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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Apr 09. 2023

영화 이야기 <바그다드 카페>

어느 사회나 주류 집단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사회의 선두에 서서 사회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수는 매우 적습니다. 전체 인구에 비하면 한 줌도 안 되는 사람들이 신문과 TV에 나오며 언론의 플래쉬 세례를 받습니다. 그들의 말은 정언이 되고 생각은 통념이 되며 그들 자신은 수많은 사람들의 모델이 됩니다. 마치 라스베가스와 비슷합니다. 라스베가스는 사막 한가운데 있지만 사막의 모든 반짝임을 모은 것보다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하지요.


라스베가스를 주류라고 한다면 사막은 비주류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영화 <바그다드 카페>는 비주류로 만든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렇습니다. 남자가 아니라 여자, 백인이 아닌 흑인, 청년 대신 노인, 화이트 칼라가 아닌 블루 칼라, 자가 대신 천막, 앵글로 색슨이 아닌 인디언. 요컨대 이 영화는 라스베가스가 아니라 사막에 대해 말하는 영화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사막의 오아시스(카페)에 대해 말하는 영화지요.


단 하나의 주류도 없이 오직 비주류로만 영화를 채운 이유는 아마도 이 영화가 라스베가스가 아니라 사막에서의 삶도 가능한가 라고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주류 집단에 꼭 들지 않아도 인생은 보람있고 즐거운 것이 될 수 있는가 라고 질문하는 셈이지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렇습니다. 다만 축제를 보여주면서 삶은 즐거운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친다면 별로 설득력 있는 대답이 되지 못합니다. 중요한 건 어떻게 축제를 만드는가입니다. 영화 <바그다드 카페>가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축제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야스민(마리안느 세이지브레트)은 남편과 싸운 후 사막을 걸어 바그다드 카페에 도착합니다. 남편의 자동차나 그녀의 복장으로 보아 그녀는 분명 주류에 속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남편을 떠나는 순간부터 그녀는 차도 없이 사막을 걷는 방랑자로 전락하고 맙니다. 먼지투성이 방에서 잠을 자고 흑인과 노인, 사생아, 인디언이 가득한 카페에서조차 외톨이 취급을 받으며 심지어 카페 주인 브렌다(CCH 파운더)는 수상하다는 생각에 경찰까지 부르게 되지요. 이른바 야스민이 주류 집단의 일원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남편 덕분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야스민이 남편과 다투고 홀로 사막을 걷기 시작한 것은 기존의 사회적 지위를 상실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홀로 걷기’를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홀로 걷는 것이 좋은지 남의 차를 타고 가는 게 좋은지는 개인의 판단입니다만 분명한 것은 홀로 걸을 때 사람은 당장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야스민이 숙소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다름 아닌 성장을 벗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입고 있는 성장은 사막 한가운데를 걷기에는 너무나 덥고 불편하기 때문이지요. 


야스민의 성장은 그녀의 신분을 짐작하게 하는 기호입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그녀가 어느 집단에 속하는지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막에서 이런 옷은 움직임을 방해할 뿐더러 끝없이 땀을 흘리게 해서 수분을 고갈시킵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라스베가스에서는 꼭 필요할지 모르나 사막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옷부터 벗는 것이죠. 하지만 잠깐이라도 외출할 경우에는 다시 성장을 하는데 그것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그녀는 사막에 있지만 아직까지 자신을 라스베가스의 일원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이 사막의 사람이 아니라면, 라스베가스에서의 삶이 어울리는 사람이라면 야스민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바로 남편을 찾아 화해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 것은 영화의 첫 장면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둘 다 소변을 보는데 남편은 간이 화장실을 쓰고 야스민은 차에 몸을 숨긴 채 노상방뇨를 합니다. 불렀는데 오지 않으면 물건을 던지고 차 안에 연기가 자욱해서 시가를 못 피우게 하면 차를 간이화장실에 일부러 충돌시키는 등 자해까지 서슴지 않죠. 특히 여기서 차는 두 사람을 라스베가스로 실어줄 운송수단입니다. 안전하게 라스베가스로 가는 것도, 차를 함부로 부딪히는 것도, 가는 것도, 세우는 것도 모두 남편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두 사람의 생의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은 남편인 것입니다.


어쩌면 야스민은 사막이 아닌 라스베가스가 자신에게 더 어울리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것이 있죠. 그건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스스로 마련한 운송수단이 아니라 누군가의 차에 타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은 곧 자신의 운명을 운전대를 잡은 사람에게 의탁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야스민이 다시 남편을 찾아 화해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버리는 일과도 같지요. 인생을 여정에 비유할 때 모든 사람의 목적지는 자기 자신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버린다면 도착한 곳이 아무리 화려하고 멋진 곳일지언정 영원히 떠돌 수밖에 없지요.


따라서 야스민이 라스베가스 대신 사막으로의 여정을 택한 것은 목적지를 주류 집단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수정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사막을 걷는 고행은 그 동안 남의 차를 타고 가느라 알 수 없었던 진정한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 먼지투성이인 숙소에서 편하게 옷을 벗고 있는 모습이 성장 속에 숨겨져 있던 자기 자신의 해방이라면 잠깐의 외출에도 성장을 하는 모습은 낯선 세계에 대한 경계심인 셈입니다. 아무래도 그녀는 이제까지 주류 집단에 있었던 사람이니까 비주류 집단으로 들어오면 그것이 자신의 본질에 가까운 것이라고 해도 낯설음을 느낄 수밖에 없지요.


야스민이 느끼는 비주류 집단에 대한 경계는 위생으로 표현됩니다. 말하자면 바그다드 카페는 너무 더럽다는 거지요. 방은 먼지가 가득하고 사무실은 온갖 잡동사니가 굴러다니며 명색이 카페인데 커피 머신은 고장나 있습니다. 아마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바그다드 카페를 보는 순간 지저분하다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 지저분함은 관객뿐만 아니라 야스민에게도 ‘사실’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사실인가 하는 점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인스타그램을 하지 않습니다만 언제인가부터 인스타그램에 ‘감성 카페’라는 게시글이 올라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감성 카페’라는 곳이 깨끗하고 아기자기한 홀이 아니라 폐가나 혹은 무너진 고궁을 연상시키는 야외라는 겁니다. 돌이 부스러져 있고 곳곳에 녹이 슬고 잡초가 돋아난 곳에서 사람들이 커피나 술을 마시는 사진을 업로드합니다. 물론 이건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습니다. 어디서 커피나 술을 마시건 위법이 아니라면 그건 개인의 자유이지 남들이 뭐라고 평가할 거리가 아니지요. 다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그 누구도 거기서 위생적인 불결함에 대해 지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비위생적이거나 불결하다거나 지저분하다는 것은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오히려 ‘해석’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바그다드 카페나 감성 카페나 위생의 기준에서 본다면 둘 다 합격점을 받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감성 카페는 감성이나 낭만, 여유나 휴식의 공간이 되는 반면 바그다드 카페는 지저분하고 불결한 곳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말하자면 이 불결함은 위생을 기준으로 판단한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을 거꾸로 뒤집으면 야스민과 관객들이 느끼는 불결함 역시 ‘위생의 불결함’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 불결함은 다른 종류의 것입니다.


아카사카 노리오는 <누가 왕따를 만드는가>에서 이 ‘다른 종류의 불결함’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실제로 왕따를 당하는 아이가 불결한지 아닌지는 관련이 없다. 부스스한 머리에 자랄 대로 자란 손톱과 땟국이 좔좔 흐르는 손발, 청결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아이도 드물게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표적이 되는 아이는 청결년에서 지극히 평범하다…
…그때 쏟아지는 말, 다시 말해 모멸어는 의미하는 내용과 그 대상이 부합하지 않는다. 그들은 진짜 불결하기 때문에 더럽다, 냄새난다는 말을 듣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배제라고 하는 현실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주문과도 같은 것으로서, ‘더럽다’, ‘냄새난다’라는 모멸어가 생성되는 것이다…”

아카사카 노리오, <누가 왕따를 만드는가>


어떤 아이를 왕따시킬 때 가해자들이 종종 사용하는 방법은 그 아이를 더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위생은 반론의 여지가 없는 성역이고 그래서 더럽다는 것은 상대를 가까이하지 말아야 할 정당한 이유가 됩니다. 하지만 아카사카 노리오의 말처럼 이 더러움은 진짜 더러움이 아니라 배제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더럽다는 것은 배제를 위한 정당화의 도구이며, 이 도구는 목적이 정해진 후에 휘둘러집니다. 즉 더럽다는 시선은 그것이 얼마나 더러운가를 판단하기 이전에 결정됩니다. 그리고 일단 상대를 더러운 것으로 결정하고 나면 그 후에 상대에게서 더러운 것을 발견하기는 쉬운 일입니다. 우연히 먼지가 묻은 머리카락도 끝이 해진 치마도 어쩌다 입술에 묻은 침자국도 다 더러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상대를 더럽게 만드는 방법도 있습니다. 의자 밑에 상한 우유를 넣어둔다던가 하는 방식이 그렇습니다.


아카사카 노리오가 말한 배제의 현실은 영화 <바그다드 카페>에도 고스란히 적용됩니다. 방에서는 편하게 옷을 벗고 있던 야스민이 카페에서는 다시 성장을 하는 이유는 아직까지 자신을 라스베가스의 사람으로 여기기 때문이지요. 야스민은 남편과 헤어진 후 자신이 사막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자신과 같은 사막의 사람들인 흑인과 인디언, 노인과 사생아를 배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위생과 관련해 말하자면 야스민의 성장은 마치 위생복과 같습니다. 이 위생복은 그녀가 배제하고자 하는 대상과의 차이를 드러냄으로써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고 말합니다. 이로써 마치 결계처럼 성장을 입은 야스민과 카페 사람들 사이에 넘어갈 수 없는 경계가 생겨납니다. 야스민은 이 경계로 말미암아 카페의 비위생적이고 더러운 환경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지만 동시에 고립됩니다. 경계라는 것은 언제나 상대적인 것입니다. 야스민의 눈에 카페 사람들이 비위생적인 사람들이라면 반대로 카페 사람들의 눈에 야스민은 혼자 사막을 걷는 이상한 여자입니다. 배제의 원리가 적용되는 것은 카페 사람들만이 아니지요. 브렌다가 경찰을 부르는 것은 야스민의 성장과 동일한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상대를 배제하는 방법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야스민이 성장을 벗고 카페를 청소하는 모습은 이른바 경계를 허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 안의 먼지를 털어내고 카페의 사물실을 단정하게 정리하는 것은 비위생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위생적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더러움은 실제 더러움 이전에 생겨납니다. 이 더러움이 배제의 울타리라고 한다면 야스민이 직접 카페를 청소하는 것은 배제의 울타리를 허물어 뜨리는 일입니다. 요컨대 더럽다고 생각했던 대상을 깨끗하게 만듦으로써 더럽다고 배제했던 대상의 말끔한 모습, 즉 본질을 보려고 하는 것이지요.


한편으로 이것은 야스민이 라스베가스의 사람이라는 자신의 기존 정체성을 깔끔하게 포기하고 자신의 소속을 사막의 카페로 인정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남편으로 말미암아 얻은 정체성들을 버리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기로 결심한 것이지요. 야스민이 가장 먼저 한 일이 청소라는 점은 그런 의미에서 유의미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이제까지 배제했던 대상들을 포용하는 일이며, 야스민이 이제까지 배제했던 대상 중에는 바로 자기 자신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즉 그녀의 청소는 타인의 본질을 보려는 시도인 동시에 자신의 본질 역시 불순물없이 보려는 시도인 것입니다.


카페를 청소한 후 야스민은 브렌다와 가까워지기 시작합니다. 청소라는 건 아무래도 떠날 사람이 아니라 머물 사람이 하는 행동이니까요. 터를 잡고 그곳에 자신을 내려놓을 마음을 한 사람만이 청소를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사를 오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청소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물론 이사 때문에 지저분해진 집을 청소하는 것이지만 그 속에는 이곳이 앞으로 내가 살 집이므로 나를 내려놓을 곳을 정돈한다는 마음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바그다드 카페의 일원이 된 야스민은 성장을 하고 있을 때는 상상하지 못했던 다양한 일들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모델과 마술입니다. 먼저 모델은 영화계에서 미술 작가로 일했던 루디(잭 팰런스)의 제안으로 시작됩니다. 모델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그림이든 패션이든 자신을 보여주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야스민이 처음 바그다드 카페에 왔을 때 두껍고 격식을 갖춘 옷을 입고 있던 것과 달리 모델을 하면서 그녀의 옷은 점점 얇아져 가고 나중에는 신체의 대부분을 노출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옷이 상징하는 정체성 속에 포박되어 있었던 그녀의 영혼이 천천히 두꺼운 옷들을 벗고 자유로워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컨대 격식과 지위라는 사회적 시선에 속박되어 있는 야스민은 점차 얇은 옷을 입으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은 옷이 만든 정체성이 아니라 순수한 즐거움입니다. 사람은 즐거울 때 자기 자신을 잊고 무아지경에 빠져듭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런 무아지경이야말로 가장 자기 자신에 가까운 것이라는 점입니다. 가령 야스민은 브렌다의 딸과 놀 때 옷을 이용한 간이 패션쇼를 합니다. 이때 옷은 원래 가지고 있던 무거운 정체성들을 벗어버리고 가벼운 놀이도구가 됩니다. 옷이 자신을 대신할 때 그 옷들은 의미를 갖고 무거워지며 자기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옷들이 필요하게 됩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의미를 다른 도구들에게 위탁하지 않고 스스로가 스스로로 충만할 때 상징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상징이 필요하지 않을 때, 즉 자기 자신만으로 충분할 때 우리는 그것을 자유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마술 같은 일입니다. 그런데 마술이라는 건 없던 것을 만들어내거나 어디서 가져오는 게 아닙니다. 마술은 원래 있던 것을 다시 보여주는 것입니다. 없어진 줄 알았던 것이나 사라졌다고 생각한 것들이 눈앞에 나타날 때 관객들은 감탄하고 함성을 지릅니다. 그것은 마치 정장을 입고 공연을 하는 브렌다와 야스민의 모습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원래 있었던 그녀들의 모습이었던 것과 같습니다. 지브리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OST인 <언제나 몇 번이라도>의 가사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바다 너머에서는 더 이상 찾지 않아. 빛나는 것은 언제나 내 안에서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영화 <바그다드 카페>가 하는 말도 같습니다. 바그다드 카페에서 일어나는 행복한 일상은 어느 날 누군가로부터 배달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만든 것이며 그들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주류와 비주류라는 경계를 만들어내는 숱한 의미들을 무화시키는 영화입니다. 벤츠를 타지 않아도 라스베가스에 가지 않아도 삶은 즐겁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것. 집이 없다고 영원히 떠돌아야 하는 것은 아니며 꼭 돈을 벌기 위해서만 일을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메마른 라스베가스보다는 사막의 오아시스가 살기 좋은 것처럼 모두에게 화려해 보이는 삶이 가장 좋은 삶일 리 없고 세상에서 가장 팍팍해 보이는 곳에도 달고 시원한 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자신이 머무를 곳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곳을 늘 반짝거리게 청소하며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하는 일을 찾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까 를 생각할 때 나는 나와 멀어집니다. 나를 즐겁게 하는 일을 찾는다면 나는 새로운 나를 발견할 것이고 그것은 아마 마술 같은 일이 되겠지요. 무라카미 하루키도 말했습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것은 즐거운 것이라고요.



2023년 3월 27일부터 2023년 4월 4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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