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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Apr 12. 2023

영화 이야기 <데몰리션>

영화가 시작되면 쇼팽의 녹턴이 흐르고 두 남녀가 차를 타고 도시를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남자(제이크 질렌할)는 전화를 받고 있고 여자(헤더 린드)는 냉장고에 물이 새는 걸 몰랐냐며 투덜거립니다. 그리고 갑자기 사고가 나고 장소는 도로에서 병원으로 체인지됩니다. 아내의 아버지 그러니까 장인(크리스 쿠퍼)이 다가와 말합니다. “죽었어.” 남자는 신발에 묻은 피를 닦은 후 자판기로 가서 초콜릿을 뽑습니다. 그런데 초콜릿이 걸려서 나오지 않습니다. 병원 카운터에 항의하자 가끔 그럴 때가 있고 자판기는 자판기 회사 것이지 병원 게 아니라서 우리는 손을 댈 수도 없고 손 댈 책임도 없다고 말합니다. 남자는 초콜릿을 포기하고 자판기 사진을 찍습니다.


여자의 장례식날입니다. 아내라고 불렀던 여자가 땅 밑으로 들어가는 순간에도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울고 있는 장모(폴리 드래퍼)를 마주한 순간에도 남자의 표정은 덤덤합니다. 장례식연 중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남자는 슬픈 표정을 지어보고 눈물을 흘려보려고 하지만 슬프지도 않고 눈물이 나오지도 않습니다. 남자는 펜을 들어 편지를 쓰기 시작합니다. 아내에게 쓰는 편지가 아니라 자판기 회사에 쓰는 편지입니다. 편지를 쓰는 이유는 아내가 죽은 날 자판기에 초콜릿이 걸려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만 적는 게 아닙니다. 남자는 느닷없이 자기 이야기를 편지에 쓰기 시작합니다. 아내와 어떻게 만났고 결혼생활은 어땠으며 장인과 사이는 어떤지, 가뜩이나 팍팍한 고객센터 직원의 일과를 더욱 팍팍하게 만들 것 같은 내용들입니다. 여기까지가 영화 <데몰리션>의 도입부입니다.


겨우 10분 남짓한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충격적인 일도 있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가장 의아한 것은 왜 이 남자는 전혀 슬픔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것이고 다음으로 의아한 것은 왜 자판기 회사에 편지를 쓰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의문을 두고 지칭의 편의를 위해 전자를 ‘무감정’, 후자를 ‘자판기 편지’라고 하겠습니다.


무감정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남자는 왜 아내가 죽었는데도 아무런 감정 변화가 없는가.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첫째, 아내와 매우 사이가 좋지 않은 사이였다. 이것은 냉장고가 고장난 지 2주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남자는 장인의 회사에서 후계자로 일합니다. 장인의 회사를 물려받기 위해 억지로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아내가 죽기 전 차에서 마지막으로 한 말은 “내 거 아니다, 내 문제 아니다, 이거지?”였습니다. 역시 두 사람의 삭막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두 번째는 사고로 인해 남자가 뇌의 어느 부분을 다쳤다는 가정입니다. 죽은 아내는 운전석에 있었고 그는 조수석에 있었습니다. 운전자가 사망할 정도로 심한 교통 사고라면 조수석에 앉은 사람도 그에 걸맞는 부상을 입는 것이 상식적입니다. 그런데 피가 몇 방울 튄 것 말고 남자는 겉으로 보기에 멀쩡합니다. 심지어 하루 입원하지도 않았습니다.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질 몸이 외상을 커버했다고 치더라도 분명 내상을 입었으리라고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사고가 났을 때 머리를 심하게 부딪쳤고 그로 인해 감정을 조절하는 미세한 신경이 손상을 입었다 라고 생각하면 좀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납득은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어쩌면 가장 그럴듯한 설명일지도 모르는데 아내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남자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 조금 전까지 말을 나누고 있던 아내가 눈을 떠보니 죽었고 이 세상에 더 이상 없다고 한다면 과연 누가 그 상황을 바로 납득할 수 있을까요. 자판기에서 초콜릿을 뽑는 것도, 초콜릿이 나오지 않았다고 자판기 회사에 편지를 쓰는 것도 이런 상태에서라면 이해가 됩니다. 흔히 말하는 상식적인 행동이라는 건 상식을 받아들였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즉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당연히 현실적인 행동도 불가능한 것이지요.


아직 영화의 도입부이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이 정답인지 혹은 제 4의 답이 나올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가능성은 이 정도로 추려두고 두 번째 숙제인 자판기 편지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편지에 대해 말하려면 일단 편지를 쓰게 된 동기부터 보아야 할 텐데요. 남자가 편지를 쓰게 된 동기는 명확합니다. 자판기에 돈을 넣고 초콜릿을 뽑았는데 초콜릿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이 장면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입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어머니가 죽은 다음 날 여자친구와 수영을 하러 가지요. 어머니가 죽은 다음 날 여자친구와 수영을 하는 것과 아내가 죽은 날 자판기에서 초콜릿을 뽑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심한가 라고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하지만 어느 쪽이든 상식 바깥의 행동임은 분명합니다. 다만 비상적이다 라고 해버리면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가 없으니까 이 비상식적인 행동을 조금 분석해 보려고 합니다. 


일단 남자가 자판기에서 초콜릿이 나오지 않아서 자판기 회사에 편지를 쓰는 것이 비상식적인 이유는 그것이 아내가 죽은 다음에 했던 행동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판기에서 초콜릿을 뽑았는데 나오지 않아서 항의를 하는 건 오히려 상식적인 행동에 속합니다. 단지 그것이 아내의 죽음이라는 비일상적인 사건 다음에 잇달아 일어났기 때문에 비일상적인 행동이 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과관계의 오류입니다. 가령 아내가 죽어서 슬픈 나머지 자판기를 부쉈다 라고 하면 별로 이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죽어서 자판기 초콜릿을 뽑았다가 되면 누가 봐도 이상합니다. 즉 여기서 아내가 죽었다 와 초콜릿을 뽑았다는 인과관계에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내가 죽었다 그래서 초콜릿을 뽑았다’가 아니라 ‘아내가 죽었다. 초콜릿을 뽑았다’로 읽어야 맞습니다.


인과관계의 부재는 각각의 사건이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별도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컨대 이 남자는 아내의 죽음에서 아무런 영향도 받지 못했다는 것이죠. 말하자면 아내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소와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자판기에서 초콜릿이 나오지 않아서 항의 편지를 쓰는 것 자체가 평소와 다름없는 행동이긴 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가 평소와 다르지 않는가. 여기에는 판단을 유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누가 봐도 이 남자가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아내의 죽음에 그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판기 회사에 보내는 편지의 내용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초콜릿이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자신의 삶과 아내의 죽음에 대해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말하자면 그는 분명 아내의 죽음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단지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을 뿐입니다.


아내가 죽었을 때 사람들이 생각하는 혹은 기대하는 행동이란 슬픔의 표출입니다. 그러나 남자가 아내의 죽음에서 받은 영향은 슬픔이 아니라 다른 무엇입니다. 그는 아내를 잃어버림으로써 슬픔이 아닌 다른 무엇을 받았고 그 다른 무엇으로 인해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것은 놀랍고 두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슬픔이라는 것은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래의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슬픔은 그 속으로 들어가서 충분히 울고 괴로워하는 시간을 겪게 함으로써 사람을 슬픔을 겪기 이전으로 안전하게 돌려보내주는, 말하자면 회복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남자는 아내의 죽음으로 슬픔에 들어가는 대신 전혀 다른 문으로 들어와 버렸습니다. 이 말은 그가 어쩌면 두 번 다시 원래의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즉 이 영화의 도입부, 아내의 죽음으로부터 자판기 편지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죽은 것은 아내만이 아니라고. 남자는 살아남은 게 아니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앞서 남자의 무감정을 설명하는 세 가지 가설 중에 가장 근접한 건 세 번째가 되겠군요. 너무 심한 충격을 받아서 현실을 인정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다만 이 문장에서 사용한 충격이라는 단어는 말하자면 슬픔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슬픔에 빠져서, 자기 자신의 감정에 매몰되어 버리는 바람에 자아와 현실 사이의 건강한 균형감각을 상실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버리면 이것은 정도의 문제가 됩니다. 즉 그냥 슬퍼서가 아니라 너무 슬퍼서, 지나치게 슬퍼서 자기가 슬픈 줄도 모르고 현실성을 잃어버렸다가 되는데 이건 제가 잠정적으로 찾은 결론과는 좀 다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남자가 슬픔이 아니라 다른 문으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슬픔으로 들어갔다면 깊숙히 들어갔든 좀 얕게 들어갔든 시간이 지나면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지만 이 남자가 들어간 문은 슬픔이 아니라 다른 것입니다. 여기에는 뭐가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돌아오는 길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들어가는 순간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는데 돌아보니 원래 문이 있던 자리에 벽만 보이더라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소 비슷해 보일 수는 있어도 이것은 분명 슬픔과는 다릅니다. 


그렇다면 남자가 열고 들어간 곳, 아니 자기가 원하지 않게 불쑥 떠밀려 들어간 곳은 대체 어디일까요. 장례식이 끝난 뒤부터 남자는 전반적으로는 원래 모습처럼 보이지만 시계의 시침이 분침을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아주 미세한 차이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처음 보인 차이점은 바로 면도입니다. 남자는 출근하기 전에 면도를 하려고 면도기를 들었다가 갑자기 내려놓습니다. 즉 잊어버린 게 아니라 안 한 것입니다.


남자의 기존 커리어나 라이프 스타일을 보면 자기 관리에 뛰어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기상하고 취침하며 항상 아침 운동을 합니다. 요컨대 자기 관리가 습관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습관이라는 것은 좋은 습관이든 나쁜 습관이든 일단 정해지고 나면 그것을 하지 않는데 상당한 저항을 받습니다. 남자의 경우로 본다면 면도를 하는 것이 안 하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잠깐 망설이고는 면도기를 내려놓았습니다. 이것은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동시에 확실한 부분입니다. 그의 라이프 스타일에 균열이 간 것입니다. 말하자면 단단한 자기 관리에 금이 생긴 것이죠. 그리고 대개 금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아주 작아도 금방 빠른 속도로 커지다가 마침내는 갈라져 버립니다.


면도를 하지 않은 것이 금이라면 달리는 기차를 느닷없이 세운 것은 파열이라고 해야겠지요. 요컨대 겉으로는 아직까지 예전의 남자와 큰 차이점을 느낄 수 없을지 몰라도 그의 영혼은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달라진 영혼을 가장 실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자판기 회사에 편지를 쓴다는 점입니다. 편지의 내용을 보면 이미 초콜릿 얘기는 온데간데없고 온통 자기 이야기들로만 가득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합니다. 다만 거기에는 상대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족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낯선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남자가 사람이 아니라 자판기 회사에 자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곧 그가 이 세상에 자기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느낀다면 그건 대체 어떤 기분일까요. 아마 남자는 이전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장인과도 말하고 직장 동료와도 말하고 때로는 잘 모르는 기차 승객과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없습니다. 진지한 이야기도 망상도 시시한 농담도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으로 남자가 슬픔 대신에 열고 들어온 문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남자는 슬픔이 아니라 고립으로 들어와 버린 것입니다. 이제 남자는 혼자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남자는 이 세상에 홀로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파가 붐비는 거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출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나 혼자 밖에 없으니까요. 바꿔 말하면 내가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게 해줄 사람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인이 딸 그러니까 자신의 아내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고 아내를 기념하기 위한 재단을 만드는 것은 남자에게는 아주 이상한 일입니다. 장인과 장모를 비롯한 사람들은 자꾸 이 세상에 없는 아내를 여전히 세상에 있는 사람처럼 대합니다.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고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재단을 만들어서 아내를 전시해두면 사람들이 아내를 기억하고 감사함으로써 아내가 영원히 살아있을 거라고 믿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남자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내는 이 세상에 없으니까요. 아내는 죽었습니다. 말하자면 남자만이 유일하게 이 세상에서 아내가 사라진 공간을 직시하고 있는 셈입니다. 장인과 장모 등은 아내가 사라진 공간을 아내의 기념품으로 덮어버렸습니다. 재단을 만들고 장학생을 선발하고 또 거기에 시간까지 퇴적되면 아내가 세상에 남겨둔 빈 자리는 점차 작아지다가 마침내 보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남자는 다릅니다. 어떤 기념품으로도 아내가 세상에 남긴 꼭 자기만큼의 빈 공간을 채울 수 없습니다. 남자는 마치 우주선에 난 구멍처럼 아내가 세상에 남긴 공간을 통해 자기를 둘러싼 세상이 우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구멍을 막으려고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남자는 구멍을 막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구멍은 이제 무슨 수로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내의 죽음으로 세상은 그에게 진공이 되었습니다. 그는 주변의 어떤 소리도 시선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세상으로 빨려 들어간 것입니다.


당연한 일이지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우주선에 구멍이 나면 안에 있던 모든 것은 기압 차로 인해 우주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빨려 들어가는 것 자체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여기에는 어떤 문제가 있다고 남자는 느낍니다. 요컨대 구멍으로 나가다가 갑자기 뭔가가 걸린 것입니다. 그게 뭔가 남자는 생각합니다. 생각한 끝에 아내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물이 새는 냉장고였다는 것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남자는 냉장고를 고치기로 결심합니다. 장인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뭔가가 고장났을 때는 완전히 분해한 다음에 다시 끼워맞추는 거라고. 냉장고를 완전히 분해했다가 다시 끼워맞춰서 정상으로 만들어 놓으면 그 다음에 할 일을 알 수 있을 거라고 남자는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분해하는 건 가능한데 다시 끼워맞추는 게 불가능합니다. 남자가 분해한 냉장고는 분해한 부품의 집합이 아니라 고철과 폐품의 쓰레기 더미가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런지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것은 남자와 남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차이점입니다. 가령 장례가 끝나고 장인 장모와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장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내는 요리에 빠져서 슬픔을 극복하고 있다고. 말하자면 아내의 어머니는 딸의 죽음으로 해체된 자신을 요리라는 설명서로 재조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딸의 죽음으로 생긴 슬픔은 이를 테면 장애와 같습니다. 이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분해했다가 재조립해야 한다는 게 장인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며칠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을 놔둡니다. 출근하지도 않고 낮에 술도 마시고 저녁 식사를 하면서 부질없이 딸과의 추억을 되새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스스로를 놓아버린 다음에는 다시 재조립하기 시작합니다. 장인의 경우에는 그게 사업이었을 것이고 장모의 경우에는 요리였을 따름입니다. 요컨대 장인과 장모는 각자의 설명서를 가지고 스스로를 재조립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른바 무사히 슬픔 속에서 자기 자신을 귀환시킨 것입니다. 하지만 남자는 안 됩니다.


냉장고만이 아니라 화장실의 문, 개인용 컴퓨터까지. 남자는 모든 것을 분해하지만 재조립하지는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재조립이라는 과정을 살펴봐야 합니다. 재조립이라는 건 이미 조립되어 있는 제품을 분해한 뒤 다시 조립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기존 제품을 분해했을 때 각각의 부품이 온전한 상태여야 합니다. 가령 분해하다가 뭔가가 깨지거나 부서지면 다시 조립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원래의 모습을 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실컷 애써서 분해했어도 원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하면 다시 조립하는 게 불가능하니까요.


즉 재조립을 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부품을 온전하게 분해할 것 그리고 원래의 모습을 기억할 것. 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둘 중 어느 하나만 충족되지 않아도 재조립은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남자는 둘 중 어디에 해당하는가. 결과적으로 말하면 둘 다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남자가 분해한 제품들을 보면 냉장고부터 개인용 컴퓨터까지 모두 분해된 게 아니라 파손된 것. 즉 데몰리션된 쪽에 가깝습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사람이 만든 것은 사람을 닮았다고. 이 말을 뒤집으면 사람이 해체한 것 역시 사람을 닮았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남자는 다른 사람들처럼 자기 자신을 온전히 분해하는 게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 분해는 조심스러운 해체가 아니라 격렬한 파괴 혹은 자기 자신의 철거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아내의 죽음으로 그는 이미 파손되어버린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심정을 토로하거나 혹은 어디론가 훌쩍 여행을 떠나는 등 나중에 다시 조립할 수 있게 스스로를 안전하게 해체하는 게 불가능해진 것이지요. 파손된 제품을 분해하면 파손된 조각이 나옵니다. 따라서 남자는 아무리 조심스럽게 해체하려고 해도 온전한 부품 대신 부서진 조각만 쌓이게 되는 것이지요.


원래의 모습을 기억하는 것 역시 남자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남자는 장례 직후 회사에 출근해서 일합니다. 그것은 아내가 죽기 전 그의 원래 모습이지요. 그러니까 남자도 알고는 있는 것입니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여기서 남자가 생각하는 원래의 모습이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아내가 죽기 전의 자기 자신입니다. 일반적인 경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장인이나 장모와 같습니다. 슬픔에 빠져서 자기 자신을 해체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해체된 자신을 재조립하여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이죠. 하지만 남자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 이상해 보이는 것은 중간에 자기 자신을 해체하는 과정 없이 마치 아내가 죽기 전과 다름없이 행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그는 고장이 났는데 수리과정 없이 고장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이 새는 냉장고처럼 말이죠.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남자가 냉장고든 다른 무엇이든 분해를 시도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어떤 고장이 생겼음을 자각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장이 났으니까 그것을 재조립하기 위해 일단 뭔가를 분해하는 시도를 하는 것이죠. 하지만 그 결과는 보는 것과 같이 모두 파괴로 끝나고 맙니다. 그는 아내의 죽음으로 슬픔이란 문 대신 고립이라는 문으로 들어와 버렸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하면 고립이란, 세상에 이야기할 사람도 들어줄 사람도 없다는 것이란 단순한 격리가 아니라 손대는 것마다 파괴하는, 그것이 자신이든 남이든 오로지 상처밖에 줄 수 없는 파괴적인 것이라는 뜻도 됩니다.


변화의 징후가 나타나는 것은 자판기 고객센터에서 새벽에 전화가 오면서부터입니다. 남자는 그의 말처럼 답장을 기대하고 편지를 쓴 게 아닙니다.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도 듣지 않는 곳에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그곳에서 느닷없이 피드백이 온 것입니다. 다만 이 피드백은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새벽 2시에 전화하고 대마초를 피우며 무엇보다도 자기 인생 이야기를 고객센터에 보내는 황당한 고객에게 연락할 생각을 한다면 아무리 좋게 봐도 스탠다드한 인물이라고는 할 수 없죠.


그러나 중요한 점은 여자(나오미 왓츠)가 어떤 인물인지가 아닙니다. 여자가 대마초를 피우든지 이혼하고 아들(유다 르위스)을 키우고 있든지 간에 남자에게는 아내의 죽음 이후 최초로 생긴 리스너인 것입니다. 남자는 아내의 죽음 이후 세상에 자기 말을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여겨서 자판기 고객센터에 일기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원래 이 말들은 아내가 있었다면 아내에게 했을 말들인 것이지요. 그가 하는 말 중에 아내의 죽음에 대해 비통해 하는 표현들은 없습니다. 장인이나 장모 혹은 다른 사람들의 말이 온통 비통한 표현으로 가득 찬 것과 대조적이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 혹은 서로에게 말하지만 남자는 정말로 아내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하는 말은 사실 사랑한다거나 네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거나 하는 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것과는 전혀 무관한 아주 사소한 이야기들입니다. 오늘 회사에서 팀장이 뭐라고 하더라 혹은 점심에 뭘 먹었는데 별로였더라 아니면 좋았더라. 뭐 이런 시시콜콜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시시콜콜한 것들을 말하는 게 제일 어렵습니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라면 누구에게 말해도 오히려 별로 부담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중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시콜콜한 이야기라면 상대가 들었을 때 뭐 어쩌란 거야 라고 반응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까 시시콜콜한 이야기야말로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이야기인 것입니다.


남자는 여자와 여자의 아들을 만난 이후 거의 매일 같이 함께 지내게 됩니다. 그게 누구든 자기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나 함께 있고 싶은 법입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라는 건 별로 특별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팀장이 뭐라했다거나 점심이 별로였다는 얘기는 아마 회사를 다니고 점심을 먹는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얘기일테니까요. 단지 자신에게만 특별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남들에겐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특별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곧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나를 특별하게 대해준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평범합니다. 그리고 특별하기 대해주길 원합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남자가 새롭게 시작하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철거 작업입니다. 작업복과 작업화를 산 다음 남자는 철거 현장에 가서 매일, 그것도 어떤 때는 돈을 주고 일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뭔가를 때려부수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도 남의 집으로 모자라 나중에 멀쩡한 자기 집까지 트랙터까지 동원해서 박살내기 시작하지요.


남자가 최초로 뭔가를 분해한 것은 그것을 분해한 다음 재조립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막상 분해해보니 자기가 분해한 모든 것들은 두 번 다시 재조립할 수 없는 것들이라는 사실만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를 분해하려는 노력은 곧 자기 자신을 분해하려는 노력이며, 뭔가를 재조립하려는 의지는 곧 스스로를 회복하려는 의지와 같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지요. 그래서 이제 남자는 더 이상 재조립에 대한 의지가 없습니다. 남은 것은 오직 순수한 파괴뿐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남자가 대마초를 피우며 성 정체성 곤란을 겪는 아들을 키우는 여자와 함께 한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자학에 가까운 일이기도 합니다. 원래 남자는 자기 관리에 뛰어난 사람이었고 경제적으로 부유했으며 미래가 보장된 사회 상류층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완전히 파괴시키기로 마음먹었다면 세상 누구와 어울려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마약 중독자는 오히려 탁월한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죽음에 가까운 인물이니까요. 이것은 남자가 권총에 실탄을 장착해서 아이에게 들려주는 장면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아무리 방탄 조끼를 입었다고 해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별 이유도 없이 실탄을 쏘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에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면 자기도 자기지만 방아쇠를 당긴 아이는 범죄자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아이에게 실탄을 장착한 권총을 주고 쏘라고 하는 것은 그가 이 가정에 들어온 것이 반드시 윤리적인 이유만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관계는 하나의 사건으로 완전히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남자와 여자가 아내의 장학재단의 수여식에 참석한 밤에 아이는 폭행을 당해 병원에 입원합니다. 남자는 병실 밖에서 여자가 아들에게 하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이 말은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아래에 적어보았습니다.


“다신 누가 널 때리게 놔두지 않을 거야.” 
“나도 널 아프게 하지 않을 거고.”
“난 네가 숨김없이 당당하길 바래. 엄마가 더 잘할게. 약속해.” 
“깨어나면 아주 혼날 줄 알아.” 
“고맙다.”


이 말들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다름 아닌 남자가 죽은 아내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들을 한 문장씩 바꾸면 이렇습니다. “다신 누가 널 때리게 놔두지 않을 거야.”라는 말은 “다신 네가 사고가 나도록 놔두지 않을 거야.”가 됩니다. 그리고 “나도 널 아프게 하지 않을 거고.”는 그 동안 무심했던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는 말이 되겠지요. “난 네가 숨김없이 당당하길 바래. 엄마가 더 잘할게. 약속해.”는 바로 그 전날 장모를 통해 알게 된 아내의 비밀과 대응하는 말입니다. 


남자는 집을 부수다가 우연히 아내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정확하게는 아내가 임신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죠. 장모는 남자에게 아내에게 다른 남자가 있었으며 그 애는 그 남자의 아이였기 때문에 지웠다고 말합니다. 이 말이 사실인지 아니면 딸의 장학재단 수여식에 다른 여자를 데리고 온 사위에 대한 분노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그것이 설령 사실이라도 할 지라도 여자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난 네가 무엇이어도 상관없어. 내가 더 잘할게. 약속해.”라고요. 그러나 이제 그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 증명해줄 아내는 세상에 없고 그가 하고 싶은 말도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돌아오면 아주 혼날 줄 알아”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의 아들과 달리 끝내 돌아오지 못한 아내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은 “고맙다”가 아니라 “미안해”였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자가 아내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자판기에서 초콜릿을 뽑고, 비록 육체적인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지만 곧바로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은 어쩌면 아내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내가 죽음으로써 남자의 세상에는 구멍이 났고 그는 우주로 빨려들어가 미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남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내로 인해 갑자기 세상을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말하자면 아내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남자가 아내의 죽음으로 인해 들어간 문은 고립이 아니라 바로 아내에 대한 원망이었던 셈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기를 두고 죽어버린 아내를 원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원망했기 때문에 죽음에 무관심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다른 여자를 만나기도 하고 엉뚱한 일에 정신을 팔기도 했지만 죽을 뻔했던 아들이 간신히 살아남으로써 여자가 했던 “고맙다”는 말에서, 자동차 사고를 낸 운전자가 아내의 무덤에 찾아와서 했던 “죄송합니다”라는 말에서 비로소 남자는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바로 자신이 아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차와 집 곳곳에 붙여져 있던 자신을 돌아봐 달라는 아내의 외침에 얼마나 무심했는지를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깨닫는 순간 남자는 비로소 잘못 들어왔던 문을 벗어나 슬픔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때론 사랑을 표현하는 기준은 내가 너에게 얼마나 실망할 수 있는가가 되기도 합니다. 별로 관심없는 사람에게는 애초에 실망할 일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역설적인 표현일뿐 솔직한 것은 아닙니다. 남자가 아내를 원망한 것은 분명 사랑에 대한 반증이지만 한편으로는 상대의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마음만을 우선적으로 고려한, 당신이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냐는 이기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 이기적인 모습은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의 사람들까지 많은 상처를 입혔지요. 바꿔 말하면 그 동안 남자가 파괴하려고 했던 것은 다름 아닌 그 이기적인 자기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뭔가가 고장났을 때는 제품을 분해해서 다시 조립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조립한 것은 멀쩡히 돌아가더라도 이전과 같은 제품 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완전히 새로운 것이 되기를 원한다면 분해가 아니라 파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컨대 재조립이 아니라 재개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화의 말미에 여자의 아들은 건물 철거 현장에 남자를 초대합니다. 깨끗이 무너진 건물을 보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것은 이제 그 자리에 잔해를 치우고 새로운 건물을 짓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아내의 죽음 이후에 아내에게 무심했던 이기적인 자신을 자기 손으로 무너뜨렸습니다. 요컨대 스스로를 데몰리션한 것입니다. 깨끗이 부서지고 나면 새로 시작할 일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남자는 이제 다시 웃고 다시 걷고 마침내 다시 달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새롭게 만들어갈 자기 자신을 향해서요.



2023년 4월 4일부터 2023년 4월 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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