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시 Apr 05. 2023

영화 이야기 <자산어보>

이 영화는 정약전의 <자산어보> 서문을 보고 만들었습니다. <자산어보> 서문에 보면 흑산이라는 이름이 두려워 자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 <자산어보>는 흑백영화입니다. 요컨대 검은색이 두렵다는 말을 가지고 검은색 영화를 찍은 셈입니다. 


이 영화를 흑백으로 찍은 이유는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시대의 색입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흑산도는 당시 조선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유배지입니다. 중앙에서 가장 먼 곳에서도 백성을 수탈하는 관리의 악행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서울에 가까워질수록 그 정도는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겠지요. 영화 후반부에 나주로 향한 창대(변요한)이 지방관리로 일하면서 목격한 참상은 그야말로 목불인견입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흑백은 다른 의미에 앞서 암흑시대를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소수의 가진 자만이 잘 살고 다수의 착취당하는 자는 죽지 못해 사는 시대는 분명 아무리 햇살이 눈부셔도 컬러풀하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요.


다음으로는 가치관의 반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흑백은 세상을 흑과 백이라는 두 가지 색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정약전이 살았던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두 가지 사상은 성리학과 실학입니다. 성리학은 입신양명을 수단으로 하여 위로는 임금을 모시고 아래로는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인간이 이룩해야 할 목표로 설정하는 학문입니다. 국가를 경영하는 방침을 적어두었으니 정치학이라고 할 수 있고 사람의 도리를 적어두었으니 윤리학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바람직한 인간 사회의 모습을 그렸으니 사회학이라고도 할 수 있고 사람의 풍속과 세태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 민속학에도 해당됩니다. 나아가 인간이 살아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에 최고의 자기계발서라고도 할 수 있지요.


다시 말하면 한 국가의 정치, 사회, 윤리, 민속, 개인을 규정하는 준거의 틀이 단 하나의 학문에 종속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리학으로 모든 말을 할 수 있고 반대로 성리학이 아닌 것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가치라는 것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마천의 <사기> 중 맹상군 열전에 보면 개 짖는 소리와 닭 울음 소리를 내는 식객이 맹상군의 목숨을 살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요컨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다고 여겨지는 가치도 상황에 따라 필요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위험한 것은 하나의 가치가 나머지 다른 가치를 삼켜버리는 것입니다. 내용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내용으로 보잘 것 없는 다양성을 짓밟는 것을 일러 파시즘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나 아렌트는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자는 그 유토피아의 독재자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다만 히틀러 시대에 파시즘이 독일을 빛으로 이끄는 사상으로 간주되었던 것처럼 조선 후기에도 성리학은 인간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국가를 번영시키는 빛으로 여겨집니다. 요컨대 흑백에서 성리학의 자리는 백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지요. 이것은 나주 관아에 들어간 창대의 의복이 깨끗하고 하얀 도포로 바뀐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성리학이 백이라면 흑에 해당하는 것은 실학입니다. 실사구시를 기치로 내건 실학의 표면적인 입장은 실용성의 추구입니다. 요컨대 성리학적 가치관이 실제 사람의 생활을 어렵고 둔하게 만듦으로써 농업과 공업, 상업 같은 사회의 물질적 발전을 방해하고 있으니 불필요한 형식을 걷어내고 생활을 개선하자는 것이 실학의 주장이지요. 


이것은 얼핏 형식과 내용의 차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성리학을 사상으로 삼고 실학을 방법으로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 가령 성리학이 목적지라면 실학은 네이게이션이 되면 되지 않을까 하고요. 왜냐하면 성리학의 이상이 결코 타락하거나 나쁜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약전(설경구)이 “서양 사람들은 이 땅이 둥글다는 것을 알면서도 천주님을 믿는다”고 했던 것처럼요.


하지만 성리학이든 실학이든 하나의 학문은 사상이자 곧 형식입니다. 가령 머리는 성리학적으로 생각하면서 몸은 실학적으로 움직이는 인간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인간은 모든 행동의 근거를 생각에 두고 있습니다. 매일 청소를 하는 습관은 청결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만 가능한 것처럼요. 따라서 실용적인 방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뇌를 실용적인 생각을 해야 합니다. 즉 실학적인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성리학적 사고를 배척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성리학과 실학은 여러 가지 다른 점을 가지고 있지만 아마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차이점은 바로 역할의 구분일 것입니다. 사농공상과 반상 그리고 남녀의 법도 등 성리학에는 성별과 신분, 직업에 따른 할 일과 각자가 추구해야 하는 인간상이 별도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혼자 살면서 장사하는 양인 여자나 농사 짓는 양반 남자는 안 된다는 식이지요. 하지만 실제로는 농사 짓는 양반도 있었고 장사하는 여자도 있었습니다. 가산이 적고 벼슬을 하지도 못한 양반은 직접 농사를 짓거나 일을 할 수밖에 없었고 여자 중에도 김만덕 같은 인물처럼 상업에 종사하는 인물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을 포함하면 훨씬 많겠지요.


생존 본능은 제도나 관념보다 힘이 셉니다. 살기 위해서라면 인간은 얼마든지 사상을 배신할 수 있습니다. 실학은 천주교를 포함한 서양인들의 등장으로 조선에 유입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어떤 학문이나 관념도 기반 없이는 절대 자랄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인한 꽃의 씨앗이라도 시멘트 위에서는 자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실학이 성리학을 위협하는 학문으로 세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이미 조선 사회에 존재하고 있었던 이러한 ‘역할을 뛰어넘는 생존 방식’이 만연했기 때문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당시 사회는 아무리봐도 공정함과는 거리가 있는 사회입니다. 한 사회의 가치관은 언제나 지배 세력의 가치관입니다. 자기계발서에 심심찮게 나오는 증언이 모두 성공한 사람의 증언인 것과 같지요. 사람들이 지배 세력의 가치관을 따르는 것은 그것이 생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준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가치관이 사람을 굶기고 학대하면서 죽음으로 몰아간다면 아무도 그런 가치관을 따르려 하지 않겠지요. 그리고 따르는 가치관이 변한다는 것은 곧 따르는 지배 세력이 전복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정약전과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이 탄압받았던 이유는 물밑에서 일어나고 있던 성리학적 전복의 흐름, 즉 역할을 뛰어넘는 새로운 질서를 실학을 통해 수면 위로 끌어올렸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기득권층에게 환한 빛을 주던 성리학의 세계에 느닷없이 뛰어든 거대한 물고기와 같습니다. 물고기는 바닷 속 깊은 어둠으로부터 솟구친 것입니다. 이 어둠은 기득권층에게는 어둠이지만 흑산도에 사는 백성에게는 삶의 터전이라는 점에서 빛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조선 후기 사회 지배층과 피지배층은 서로가 같은 빛과 같은 어둠을 공유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성리학이라고 하는 단일한 가치관을 공유하면서도 서로의 빛과 어둠이 달랐다는 것은 이 단일한 가치관이라는 것이 그야말로 허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영화 <자산어보>는 이렇듯 분열된 사회를 공간을 통해 보여줍니다. 영화 속에 나오는 공간은 세 가지입니다. 육지와 바다 그리고 섬. 육지는 성리학을 이념으로 삼은 지배층의 공간입니다. 바다는 백성의 터전이지요. 섬은 육지이면서 동시에 바다이기도 합니다. 흑산이라는 이름은 어둠이라는 하강과 산이라는 상승의 성질을 함께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은 성리학적 질서가 지배하는 곳이면서 동시에 질서 너머 백성의 자유로운 생활이 공존하는 곳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 속에서 흑산도의 세태는 전혀 이질감이 없습니다. 서울 관아에서 천주교도의 목이 달아나고 나주 관아에서 아전이 백성들을 착취하는 것과는 매우 상이하지요. 육지에서 성리학이라는 백은 백성의 삶을 흑으로 만듭니다. 성리학적 질서가 더욱 하얗게 빛날수록 백성들은 눈물로 피로 검게 얼룩집니다. 하지만 섬에서는 한낱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조차 사학 죄인이라는 말을 쓰면서도 그 사학 죄인을 자신들의 틀 안으로 받아들이는데 거부감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곳의 삶이 생활과 가까이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육지에서의 생활, 즉 지배층의 생활은 글자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어디서 오는지 모릅니다. 그들이 아는 것은 단지 빼앗는 방법뿐입니다. 성리학이라는 관념과 그 관념을 풀어쓴 책들의 언어가 곧 그들의 생활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이성세계 속에 사는 자들입니다.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언어로만 말할 뿐 몸으로 구할 줄을 모릅니다. 요컨대 그들은 생명의 원천인 바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섬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들은 생활이란 글자가 아니라 바다 속에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고기를 잡고 조개를 건지고 전복을 캐는 것이 삶임을 알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육지와 달리 섬 사람들은 관념이란 생활 위에서야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체화하고 있습니다. 관념이 허공에 떠있는 성채라고 생각하는 육지의 지배층과는 대조적이지요. 이것은 섬사람들이 육지 사람들과는 다르게 모두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 육지 사람들이 쌀에 모래를 넣어서 먹을 수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과 달리 섬사람들은 바닷속에서 먹을 것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물론 섬에도 별감을 위시한 관아가 있지만 그들은 섬 전체로 보면 오히려 소외되어 있습니다.


정약전이 흑산도로 유배 온 이후 배우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생활 위의 관념 혹은 관념이라는 상부구조를 지탱하고 있는 생활이라는 하부구조입니다. 사대부 집안에서 자라나 병조좌랑까지 지낸 그는 말할 것도 없이 육지에 속하는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성리학이라는 백의 성채를 떠나 생활이라는 흑의 심연으로 들어가는 것은 성리학의 시선에서 흑으로 보였던, 저 질서를 위협하는 검은 심연이 사실은 모든 생명을 잉태하고 기르는 원천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것은 흑산도로 온 이후 갑자기 생각이 바뀌어서가 아닙니다. 정약전이 천주교로 개종하고 실학을 공부한 이유는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보다 나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정약전이 창대에게 말하는 위도 없고 아래도 없는 평등 사상은 천주교의 하나님 아래 모든 이가 평등하다는 사상에서 기인합니다. 이것은 종교나 정치적 이념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신분 차별 없는 문화가 인간의 생활에 유리하다는 실용적인 생각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성리학의 신분제나 사농공상에 따른 구분 역시 처음에는 그것이 인간의 생활에 보다 이롭다는 판단 아래 제창되었을 것입니다. 모든 학문과 이상은 인간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한 목적으로 태어납니다. 성리학적이라고 다를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성리학이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고 생활을 발전시키는 본래의 목적을 상실한 채 단지 지배층의 착취 도구로 이용되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그러한 구분들이 방해가 되는 것뿐입니다. 다시 말해 정약전이 평등 사상을 주창하는 이유는 그것이 본래 옳은 것이라서가 아니라 평등하지 않도록 구분해놓은 당금의 지배관념이 생활을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실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실용성이라는 것은 방법의 이야기입니다. 성리학에도 방법이 있습니다. 단지 그 방법이 처음 만들어질 때와 다르게 비효율적인 것으로 변하고 말았을 뿐입니다. 실학에서 말하는 실용이라는 것은 생활의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신을 믿는 천주교와 관념을 허학이라고 부르며 실재를 탐구하는 실학이 교집합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두 가지가 모두 생활의 개선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정약전의 생각은 일종의 변증법과 같습니다. 성리학이 백성의 삶과 대척될 때 그것은 같은 것이 아니라 반대되는 것, 즉 정(성리학)과 반(생활)로 유리됩니다. 이때 정도 아니고 반도 아닌 새로운 ‘합(실학)’이 등장하는 것이지요. 영화 속에서 정약전이 말한 “벗을 깊이 알면 내가 더 깊어진다”는 말 역시 결국 기존의 나라는 정과 기존의 나를 막아서는 반이 부딪힐 때 새로운 나라는 합이 나타난다는 말과 같습니다. 요컨대 생활을 막아서는 것이 있으면 생활은 변화한다는 것. 정약전이 병조좌랑을 지낸 대표적인 지배층임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를 믿고 실학을 공부하며 어보를 쓰는 것은 성리학을 통해 생의 타락은 바로 변화하지 않을 때 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변증법이란 곧 변화를 뜻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정약전이 다가가고자 했던 그 생활이라는 것은 곧 변화 그 자체인 것입니다.


모든 변화는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정약전이 “음험하고 죽은 검은 흑산에서 그윽하고 살아있는 검은 자산”을 발견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그 스스로가 변화했기 때문이지요. 창대가 이상을 꺾이고 귀향하는 길에서 흑산이 아닌 자산을 발견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입신양명이라는 성리학의 정을 가지고 있던 창대는 아전의 횡포와 백성의 고난이라는 반을 만나 부서지고 새로운 합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창대는 지고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아전을 죽일 뻔했던 그의 분노는 그를 감옥에 가두고 파직하게 만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육지라는 빛 속에서 어둠에 묻힐 뻔했던 ‘인간’을 발견하게 해주었으니까요.


유배는 정약전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지위와 가족 그리고 명예와 신까지.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자산어보>를 쓰면서 그는 자기가 잃었던 것들을 다시 회복해간다는 것입니다. 아내를 맞았고 아이가 생겼으며 창대라는 제자이자 벗이 생김으로써 잃었던 호기심을 회복하여 다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지구가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공전과 자전을 하고 있는 것처럼 어디론가 추락했다고 생각했던 삶 역시 사실은 그저 어느 곳을 돌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게 돌다보면 늘 똑같이 보였던 것도 어느새 뒷면을 바라보게 되고 두려움의 뒤안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즉 같은 자리처럼 보여도 사실은 매순간 새로운 자리를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삶은 유전합니다. 마치 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는 것처럼요. 



2023년 3월 18일부터 2023년 3월 20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영화 이야기 <라이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