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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Mar 21. 2023

영화 이야기 <라이언>

영화가 시작되면 광활한 세계가 눈 아래 펼쳐집니다. 비행기에서 찍은 것 같은 이 장면은 세상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내려다보면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전체를 본다는 것은 언어에 비유하면 명사와 같습니다. 모습이나 상태 혹은 성질이나 특징을 하나의 단어로 가두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내려다보는 것은 정의하는 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가 과거를 떠올리는 것은 뒤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에 가깝습니다. 지나온 시간을 내려다보면서 우리는 과거를 판단하고 그렇게 판단한 과거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정의하게 됩니다.


영화 <라이언>은 부모를 잃어버린 한 아이가 낯선 땅에서 자라 다시 부모를 찾으러 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부모를 찾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을 찾는 이야기입니다. 입양되어 호주에서 자란 사루(데브 파텔)는 파티에서 우연한 계기로 잊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됩니다. 사루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기억의 시작점은 입양이었습니다. 부모 없이 고아원에서 자라던 자신을 수(니콜 키드먼)가 입양하면서 간신히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사루는 생각했지요.


하지만 발견한 기억에 의하면 자신의 시작은 호주가 아니었습니다. 고아도 아니고 자신을 애타게 찾는 엄마와 형이 있었습니다. 사루는 기억의 일부를 망각한 채 새로운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인도인이지만 크로켓 경기에서 호주를 응원하는 것처럼 사루는 스스로를 호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라는 것은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경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주로 입양된 다음부터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는 경로를 생각하면 사루가 자기 자신을 호주인으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망각된 기억의 회복은 말하자면 출발지를 바꿔버리는 것입니다. 현재의 사루에 이르는 경로의 출발지는 호주가 아니라 인도였습니다. 고아가 아니라 미아였고 수가 아닌 다른 엄마, 만토쉬가 아닌 형이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과거로부터 출발하여 현재에 이르는 경로라면 출발지의 변경은 새로운 자기 자신의 인식이자 동시에 원래 알고 있던 자기 자신의 해체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원래 살았던 고향을 찾으면서 점점 피폐해지고 스스로를 학대하는 사루의 모습은 바로 자기 자신의 재인식에 따른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고통의 구체적인 모습은 이렇습니다. 원래의 엄마가 있다면 수는 더 이상 엄마가 아니게 됩니다. 물론 입양할 때 부모와 자식의 법적 절차를 밟았기 때문에 권한과 책임의 측면에서 수는 여전히 사루의 엄마입니다. 하지만 부모는 단지 권한과 책임으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말하자면 어딘가 있는지 모를 이세계로부터 이 세계로 자신을 불러들인 존재입니다. 세계의 바깥을 떠돌아다니던 나는 부모를 만나면서 비로소 세계에 입장하게 됩니다. 수가 사루를 입양함으로써 사루가 세상을 살 기회를 얻은 것 역시 같은 논리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세상을 살아갈 기회를 주는 존재인 것입니다.


사루가 원래 엄마의 존재를 인식했다는 것은 자신에게 삶을 준 존재가 수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는 말하자면 두 번째 삶을 준 것입니다. 이 말은 수가 엄마가 아니라 두 번째 엄마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루가 원래 엄마를 찾는 일을 수에게 비밀로 하고 괴로워하는 이유는 그것이 수를 엄마의 자리에서 밀어내는 일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원래 엄마와 두 번째 엄마는 아무래도 같지 않으니까요. 요컨대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살 기회를 준 엄마를 배신하는 것 같은 기분이 사루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은 엄마만이 아닙니다. 엄마가 사라지면 자식도 사라집니다. 수가 엄마의 자리에서 밀려날 때 함께 밀려나는 것은 수의 아들이라는 사루의 정체성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수많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이 정체성들은 때론 사라지고 다른 것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은 대부분의 경우 결코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잃어버린다면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고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을 잃어버린 나는 절대 이전과 같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렇다고 이전처럼 수를 하나뿐인 엄마로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낳아준 엄마가 있다는 것을 몰랐을 때 수는 사루의 어떤 노력 없이도 세상에 하나뿐인 엄마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낳아준 엄마가 있고 그 엄마가 자신을 찾고 있다고 생각할 때 수를 하나뿐인 엄마로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낳아준 엄마를 버리는 것이 됩니다. 사루가 사라졌을 때 사루의 원래 엄마와 형은 애타게 사루를 찾았을 것입니다. 끝내 찾지 못한 사루는 사라지지 않는 상실감이 되어 그들의 가슴 속에 남았겠지요. 말하자면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은 사루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수는 부모를 잃어버린 사루에게 부모가 되어주었습니다. 요컨대 부모를 찾아준 것입니다. 그런데 사루가 혼란과 방황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원래 부모를 기억 속에 묻어버린다면 그것은 마땅히 찾아주어야 할 그들의 자식과 동생을 방치하는 셈이 됩니다. 수가 부모를 잃어버린 자신에게 부모를 찾아주었다면 사루 역시 자식과 동생을 잃어버린 엄마와 형에게 자신을 돌려주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원래의 엄마와 형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준 수의 마음마저 배신하는 것입니다. 


수가 사루를 입양한 것은 단지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수가 한 말처럼 입양은 “버림받은 아이들에게 살아갈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자식을 잃어버린 엄마와 동생을 잃어버린 형에게 삶은 어떤 의미에서는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사루가 수의 마음을 공유하고 있다면 원래의 가족에게 마땅히 잃어버린 삶을 다시 살 기회를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수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요.


사루가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고 자신을 다시 세계의 바깥으로 밀어내는 모습은 여기에 기인합니다. 사루는 자기 자신을 재인식해야 하는 고통을 겪고 있는 한편 그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거나 피할 수도 없습니다. 나의 엄마는 수인지 인도의 엄마인지, 나의 형은 만토쉬인지 인도의 형인지 나는 선택하지 않을 수 없고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요컨대 도착지가 현재의 자신이라는 점은 명확하지만 출발지는 이전과 달리 두 곳으로 나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곳을 출발지로 하느냐에 따라 경로는 완전히 달라지고 다른 출발지는 버려지거나 경유지가 되어버립니다. 게다가 이 출발지는 단지 둘 중에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선택이 불가능한 동시에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결국 출발지에 대한 물음은 미궁 속으로 빠져듭니다. 나는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사루가 내내 던지는 물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구글 어스를 통해 고향을 찾는 사루의 모습은 이러한 자기 탐색의 비유이기도 합니다. 사루가 찾는 곳은 엄마와 형이 사는 곳인 동시에 자신의 기원입니다. 요컨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것이지요. 탐색해야 할 반경이 어마어마하게 넓은 것은 사루가 자신의 기원을 묻는 질문이 그만큼 난해하고 막막한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누구에게나 자신의 기원을 묻는 일은 막막한 일입니다. 그것은 단지 부모가 누구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나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라는 근본적인 물음인 동시에 현재의 자신이라는 도착지에 대해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가 라고 묻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기원에 대한 물음은 탐색인 동시에 회의인 것입니다.


다만 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는 때로는 질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루가 겪는 이 자기 자신의 재인식 과정은 자기 자신을 하나의 경로로 생각하는데서 비롯됩니다. 말하자면 출발지와 도착지 모두가 한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분명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한 사람이 동시에 두 군데서 출발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의 경로에서 출발지와 도착지는 각각 하나여야만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위에서 바라본 자신입니다. 하나의 경로라는 것은 과거를 내려다볼 때, 즉 과거의 모든 부분이 이미 겪은 것이어서 단단하게 정의되어 있을 때 징검다리를 건너듯 각각의 정의를 인위적으로 편집할 때만 만들어집니다. 과거가 단단하게 정의되지 않고 출렁거리고 있다면 이러한 경로는 애초에 성립되지 않겠지요. 


하지만 과거는 원래 단단한 것이라기보다는 출렁거리는 것입니다. 과거는 현재로부터 매번 새로워집니다. 내가 지금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기억은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과 같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은 코끼리를 한 눈에 파악하는 것입니다. 이때 코끼리는 코끼리 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면 만지는 부위에 따라 코끼리는 전혀 다른 것이 됩니다. 나무도 되고 기둥도 되고 미끄럼틀도 됩니다. 과거라는 것은 이렇듯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눈을 감을 때 선명해지는 것입니다.


사루가 잊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괴로워하는 이유는 바로 자기 자신을 하나의 경로로 파악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스스로를 정의하는 것이 그에겐 구속이 된 셈이지요. 사루는 눈을 감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수가 진정한 아들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사루가 자신이 낳은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에 눈을 감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사루는 엄마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어느 것이 진정한 나인가 눈을 부릅뜨고 찾으려 했던 것입니다. 덕분에 낳아준 엄마도 길러준 엄마도 모두 엄마이며 나의 일부라는 사실을 놓치고 말았던 것이죠.


입양한 아이를 키우는 게 이렇게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지 묻는 사루에게 수는 그것은 힘들고 안 힘들고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그 길뿐이었다고 말합니다. 어린 시절 갈색 피부의 아이에게서 난생 처음 느낀 편안함이 자신을 그 길로 이끌었고, 그 길을 가기 위해 수는 나머지 모든 것에 눈을 감은 것이지요. 말하자면 눈을 부릅뜨고 밤을 새면서 길을 찾으려 했음에도 끊임없이 헤매기만 했던 사루와 달리 수는 눈을 감았기 때문에 비로소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찾아올 수 있었던 셈입니다. 눈을 뜨고 나를 찾을 때 나는 사라지고 눈을 감고 나를 잊어버릴 때 나에게로 향하는 길을 찾을 수 있다는 역설이야말로 이 모자의 고통스럽고 감동적인 여정이 보여주는 메시지가 아닐까 합니다.


캘커타에 홀로 남겨진 사루가 필사적으로 찾은 것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곧 엄마와 형을 찾는 일이었지요. 요컨대 잃어버린 나를 회복하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찾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영화의 말미에 밝혀지지만 자신의 진짜 이름이라고 생각했던 사루는 사실 사루가 아니라 셰루였지요. 우리가 자기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어쩌면 아무 의미도 없는 텅 빈 발음일지도 모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자신의 소중한 것으로 향하는 길을 떠날 때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진짜 이름을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숨겨져 있는 ‘사자’를 말입니다.


2023년 3월 12일부터 2023년 3월 1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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