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시 Apr 16. 2023

영화 이야기 <마션>

이 영화의 제목인 Martian은 화성인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이 단어가 원래 있는 단어가 아니라 합성어라고 생각했는데요. 이 영화는 한 마디로 요약하면 화성 생존기입니다. 화성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미션을 수행하는 거죠. 그래서 Mars Of Misson의 줄임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면 주인공 이름이 마크니까 Mark’s Misson의 줄임말이거나요. 하지만 혹시 저 같은 생각을 하시는 분들을 위해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Martian은 화성인이라는 뜻입니다.


마크 와트니(멧 데이먼)는 화성 탐사선 대원으로 전공은 식물학입니다. 거대한 폭풍의 출현으로 화성 탐사대는 즉각 탈출을 준비합니다. 폭풍에 부서진 기구 파편에 맞은 마크의 생체신호가 단절되고 그가 죽었다고 생각한 대원들은 화성을 탈출해 지구로 떠납니다. 폭풍이 지나고 정신을 차린 마크는 자신이 화성에 혼자 남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운이 없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 누굴 원망할 수가 없습니다. 안전하게 모두 탈출할 수 있었는데 사고에 휘말린 건 끝까지 표본을 버릴 수 없다고 마크 본인이 주장한 탓도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나중에 통신이 재개되었을 때 대원들의 탓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실 가장 큰 원인 제공자는 폭풍이지만 화성의 폭풍을 법정에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아무튼 마크가 화성에 온 이유는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식물학자인 그가 탐사대원이 된 것도 식물의 재배 여부, 즉 경작의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해서였겠지요. 하지만 홀로 남음으로써 그는 죽음을 목전에 둔 상태가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삶을 발견하기 위해서 왔던 마크는 이제 살아남기 위해서 삶을 발명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마크가 있는 기지는 31일 용으로 설계된 임시 구조물입니다. 물 환원기나 산소 발생기가 고장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지구에 연락할 방법도 없습니다. 설령 연락을 한다 해도 지구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4년이 걸립니다. 신의 도움으로 기지가 무사히 버텨주고 물 환원기와 산소 발생기가 고장나지 않고 지구와 연락이 된다고 해도 결국 굶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크는 폭풍 속에서 간신히 살아 남았지만 죽음은 여전히 그의 곁에서 유유자적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죽음은 별로 급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둘러봐도 여기에는 삶이 찾아올 가능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삶을 만들어내기 위해 마크가 하는 일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겠습니다. 마크는 폭풍이 지나간 후 눈을 뜹니다. 즉 아직 살아있다는 자각. 이것이 가장 첫 번째 걸음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배에 박힌 파편을 제거합니다. 이 파편은 그를 기절시키고 생체신호를 파괴함으로써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원흉입니다. 말하자면 삶의 자각 다음에는 자신을 파멸로 몰아갔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두 번째 걸음입니다. 그 다음으로 하는 일은 기록입니다. 마크는 카메라를 켜고 자신의 일과를 말하고 저장합니다. 이것이 세 번째 걸음입니다.


마크가 자신의 일과를 기록하는 것은 언젠가 화성에 도착하여 자신의 유골을 발견하게 될 사람들에게 자기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려주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기록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를 위해서입니다. 기록을 한다는 것은 일기를 쓰는 것과 비슷합니다. 일기는 하루 동안 자기가 느꼈던 것들에게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이 느낌 혹은 감정들은 남들에게는 대단한 것이 아닐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살아있다는 증거와 같습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못 느낍니다.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느낌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이러한 증거들이 누적은 살아있다는 자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요컨대 일기에 쓰는 느낌과 감정들은 생의 양분인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농사와 같습니다. 그것은 영혼의 경작입니다. 하루 동안 있었던 일과 그에 따른 느낌들은 흙과 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대단하지도 않고 특별하지 않지만 버리지 않고 밭에 뿌리면 얇고 가냘픈 잎과 줄기가 두터운 지면을 뚫고 올라오게 됩니다. 특별한 흙을 뿌린다고 유달리 좋은 물을 한 번에 쏟아붓는다고 갑자기 잎이 쑥 올라오는 게 아닙니다. 보통의 흙과 보통의 물이면 충분합니다. 중요한 것은 매일 주는 것입니다. 생명은 근력으로 키우는 게 아니라 지구력으로 키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마크는 매일 기록을 함으로써 하루하루를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쌓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특별한 몇 가지 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대수롭지 않은 일들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수롭지 않은 일들을 잊고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버리는 셈입니다. 반대로 사소한 것이라도 잊지 않고 기록하고 저장하는 것은 말하자면 자기 자신의 아주 작은 부분에조차도 불빛을 비춰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빛을 비춰준 부분들이 쌓이면 결국 사람은 환해집니다. 마크가 하고 있는 기록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하루를 말하고 기록함으로써 생명의 불꽃을 지켜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삶은 말하기만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말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말뿐이라면 오히려 현실도피가 됩니다. 실재가 없는 말하기는 거짓말이 되고 거짓말은 삶은 부풀릴 수는 있어도 키울 수는 없습니다. 


삶을 키우기 위한 마크의 네 번째 걸음은 바로 경작입니다. 경작은 말할 것도 없이 중요합니다. 현재 마크가 가지고 있는 식량은 아무리 아껴먹어도 400일분 정도이며, 지구에서 다음 탐사대가 오는 것은 4년 뒤입니다. 천운이 따라서 기지도 부서지지 않고 공기도 물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해도 마크는 약 1,000일 간의 식량을 만들어 내야만 합니다. 원시의 지구라면 사냥도 하고 채집도 할 수 있겠지만 동식물이 없는 화성에서는 오로지 경작을 통해 식량을 수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경작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식량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다만 그에 못지 않게 의의를 가지는 것은 그것이 움직임이기 때문입니다. 경작뿐만 아니라 로버의 개량과 패스파인더의 수리 등도 모두 움직임입니다. 움직인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은 움직이지 못합니다. 허무에 빠진 사람도 못 움직입니다. 꼭 팔과 다리가 성해야만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움직인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결국 삶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마크는 화성에 홀로 남았고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말하자면 죽음의 한 가운데 있는 셈이지요. 그러니까 마크의 움직임이란 곧 죽음의 바깥으로 나가려는 움직임입니다. 요컨대 생에 대한 의지인 것입니다.


이것은 한 쌍의 바퀴입니다. 움직임과 생에 대한 의지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계약관계여서 쌍방이 모두 부지런히 지속력을 유지해야 합니다. 움직임이 멈추면 의지는 굳습니다. 의지가 약해지면 움직임은 느려집니다. 마크는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그것은 곧 멈추면 죽는다는 것을 본능이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반대로 멈추지 않고 움직인다면 반드시 어디론가 이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크의 움직임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일단 경작은 식량을 제공함으로써 생명을 유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로버의 개량은 이동할 수 있는 거리를 늘려줌으로써 생명의 반경을 넓혀줍니다. 그리고 패스파인더는 지구와 교신함으로써 아주 먼 곳에 있는 생의 가능성을 이곳으로 불러옵니다. 요컨대 자기 자신을 유지하면서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탐험을 떠나는 일은 진정한 생의 장소로 사람을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마크가 경작에 성공하는 것에 만족했다면 지구에서는 마크가 살아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었겠지요. 로버를 개량하지 못했다면 패스파인더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고 패스파인더를 수리하지 못했다면 지구와 교신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생은 구원되지 않고 단지 괴로움 속에 연장되다가 끝나고 말았겠지요.


영화 <마션>은 화성에서의 생존기를 다룬 이야기지만 스페이스라는 배경을 걷어내면 그곳에 남은 것은 생의 계발이라는 플롯입니다. 생의 계발은 반드시 죽음의 불안을 전제로 합니다. 계발이라는 것은 인간 내부에 있는 무언가를 일깨운다는 것이고, 흔히 만화나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주인공이 자기 내부의 힘을 필요로 하는 것은 위기에 맞닥뜨렸을 때입니다. 즉 이미 주어진 생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할 때 비로소 인간은 계발을 요구받게 됩니다.


따라서 화성을 죽음의 불안으로 읽는다면 지구는 불안 너머에 존재하는, 진정한 삶이 되겠지요. 실제 그런 것이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영화가 제시한 구조로만 읽는다면 마크가 화성에 홀로 남은 것처럼 인간은 죽음의 불안 속에 홀로 있습니다. 진정한 생은 지구만큼 멀리 떨어져 있고 귀환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모두 거기 있습니다. 내가 이 불안에서 나가게 도와줄 사람들은 화성과 지구의 궤도 사이에 존재하지만 그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혼자 힘으로 일단 화성 바깥으로 탈출해야 합니다. 즉 생의 계발을 통해 죽음의 불안을 극복하면 나를 도와줄 사람들이 나타나겠지만 일단 그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싸움은 오롯이 개인의 몫이라는 겁니다.


이 싸움은 경작과 비슷합니다. 마크가 화성에 감자를 심었듯 인간은 자기 자신이라는 불모지에 스스로 씨앗을 뿌립니다. 불모지를 토양으로 바꾸는 작업은 화성의 흙과 인분을 섞는 일입니다. 즉 한 번도 무언가를 키워본 적이 없는 자기 자신에다가 이제까지 자신이 저질러 온 수많은 후회를 섞을 때 인간은 비로소 무언가를 키울 수 있는 토양이 됩니다. 이 토양에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아주 작은 감자들, 즉 나에게만 보이는 가능성을 심습니다. 화성의 흙에서도 감자는 자랍니다. 재능 같은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패에 대한 마음의 준비는 해야 합니다. 마크는 우연한 실수로 어렵게 키워온 감자를 모두 잃고 맙니다. 이제 다시 키울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파울로 코엘료가 <연금술사>에서 했던 말과 비슷합니다. 자아를 찾기 위한 여정은 초심자의 행운으로 시작해서 가혹한 시험으로 끝난다. 불모지의 흙에서 잎이 자란 것이 초심자의 행운이라면 화성의 대기에 노출되어 모두 얼어붙고만 것은 가혹한 시험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중요한 것은 이런 것입니다. 어차피 다시 시작할 수는 없습니다. 한 번 시작했고 이미 여기까지 왔습니다. 마크는 기존에 비축해두었던 감자를 조금씩 아껴먹으면서 구조대와 약속한 날이 되기를 기다립니다. 처음 감자를 키우는 것이 자신의 보잘 것 없는 가능성을 키우는 일이었다면 수확한 감자를 아껴먹는 것은 시간을 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이른바 가혹한 시험이라는 것은 바로 초심자의 행운이 준 수확으로 끝이 날 때까지 기약없는 시간을 버텨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혹한 시험이란 다름 아닌 시간과의 싸움인 것입니다.


이동진 영화 평론가는 <밤은 책이다>에서 만약 무언가를 하는데 세월이 필요하다면 그건 긴 시간이 그 일을 해내는데 핵심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말하자면 시작이 불모지에 씨앗을 뿌리는 모험이라면 끝은 기다림인 것입니다. 이 영화가 말하는 생의 계발은 자기만의 낙원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아주 먼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장의 충족이 아니라 먼 행복이며 가까운 낙원에 눌러앉는 나태가 아니라 진정한 낙원에 닿기 위한 운동성입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코 멈추지 말 것. 영화 <마션>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이 영화의 제목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앞서 첫 문단에 적은 것처럼 Martian은 화성인이라는 뜻입니다. 영화 속 화성인 마크의 말에 의하면 화성에 홀로 남겨졌을 때 느낀 것은 죽음에의 공포입니다. 왜냐하면 우주에서는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고 어느 순간 모든 것이 틀어지며 이제 끝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오기 때문이지요. 반대로 말하면 뜻대로 되는 일이 없고 모든 것이 틀어져서 끝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화성인과 다를 바 없다는 말도 됩니다.


이 화성인들에게 마크가 하는 말은 이렇습니다. 포기하고 죽을 게 아니라면 살려고 노력해야 하며, 무작정 시작하고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다 보면 살아 돌아오게 된다는 것. 영화 <마션>은 분명 교조적인 영화입니다. 말하는 바도 가리키는 방향도 명확하지요. 그 방향이 옳은지 여부는 관객 각자가 판단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 영화가 잊지 않은 것은 마지막 마크의 “질문 있나?”라는 말에 모든 수강생들이 손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목적지에 도착했어도 삶에서 질문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2023년 4월 9일부터 2023년 4월 11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영화 이야기 <데몰리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