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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Apr 30. 2023

영화 이야기 <짝패>

이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액션 영화라는 건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움직임에 대한 열망이 아닐까 합니다. 


<짝패>는 기본적으로는 맨몸을 사용한 대전 격투를 지향하지만 지형 지물을 사용하거나 비보잉, 각종 운동부의 개성을 활용한 다양한 액션을 시도합니다. 맨몸 격투는 인간의 몸이 가지고 있는 활동성의 범위를 보여줍니다. 올림픽에 나와서 훌륭한 기량을 선보이는 선수들에게 느끼는 것처럼 액션 영화에서 배우가 보여주는 몸의 움직임은 대개 일반인이 가지고 있는 활동 범위를 초월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몸은 어디까지 움직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13구역>이나 <엽문> 등 맨몸 격투에 초점을 맞춘 영화를 보면 인간의 몸이란 단순히 정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헬스는 물론이고 크로스핏, 요가 등 몸을 사용하는 것을 운동으로 총칭하면서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지만 아주 오랫동안 몸은 머리의 하위에 속했습니다. 가령 전근대 시대에는 일정 시기를 제외하면 대개 문신이 무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었고 몸을 사용하는 직업은 머리를 사용하는 직업보다 낮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여전히 적용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짝패> 같은 영화를 보면 몸이라는 것은 오히려 머리보다 상황을 쉽게 해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특히 이 영화에서는 그러한 의도가 노골적으로 나와 있는데요. 고시공부를 하는 동환(정석용)은 몰락한 마약쟁이가 되고, 말로만 필호(이범수)를 부리던 조 사장(조덕현)도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반대로 집단을 지배하는 것은 무력 외에는 쓸 줄 아는 게 없는 필호이고 집단의 구원자 역시 할 줄 아는 것은 오직 주먹 쓰는 것뿐인 석환(류승완)과 태수(정두홍)입니다. 요컨대 유능한 몸은 무능한 머리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움직임이 사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은 분명 일가견이 있는 말입니다. 대개 무너진 정신을 회복하는 일은 몸의 움직임에서 시작합니다. 벽에 부딪혔을 때 가만히 앉아있는 것은 점점 사태를 악화시킬 뿐입니다. 뭐라도 하면서 움직여야 답이 나옵니다. 이 움직임은 걷기나 달리기 혹은 근력 운동 같은 육체의 단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단련을 포함해서 일자리를 구하거나 봉사활동를 나가거나 하다못해 집 밖에라도 일단 돌아다니는 것이 적어도 집 안에서 가만히 있는 것보다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물론 하릴없이 집 밖을 어슬렁거리는 것을 두고 액션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모든 액션 영화에서 보여주는 움직임이란 바로 그 어슬렁거림이 정교하고 강한 몸짓으로 변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짝패>의 경우 영화 초반에 석환과 태수의 움직임은 사실 어슬렁거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원래 필호의 심부름을 하던 석환은 말할 것도 없고 형사인 태수조차도 살인자의 정체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이렇다할 긴장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방향이 없을 때 둘의 몸짓은 일상적인 움직임이거나 나른한 무능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의 존재를 알아채고 목표를 분명히 잡았을 때 주먹에는 힘이 실리고 달리는 발에는 망설임이 없어집니다. 영화 초반에 거의 당하기만 하는 석환과 태수가 후반부 액션에서 놀라울 만큼 힘을 발휘하는 것 역시 이런 이유입니다. 표적이 선명해졌기 때문이지요.


요컨대 몸이 어슬렁거림에서 액션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방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방향이란 몸이 가진 가능성을 이끌어내는 단초입니다. 흔히 육체가 구사하는 강력한 힘은 대개 추상적인 근본을 가진 것처럼 그려집니다. 대표적인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유전이고 하나는 훈련입니다. 먼저 유전은 전사의 후예라거나 무인의 피라는 식으로 사람의 유전자에 들어있는 가능성의 크기를 부풀립니다. 예를 들어 너는 누구 아들이니까 할 수 있어 라든가 유전은 아니지만 범위를 좀 더 넓히면 누구의 제자라는 식이 일반적입니다. 이런 식의 말하기는 개인의 잠재력에 대해 언급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특정 집단(가문이나 계파)를 강조함으로써 개인의 능력을 집단의 일부로 귀속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힘을 발휘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개인의 소속이라는 것이지요.


다른 하나는 훈련인데 여기서 훈련이란 거의 모든 종류의 복수극에 등장하는 훈련입니다. 애니메이션의 예를 든다면 <원펀맨>에서 사이타마가 매일 하는 훈련이나 <귀멸의 칼날>에서 탄지로가 귀살대가 되기 위해 하는 훈련이 대표적이지요. 영화에도 비슷한 예는 수없이 많습니다. <킬빌>이나 <매트릭스> 혹은 <배트맨 비긴즈>나 <신의 한수> 등 억울한 일을 당한 주인공이 훈련을 통해 강해지는 장면은 액션 영화에서 거의 빠지지 않는 클리셰입니다. 그리고 이 훈련은 대개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고되며 그래서인지 훈련을 마치고 나면 주인공은 기존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지요.


훈련을 통해서 강해지는 것이 왜 추상적인지 고개를 갸우뚱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러나 여기서 보여주는 훈련이란 팔굽혀 펴기를 하고 무거운 무게를 지는 등 구체적인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실재와 무관한 추상적인 의미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기본적으로 그런 훈련들은 보통 사람이 아예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며, 설령 그것을 한다고 해서 사람이 근본적으로 변하는 일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령 <킬빌>의 훈련을 모두 따라한다고 해도 누구나 <킬빌>의 주인공처럼 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훈련 장면이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스스로를 넘어서기 위한 주인공의 강한 의지, 즉 방향을 의미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말하자면 육체가 어슬렁거림을 벗어나 정교하고 파괴력 있는 액션을 취하게 되는 것은 개인이 가진 소속이나 추상적인 훈련이 아닌 명확한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힘이 좋다고 해서 전혀 운동을 하지 않은 사람이 파워 리프터가 드는 무게를 곧장 들어올릴 수는 없습니다. 또한 달리기를 많이 한다고 해서 누구나 육상 선수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방망이를 아무리 휘둘러도 야구 선수가 되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무리한 훈련은 몸을 상하게만 할 뿐입니다.


반대로 확고한 방향은 몸을 움직이게 합니다. 가령 무리하게 달리면 육상 선수가 될 가능성보다는 무릎을 다칠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하지만 대개 사람들은 아예 무리하게 달리지 않습니다. 무리하게 달리는 사람은 육상 선수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분명한 목표가 몸을 기존의 한계를 계속 부수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렇듯 한계를 초월한 몸의 움직임이야말로 액션 영화가 추구하는 몸의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액션이란 방향과 움직임의 결합인 셈입니다.


영화 <짝패>에서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은 두 말할 것 없이 석환과 태수입니다. 충무로의 액션 키드, 대표적인 무술 감독답게 류승완 감독과 정두홍 감독은 이전까지 한국 영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었던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방향이 없다면 이 움직임은 액션이 되지 못했을 겁니다. 방향이 없는 칼은 검술이 아니라 흉기 난동이고 방향이 없는 움직임은 몸짓에 불과합니다.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영화가 단순한 스턴트 쇼가 아니라 액션 영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영화 속에 확고한 방향이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방향을 세울 수 있도록 분명한 타격점이 되어주는 것은 바로 필호를 맡은 이범수 배우입니다.


배우 한 명이 영화를 이끌어간다는 말은 흔한 칭찬이지만 이 영화에서 이범수 배우만큼 거기에 온전히 해당하는 사례를 찾기도 어렵습니다. 영화에서 친구를 배신하고 이익을 위해 고향마저 팔아버리는 악역을 맡은 이범수 배우는 그야말로 영화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소실점이 되어줍니다. 이 필호라는 악역이 확실하게 자리를 잡음으로써 석환과 태수의 움직임은 뻔한 몸짓이 아니라 역동적인 액션이 될 수 있었습니다. 만약 필호라는 캐릭터가 없었다면 아마 이 영화는 영화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문득 드는 생각인데 어쩌면 악의 역할은 세상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방향을 설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약 삶에 아무런 장애나 고통도 없다면 삶은 모든 긴장을 잃어버리고 나른한 것이 되어버리고 말 겁니다. 그리고 긴장이라는 것은 생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정말 별 것 아닌 일에도 많은 고통을 느끼곤 합니다. 말하자면 인생에 이렇다할 장애가 없기 때문에 삶의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 소소한 일도 마치 엄청난 장애가 생긴 것처럼 대응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바꿔 말하면 삶의 긴장을 유지하는 법을 배운다면 아무리 큰 장애도 인생의 활력소로 삼을 수 있습니다.


영화 <짝패>의 특징 중 하나는 거의 모든 대사가 충청도 사투리로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아시다시피 충청도 사투리는 다소 느리고 나른한 감이 있습니다. 요컨대 이 영화에서 말은 느리고 몸은 빠릅니다. 말이 느리고 몸이 빨라서 필호의 행동은 더욱 잔인하게 느껴지고 석환과 태수의 행동은 다이나믹해지는 효과를 발휘합니다. 이 말인즉슨 역동성이란 결국 입이 아니라 몸에서 나온다는 뜻이겠지요. 삶을 과감한 액션으로 만드는 것은 빠르고 조리있는 말이 아니라 부지런하고 쉴 틈 없는 움직임이라는 것입니다. 글을 쓰는 것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남는 것은 말이지만 시작하는 것은 언제나 손가락이지요.



2023년 4월 16일부터 2023년 4월 1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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