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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Mar 17. 2023

영화 이야기 <아무도 모른다>

어렸을 때 집에 들어가는 걸 싫어했었습니다. 중학생이 된 다음부터는 안 그랬는데 오히려 그보다 더 어렸을 때 집에 가기 싫어서 한참 동안 동네를 배회하곤 했습니다. 가출이랍시고 밤 늦게까지 들어가지 않아서 부모님 속을 썩힌 적도 많았지요. 다만 겁이 많아서 돌아올 수 없을 정도로 멀리 가거나 집에 들어가지 않은 날은 없었습니다. 언제나 살던 곳과 살지 않은 곳의 경계를 맴돌기만 했었죠. 


금을 그어둔 것도 아니고 그보다 멀리 가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심부름이나 다른 일로는 훨씬 멀리 나가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집을 나간다고 생각하면 어느 경계에서 더 이상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머릿속에서 여기까지 라고 말해주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렇게 공간의 경계가 정해지면 그때부터는 그 주변에서 시간의 경계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보통 10시나 11시 정도였는데 역시 그보다 더 늦으면 안 된다는 자각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우스운 일이지요. 가출이랍시고 나왔는데 갈 수 있는 곳도 머물 수 있는 시간도 다 정해져 있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공간과 시간이 저의 세계였던 것 같습니다. 그보다 멀리 갈 수도 있고 그보다 늦은 시간까지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뭐라고 해야 할까 꼭 내가 아닌 다른 것이 되어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다른 것이 그렇게 괜찮은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아요. 오히려 위험하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만약 누군가 등을 떠밀었다면 나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버티었을 것 같아요. 그 세계는 내가 가장 싫어하던 것이어서 도망치고 싶었던 곳이었으나 반대로 결코 나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곳이기도 한 셈이지요. 말하자면 나는 새로운 나로 살기 위해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이곳을 벗어나는 순간 나를 상실해버릴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실화에서 가져온 이야기지만 영화 속에서 실화의 흔적은 미미합니다. 엄마가 아이들을 버렸고 아이들끼리 생활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이야기의 분위기와 지향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동력은 완전히 다릅니다. 기사화된 실화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사회적 의무를 방기한 엄마에 대한 윤리적 분노와 방치된 아이들에 대한 동정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회의 암울한 구석에 대한 혐오와 공포입니다. 이것은 도시괴담의 형식과 비슷합니다. 사건의 본질보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함으로써 질적 탐구보다 양적 확산을 꾀하는 것입니다. 이때 사실이라는 것은 오히려 흥미를 배가시키는 요소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뉴스나 기사에서 이런 종류의 사실은 오히려 사실보다는 ‘소재’로 차용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아무도 모른다>에서 실화는 아무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소재가 힘을 발휘하는 것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관념에 쉽게 달라붙을 수 있을 때입니다. 가령 기사에서 실화는 부덕한 어미와 불쌍한 아이들이라는 동화나 드라마에서 수도 없이 재생산된 관념을 쉽게 연상시킬 수 있게 씌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 아이들의 삶은 없습니다. 반대로 <아무도 모른다>에서 보여주는 것은 불쌍한 아이들이라는 관념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있는 아이들의 삶입니다. 


영상은 편집된 것이고 편집은 의도를 배제할 수 없으므로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아이들의 삶 역시 관념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기사에서 보여주는 관념에 비하면 그것은 실재에 가까운 관념입니다. 그리고 이 관념은 닫혀버린 삶이 얼마나 자극적인 소재로 이용될 수 있는가가 아니라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생이 품고 있는 가능성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아무도 모른다>가 보여주는 것은 불쌍한 아이들이 아니라 불쌍한 아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며 그 방식은 죽음 속에서도 삶을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이 영화는 절망이 아니라 대안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는 아키라(야가라 유야)와 사키(칸 하나에)가 캐리어를 들고 지하철에 있는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캐리어와 지하철은 서로 다른 성격입니다. 캐리어는 대개 멀리 나갈 때 사용합니다. 물론 가방이 없으면 집 앞 마트에 갈 때 쓸 수도 있지만 대개 캐리어를 끌고 가는 사람을 보면 먼 이국으로 떠나거나 혹은 돌아오는 느낌이 듭니다. 요컨대 캐리어는 낯선 곳으로 향하는 여정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낯선 곳으로 향하는 여정은 낯선 나를 만나는 여정이므로 여기에는 자아의 고집 혹은 경험으로의 귀착이 없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나를 찾는 탐색이면서 기원을 이탈하는 자의 불안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반면 지하철은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출발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하철은 바닥에 깔려 있는 레일을 타고 움직이는 것이고 이 말은 레일이 깔려 있는 곳은 거리와 상관없이 닿을 수 있지만 레일이 깔려 있지 않은 곳은 아무리 가까워도 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지하철이란 기원과 경험의 틀입니다. 이 기원에 근거하는 한 나는 아무리 먼 곳이라도 떠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돌아오는 길이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이것은 기원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므로 조우하는 모든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원래의 나라고 하는 경험으로만 해석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에는 아무리 멀어지려고 해도 결국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한계와 어떤 경우에도 세계의 바깥으로 이탈하지 않는다는 안정이 있습니다.


이 영화가 캐리어와 지하철로 시작하는 것은 두 아이의 여정이 낯선 곳으로 향하는 길이면서 동시에 낯선 곳으로 갈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의 여행은 밤처럼 가라앉아 있고 밤처럼 흔들리지 않습니다. 설렘과 기대는 없지만 불안과 절망도 없습니다. 이 여정의 끝에서 새로운 나와 조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돌아올 나를 견딜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이 영화는 수미상관으로 배치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시작될 이야기는 왜 이 아이들이 이런 여정을 떠나야만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이 장면이 나타나면 아이들이 도착하고 싶었던 혹은 가야만 했던 곳이 어디인지도 알 수 있게 되겠지요.


엄마(유)와 함께 지내는 네 명의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하고 그렇다고 밖을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합니다. 아이가 많으면 받아주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고 있는 아이는 아키라(야기라 유야)뿐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숨어 살고 있습니다. 교코(기타우라 아유)만이 간신히 베란다에 나갈 수 있는데 그것도 빨래를 할 때뿐입니다. 시게루(키무라 히에이)와 유키(시미즈 모모코)는 한 번도 방 바깥을 나가본 적이 없습니다. 이사를 올 때도 교코는 밤이 되어서야 몰래 들어올 수 있었고 시게루와 유키는 캐리어에 숨어서 들어왔지요.


이 아이들은 모두 아버지가 다른 아이들입니다. 엄마가 아이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이사올 때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캐리어에 아이들을 실어온 것처럼 엄마에게 있어 아이들은 짐입니다. 그나마 아키라를 데리고 다니는 것도 특별히 애정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실질적으로 돌보는 것이 아키라이기 때문입니다. 즉 큰 아이를 보모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아이들이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것은 집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아이들을 바깥에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입니다. 아키라를 포함해서 아무도 학교에 갈 수 없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엄마는 아이들을 인간으로 키우려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말하자면 사회의 양지가 아니라 자신의 비밀스러운 그늘 속에 묶어두려는 것이지요. 노출되는 순간 공식적인 책임이 생기니까요.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 그리고 학교에 다니고 싶은 마음은 인간으로 살고 싶은 아이들의 마음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아이들은 어떤 것이 인간인지 알고 있다는 뜻이지요.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고 학교에 다니고 친구를 만나고 공부를 하고 때론 놀기도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반대로 아무에게도 들켜서는 안 되고 사회가 요구하는 어떤 의무나 책임도 지우지 않는 것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어도 인간이라고 할 수 없지요. 소설 <정글북>의 모태가 되기도 하였던 정글 속에서 자란 아이는 분명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사회로 데려오자마자 금방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무도 모른다>의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아이들은 정글이 아니라 사회 속에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사회와 어떤 관계도 맺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아이들이 머물고 있는 것은 엄마의 비밀스러운 영역이며 이 영역은 사회가 요구하는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치 습한 정글과 같습니다.


요컨대 <아무도 모른다>가 보여주는 것은 부도덕한 어미와 불쌍한 아이들이기 전에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두 개의 환경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흔히 사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부모가 있고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이 아이들은 때론 일탈을 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학원이나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은 사회적 인간이고 문명에 속해 있으며 이성을 기반으로 한 메커니즘에 종속되어 있고 세계는 단단하게 구축되어 있습니다. 울타리가 쳐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자신의 세계가 어디까지인지 명확히 알고 있고 명찰을 달고 있지 않아도 스스로가 누구인지 알고 있으며 지침이 없어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반대로 아키라들은 사회의 공백에 속해 있습니다. 이곳은 어떤 울타리도 없고 명찰도 지침도 없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살아 남는 것입니다. 이곳은 시간이 지날수록 촘촘해지는 사회망 속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뚫려 있는 공백이며, 명백히 사회에 속하지만 결코 사회가 될 수 없는 곳입니다. 이곳은 법도 윤리도 없으며 지켜져야 하는 규율은 오직 생존을 위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곳은 문명의 일부이면서 결코 문명화될 수 없는 원시의 공간인 셈입니다.


문명과 원시라는 이 두 개의 공간은 실재하는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생활 양식을 만들어내는 기원으로 존재합니다. 말하자면 똑같이 오락실을 가고 자전거를 타고 아키라가 친구들과 같아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엄마가 떠나버린 후 아키라가 아이들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오지만 그 바깥은 흔히 말하는 사회가 아니라 단지 공간의 확장에 불과합니다. 아이들이 상상했던 바깥은 학교도 가고 친구도 만나는 사회였으나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는 엄마가 쥐고 있었고 엄마는 열쇠를 버린 채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결국 아이들은 밖으로 나왔어도 사회가 아닌 원시의 공간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키라들이 상징하는 이 원시의 공간은 영화 초반에는 문명의 시선으로 표현됩니다. 그곳은 엄마가 버린 세상이며 온갖 쓰레기로 뒤덮여 있고 오직 일탈의 욕구를 채우고 싶은 미성숙한 아이들만이 호기심에 방문하는 곳입니다. 공간은 그 공간에서 일어난 사건의 성격을 그대로 간직하게 됩니다. 집을 포함해서 아키라들이 머무는 공간은 그런 면에서 본다면 엄마의 부도덕과 아이들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찬 곳입니다. 그리고 부도덕과 연민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만 이 관심은 혐오와 공포라는 경계를 넘지 않습니다. 따라서 문명의 시선에서 이곳은 마치 범죄 현장과 같습니다. 여기에는 흥미와 경고가 있고 멀리서 지켜보고 싶은 마음은 있어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문명의 시선은 그러한 시선을 받아주는 원시의 공간 속으로 함몰됩니다. 불쌍하고 더러운 아이들을 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끝없는 연민이 아니라 불쌍하고 더러운 와중에도 살아있는 생명의 모습입니다. 가스도 전기도 수도도 끊겨서 말 그대로 집만 있을 뿐 자연에 방치된 것이나 다름없는 아이들은 편의점 폐기 음식을 먹거나 공중 급수대를 사용해 물을 조달합니다. 이런 와중에도 아이들이 하는 것은 바로 식물을 키우는 일입니다. 다 먹은 라면 용기에 흙을 담아서 공원에서 꺾어온 풀들을 키우는데 이것은 생명(풀)이란 원래 더러움(흙) 속에서 자라난다는 것에 대한 비유이면서 동시에 아이들에 대한 비유이기도 합니다. 물과 바람 그리고 햇볕 밖에 없으면서도 푸르게 자라고 있는 것은 바로 아이들이기 때문이지요.


사회의 공백 속에서 생이 자란다는 것은 그 자체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됩니다. 문명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그 세계를 벗어나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야생에 방치된 린다는 비참한 죽음을 맞습니다. 이렇듯 정해진 궤도 밖으로 나가는 순간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는 두려움, 즉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죽음에 대한 공포는 문명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 중 하나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 세계 바깥에 세계는 없다는 말이지요. 생은 이곳에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적응하고 궤도 밖으로 밀려나가지 않기 위해 애써야만 합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문명에 적합하게 설계된 것은 아닙니다. 개중에는 가족은 물론이고 학교와 직장에서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가는 순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원시의 세계, 즉 문명인이 살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버티려고 합니다. 버티면서 그들은 말라가고 최악의 경우 생명을 포기하는 일도 생깁니다.


영화 속 사키가 바로 그런 인물입니다. 사키는 학교 동급생들로부터 괴롭힘을 받고 있습니다. 밤에 책을 버리는 모습에서도 그녀가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하지만 갈 곳이 없기 때문에 학교를 계속 다니는 것이고 유복한 가정 환경과 상관없이 사키는 점차 고사되어 갑니다.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능동성을 회복하는 것은 바로 아키라들과 함께 지내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아키라들과 지내면서 그녀는 다시 웃기 시작하고 권장할 만한 방법은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인간이 되는 일을 시도합니다. 요컨대 죽음이라고 생각했던 문명의 바깥에서 오히려 사키는 생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문명과 원시를 서로의 대립항으로 두고 문명 속에서 사람은 죽어가고 원시에서 사람은 회복되고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거의 대부분의 인간은 문명 속에서 살아갑니다. 단지 문명이나 이성 혹은 구조나 사회라고 불리는 이 세계의 바깥에서도 사람은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요컨대 세계 안쪽에 너의 자리가 없다면 바깥 쪽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생과 죽음이라는 이분법이야말로 이 영화가 해체하고자 하는 관념입니다. 아이를 버리고서라도 문명으로 들어가는 엄마는 부도덕한 인물이 되지만 원시 속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아이들은 그 자체로 생의 증거가 됩니다. 즉 생은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으며 인간으로서의 삶이 끝나는 것 역시 여기에도 저기에도 있는 것입니다.


문명에서의 삶이 인간을 죽음에 몰아넣기도 하는 것처럼 원시의 삶 역시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낙상한 유키는 병원에 가지 못한 채 결국 죽고 맙니다. 영화의 첫 장면이었던 아키라와 사키가 캐리어를 들고 지차철을 타고 있는 장면은 바로 죽은 유키를 묻으러 가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아키라와 사키는 하네다 공항이 보이는 야산에 땅을 파고 유키를 묻습니다. 이때 온갖 조명으로 빛나는 공항은 비행기의 상승과 더불어 문명이자 생을 상징하고 빛 하나 없는 야산과 무덤은 원시이자 죽음을 상징하지요.


아키라와 사키는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비행기 속에 있지 않지만 무덤 속에 있지도 않습니다. 아이들이 있는 곳은 평지이며 그곳은 흙 묻은 손이라도 서로의 손을 잡아주는 곳입니다. 죽은 동생을 묻기 위해 함께 와줄 수 있는 상대가 있는 곳이며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더듬거리면서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목적지까지 온 다음에도 헤어지지 않고 출발지로 함께 돌아갈 누군가가 있는 곳이지요. 하늘과 무덤은 대립항처럼 보이지만 발 디딜 곳이 없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마치 엄마가 새로운 세상으로 올라간 것처럼 보여도 윤리적 인간으로서는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요. 사람이 있어야 할 곳은 위와 아래 혹은 문명과 원시 같은 것이 아니라 기대고 디딜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이 영화가 말하는 것은 결국 소외에 관한 것입니다. 부모에게 버림 받은 아이와 학교에서 버림받은 아이는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이지요. 영화의 제목인 ‘아무도 모른다’ 역시 소외의 표현입니다. 유키가 든 가방을 끌고 아키라와 사키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시장과 수많은 인파가 붐비는 지하철역을 지나오지만 이 아이들이 동생의 시체를 끌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릅니다. 아이들만 있는 집을 봤으면서도 집주인은 아이들이 방치되어 있다는 것을 몰랐고 엄마는 알면서도 모른 체 했지요. 말하자면 이 영화의 비극은 소외된 자들을 위한 세상의 자리가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영화의 희망은 비록 세상이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아도 소외된 자들끼리의 연대로 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점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가족이 있거나 직장이 있거나 해서가 아니고 죽는다는 것 역시 집이 없거나 가족이 없거나 해서가 아닙니다. 누군가 나와 함께 있을 때 그것은 생이며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를 때 그것은 죽음입니다. 소외를 물리치는 유일한 방법은 연대입니다. 소외된 자들이 모일 때 그들은 비로소 소외된 자가 아니게 됩니다. 그러니까 영화는 말하는 것입니다. 원하는 연대에 끼기 위해 아득바득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주위에서부터 연대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생이라고. 때론 위를 보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래도 걸음은 옆에 있는 사람과 함께 걷는 것이라고. 모두가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이라도 너만이라도 알아주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2023년 3월 7일부터 2023년 3월 1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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