에로스가 공존하는 형태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공길은 바로 그러한 존재로서 삶을 문제로 인식하고 있는 두 명의 남자, 즉 장생과 연산군으로 하여금 답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의미의 창이 됩니다. 사실 모순이라는 것은 특별한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이 껴안고 있는 숙제 같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모순을 표면화하기 힘듭니다. 숨기고 내색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내부에 억압된 것을 만들게 되지요. 하지만 공길은 누가 봐도 상충하는 성질이 공존하는 모순의 화신입니다. 말하자면 그 스스로가 금기이자 동시에 금기의 해방인 셈이지요. 연산군에게 했던 퍼포먼스처럼 공길은 그 자체로 억압된 것의 말하기인 것입니다.


연산군을 자기 파괴로 몰아가는 출생의 콤플렉스는 어머니에 대한 부정에서 기인합니다. 폐비가 되어 자신의 정통성을 훼손시켰기 때문에 왕의 권위를 인정받지 못한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이것은 바깥의 것이고 내실에서 일어나는 것은 어머니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겪는 아들의 괴로움입니다. 공길을 불러 그림자극을 보여줄 때 연산군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입니다. 하지만 이때 어미를 잊으라고 말하는 아버지, 즉 성종을 연기하는 것 또한 연산군입니다. 말하자면 연산군이 연출하는 그림자극은 어머니로 인해 정통성을 훼손당했다고 생각하는 원망과 어머니를 잃어버린 아들의 그리움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 모순된 감정이야말로 연산군을 광기로 몰아가는 타나토스입니다. 반대로 연상인 장녹수를 후궁으로 삼아 어미를 연기하게 하는 것은 에로스의 일환이라고 해야겠지요.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모순이 장생에게도 똑같은 구조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연산군의 콤플렉스가 출생인 것처럼 장생의 콤플렉스 역시 천한 것으로 태어났다는 출생에 기인합니다. 눈이 멀었을 때 감옥에서 장생은 자신이 어렸을 때 주인집에서 입을 맞았다는 말을 하면서 만약 그때 눈을 맞았다면 이번에 지져진 건 입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이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운명의 한계에 대한 장생의 생각입니다. 요컨대 입이든 눈이든 결국은 맞고 지져질 운명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천출로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면서도 동시에 그 한계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운명에 반항할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공길을 양반으로부터 구해내서 사당패를 탈출하는 것은 말하자면 그런 자신의 운명에 대한 반항인 셈이지요. 하지만 양반에게서 구출한 공길은 다시 왕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이때 장생이 체감하게 되는 것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를 지킬 수 없다는 무력감이고 이 무력감은 바로 천출이라는 출생에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연산군과 장생은 결국 형태를 달라보여도 출생이라는 한계를 품고 그 한계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간다는 점에서는 같은 인물입니다. 왕과 천민이라는 수직적 관계에서 영화 중간에 연산군이 왕관을 내려놓고 함께 엎드리며 서로의 위치를 수평으로 맞추는 장면은 이들이 신분이 달라도 결국은 같은 선상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요.


하지만 궁극적으로 말하면 이 둘은 완전히 같지 않습니다. 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으냐는 공길의 물음에 장생은 양반도 왕도 아닌 광대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가 느낀 출생의 한계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답입니다. 경극 공연을 하다가 선왕의 후궁을 죽이는 연산군을 보면서 장생은 왕에게도 출생이라는 콤플렉스가 있다는 것을 알았겠지요. 신분 중에서 가장 낮은 자신에게도 출생의 콤플렉스가 있고 신분 중에서 가장 높은 왕에게도 출생의 콤플렉스가 있다면 사실상 모든 생에는 출생이라는 콤플렉스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말하자면 장생은 알게 된 것입니다. 생의 콤플렉스는 신분이 아니라 생 자체에서 기인한다는 것을요.


모두가 생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면 양반으로 태어나나 왕으로 태어나나 사실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히려 광대는 극이라는 형식을 통해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신분입니다. 장생은 극을 통해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공길과의 에로스를 실현하고, 양반도 되고 왕도 됨으로써 신분의 한계를 초월합니다. 물론 극이 끝나면 현실로 돌아와야 하지만 극이 상연되는 중에는 그 누구도 초월할 수 없는 현실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마치 줄타기와 같이 외줄이라는 위태로운 현실에 발딛고 있지만 적어도 한 순간만큼은 하늘을 날아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중종 반정으로 역성혁명의 군사들이 몰려올 때 그들과 왕의 위치는 수직으로 표현되어 있는 반면 장생과 공길이 서 있는 외줄은 그 수직의 허리를 가로질러 수평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때 세로축이 의미하는 것은 아래에 있는 것은 올라오고 위에 있는 것은 내려간다는 순환의 역사이고 가로축이 의미하는 것은 어느 시대 혹은 어떤 신분과도 상관없이 이상향을 꿈꾸는 초월에의 꿈입니다. 그리하여 세로축의 정점에 있으되 초월 대신 자기 파괴를 택한 연산군은 아래로 추락하고 가로축의 정점에 있으되 소중한 사람을 위해 눈을 버린, 이른바 역사라는 현실에 눈을 감고 이상향이라는 초월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 장생은 승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때 연산군의 남자로서 왕의 남자였던 공길은 자기 파괴 대신 초월을 향해 솟구친 장생을 따라 함께 승천함으로써 다시 한 번 ‘왕의 남자’가 되는 것이지요.


대학교 1학년의 서울은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오직 추웠던 기억만 남아 있습니다. 겨울에 시작되어 겨울에 끝난 첫 서울살이는 말 그대로 혹한의 경험을 혼자서 견뎌내는 일이었지요. 말하자면 그해의 저는 죽음도 삶도 가까이 두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제까지 살아온 저를 죽이는 시간이면서 동시에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삶을 모색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기도 했지요.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추운 거라고. 뭔가를 이뤄내서 햇빛이 잘 드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따뜻해질 거라고 생각했던 그 시간 속에서 결국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일은 실패했지만 지금까지 별탈없이 살아있는 걸 보면 적어도 죽음으로부터는 도망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때 영화를 함께 봤던 형들은 이제 연락도 되지 않지만 서울에 처음 온 지방 사람처럼 코엑스를 헤매면서 웃었던 기억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지금도 위를 쳐다보며 어떻게 하면 저기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생각하는 제게 그런 기억은 위가 아니라 여기에 있는 것들을 보게 합니다. 계속 고개를 들고 걷다가는 자칫 밑을 보지 못하고 추락할지도 모르지만 앞을 보고 걸으면 위보다 더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게 하지요. 과거의 영화는 과거를 환기시킵니다. 2005년의 나는 이제 어디서도 만날 수 없지만 여전히 내 안에 있습니다. 오랜만에 그리운 저를 만났습니다. 반가웠습니다.



2023년 3월 4일부터 2023년 3월 5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영화 이야기 <여행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