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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Apr 19. 2023

영화 이야기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이 영화의 제목을 보고 한 작가의 이름을 떠올리지 않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바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유명한 마르셀 프루스트지요. <가지 않은 길>의 로버트 프로스트와 헷갈리는 분들도 많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은 교과서에도 실렸던 작품이기 때문에 헷갈리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은 기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정확히는 기억과 현재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영화지요. 그런 면에서 보면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유사한 지점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이란 잃어버린 기억과 같은 것이고 이 영화의 주인공은 잃어버린 기억으로 인해 자신의 인생마저 잃어버린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폴(귀욤 고익스)는 실어증에 걸린 피아니스트입니다. 두 이모와 함께 살고 이모들이 운영하는 댄스 교습소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선천적인 장애가 있어서 말을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억나진 않지만 폴의 부모는 폴이 아주 어릴 때 사고로 죽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폴은 부모가 죽는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 이후로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기억하지도 못하는 어린 나이에 받은 상처가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낫지 않은 셈입니다.


실어증이 아니더라도 폴이 내면의 상처를 안고 있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영화는 폴의 가장 오래된 기억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아버지는 만나는 사람마다 반갑게 인사하지만 정작 자신을 향해서는 무서운 얼굴로 고함을 지릅니다. 이른바 폴이 가지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사랑받지 못한 기억입니다.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아이는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지 회의하게 됩니다. 나를 만든 사람마저 나를 싫어한다면 세상에 과연 누가 나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폴의 직업은 피아니스트인데 폴이 피아노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침이 되어 커튼을 젖히면 환한 빛이 들어오는데 폴이 피아노의 덮개를 열면 방 안은 다시 어두워집니다. 요컨대 피아노는 폴에게 빛을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어둠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나아가 폴은 피아노를 연주하는 내내 단 것을 먹습니다. 만약 피아노를 치는 일이 즐겁다면 굳이 단 것을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단 것이 필요한 이유는 그게 쓴 일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단 것이 떨어지자 폴은 중간에 연주를 멈춰버린 적도 있습니다. 이런 면을 보면 폴은 피아니스트임에도 불구하고 피아노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부모로부터 사랑받은 기억도 없고 직업을 사랑하지도 못한다면 아마 행복한 삶이라고 부르기는 어렵겠지요. 행복에 이르는 경로는 여러 가지지만 그 도착지는 한 곳입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부모에게서 사랑받지도 못하고 자기가 하고 있는 일조차 사랑할 수 없다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는 힘든 일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에게 말을 걸기 어렵습니다. 말은 타인에게는 건네는 첫 번째 나입니다. 만약 스스로를 싫어하고 있다면 타인에게 말을 걸 수 없지요. 내가 싫어하는 만큼 타인도 싫어할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어쩌면 폴의 실어증은 부모가 죽은 충격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병일지도 모릅니다.


반전의 계기를 찾은 것은 마담 프루스트(앤 르 니)를 만나게 되면서부터입니다. 맹인 조율사의 레코드를 되돌려주기 위해 그녀의 집을 방문한 폴은 우연히 그녀가 제조한 약을 먹게 되고 거기서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됩니다. 이후 폴은 시간이 날 때마다 마담 프루스트의 집을 방문해서 자신의 기억을 회복하게 됩니다.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을 맞추는 일이 헝클어진 삶을 정돈시킨다는 것은 과거가 현재와 단절되지 않고 이미 지나간 후에도 여전히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생각해보면 폴이 겪고 있는 실어증 역시 과거에 입은 상처가 현재까지도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지요. 과거에 입은 상처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말은 과거가 현재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니까요. 이 말은 반대로 말하면 현재의 치료가 과거를 회복시켜 준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즉 과거란 지나간 일 혹은 바꿀 수 없는 일이 아니라 현재를 만들고 또 현재가 만드는 일인 것입니다. 


마담 프루스트의 약을 먹고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음으로써 폴은 그 동안 잘못된 기억이 자신의 생을 얼마나 헝클어뜨렸는지 알게 됩니다. 가령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렸다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 공연 연습이었고 자신이 매일 연주하는 피아노는 다름 아닌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인 도구였다는 것도 알게 되지요. 말하자면 폴은 기억의 훼손으로 인해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부모를 죽인 피아노로 피아니스트가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부모를 죽인 피아노라고 하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맞는 말이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피아노는 무게를 버티지 못한 바닥이 붕괴하는 바람에 떨어진 것이지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폴의 부모를 죽이려고 했던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이 피아노를 내려쳐 손가락을 망가뜨리는 것은 이 피아노가 바로 운명의 강제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폴의 어머니는 폴을 무엇으로 키울 생각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피아노에 재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연예술가가 된 것처럼 폴 역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게 할 생각이었죠. 오히려 폴을 피아니스트로 키우고 싶어한 것은 두 이모들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부모를 죽인 피아노를 폐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 피아노로 폴을 피아니스트로 키운 이모들은 폴의 인생보다 자신들의 기대를 우선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폴의 인생은 부모의 상실과 함께 자유를 잃어버리고 타인의 기대 속에 구속된 것입니다. 즉 피아노는 부모의 인생과 함께 자기 자신의 인생까지 가져가 버린 것이지요.


마담 프루스트가 “네 자신의 인생을 살아라”고 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타인의 기대대로 사는 삶 혹은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삶은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마담 프루스트가 피부암에 걸렸음에도 치료를 거부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는 것은 그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자신을 죽은 사람으로 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담 프루스트가 스스로와 폴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공원의 나무를 지키기 위해 했던 말과 같습니다. 나무는 분명 죽고 말라버릴 테지만 적어도 당장은 공원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과 커다란 우산을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요컨대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고 해도 삶에는 여전히 소중한 부분들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끔찍한 기억이 있어도 삶에는 그것을 대신할 만한 것이 존재하고 그것을 찾는 것이야말로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사는 일입니다. 마담 프루스트의 말을 빌리자면 천국은 하늘이 아니라 바로 여기, 삶 속에 있다는 것이지요. 사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정되어 있습니다. 단지 찾아오는 시기가 다를 뿐입니다.


따라서 폴이 콩쿠르에서 우승했음에도 불구하고 피아노와 결별하는 것은 바로 콩쿠르를 우승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타인의 기대가 아니라 스스로의 기억 속에서 발견한 자신의 생이었기 때문입니다. 경연 도중 느닷없이 나타난 개구리 밴드는 한때는 폴을 괴롭혔던 기억들이지만 이제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추억할 수 있는 소중한 기억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마담 프루스트의 약이 가져다 준 선물이지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약을 먹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장 끔찍한 기억과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폴이 자기 자신과 화해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기억의 수정만이 아니라 현재를 바꾸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기억의 수정은 과거의 수정이 아니라 현재의 수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아노 대신 폴이 시작한 것은 우쿨렐레입니다. 이 우쿨렐레는 마담 프루스트의 것으로 두 이모가 부순 것을 폴이 수리한 것이지요. 폴은 피아노를 연주하던 손으로 우쿨렐레를 수리한 것입니다. 이것은 누군가의 기대 속에서 움직이던 손이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누군가를 위해 움직인 것을 의미합니다. 우쿨렐레는 마담 프루스트와 같습니다. 마담 프루스트가 약으로 폴을 치료한 것처럼 폴은 자신의 손으로 우쿨렐레를 수리함으로써 타인의 비난 속에서 사라진 마담 프루스트를 자신의 기억 속에서 온전히 보존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마담 프루스트가 폴에게 현생을 주었다면 폴은 마담 프루스트에게 영생을 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누군가를 온전히 기억하는 일은 그에게 새로운 삶을 주는 것과 같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영화의 말미에 그랜드 캐니언으로 떠난 폴은 아이를 쳐다보면서 처음으로 입을 엽니다. 그것은 아이의 기억에 자신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온전히 남겨두고 싶어서였겠지요. 즉 폴이 말을 한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입니다. 폴의 실어증은 사랑받지 못한 상처로 생긴 흉터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받지 못해 생긴 상처는 사랑받음으로써 낫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랑함으로써만이 나을 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어쩌면 마담 프루스트가 폴에게 준 것은 기억을 회복하는 약이 아니라 이 세상에 너를 아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빅토르 위고는 <레 미제라블>에서 최고의 행복은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라고 했지요. 누군가에게 좋은 기억을 주는 일은 삶을 선물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도요.



2023년 4월 12일부터 2023년 4월 1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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