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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May 05. 2023

영화 이야기 <버드맨>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이번 생에서 원하는 걸 얻었나요?”
“네. 물론이죠.”
“그게 뭐였죠?”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요.”


영화의 첫 장면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보면 이 영화는 사랑에 관한 영화처럼 보입니다. 아마 누군가를 사랑하는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모노드라마라고 할 수 있겠지요. 분명 그렇게 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리건(마이클 키튼)이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려는 것도, 마이크(에드워드 노튼)의 진짜에 대한 집착도, 레슬리(나오미 왓츠)가 브로드웨이에 오르려는 것도 어떻게 보면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한 노력이니까요. 자주 하는 말이지만 <레 미제라블>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최고의 행복은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다.”


다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 영화 속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위한 일환이었다면, 마치 수많은 갈래의 흐름이 하나의 깔때기 속으로 여과되는 것처럼 오직 자기애를 위한 것이었다면 인간은 너무 납작한 존재가 아닐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건 당연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은 행복의 다른 이름이고 어쩌면 생이란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한 여정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과 자기애라는 말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문장으로 쓰느냐 단어로 쓰느냐에 따른 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장으로 쓸 때와 달리 이 자기애라는 단어에는 어떤 도취가 있습니다.


이 차이를 문자로 표현하려면 앞서 영화의 서문에 나왔던 말을 빌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요컨대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과 자기애는 다릅니다. 전자에는 윤리적인 느낌이 있지만 후자에는 병적인 느낌이 있습니다. 전자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후자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 느낌입니다. 전자는 열려 있고 후자는 닫혀 있습니다. 병이라는 건 원래 폐쇄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외상은 신체와 막다른 것의 충돌에서 발생하고 내상은 신체 내 자연스러운 흐름이 막힐 때 발생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사랑한다는 느낌이 들면 굳이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이미 사랑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않거나 나를 사랑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면 내가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컨대 자기애라는 것은 사랑을 서로 나누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흐름이 단절되었을 때 혼자만의 방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리건이 브로드웨이 연극을 하는 이유는 명백히 자기애 때문입니다. 그는 예전에 버드맨으로 얻었던 인기를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즉 누구도 더 이상 나를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느끼기 때문에 다시 많은 사람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느낌을 회복하기 위해서 연극을 시작한 것이지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기분을 느끼기 위해 연극을 시작하는데 이것이 자기애가 되는 이유는 그가 생각하는 사랑의 형태가 버드맨이라는 형태로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받는다는 느낌은 사람의 수가 많다고 더 커지는 게 아닙니다. 사랑받는다는 느낌은 조명이 아니라 빛입니다. 많을수록 화려해지는 게 아니라 크기와 상관없이 어둠을 몰아냅니다. 그런데 리건은 사랑받는 느낌을 위해 굳이 브로드웨이 연극을 택했습니다. 말하자면 퇴역배우라는 인상을 지우고 헐리우드로 복귀하기 위해 연극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 목적은 아마도 버드맨 당시의 인기를 회복하기 위해서겠지요. 요컨대 리건은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환호를 사랑의 기호로써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받는 자의 표상으로 헐리우드 스타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까요.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카메라 세례를 받으면서 늘 누군가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만큼 어쩌면 사랑처럼 보이는 것도 분명 납득이 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묻는 것은 헐리우드 스타는 사랑받는 사람인가가 아니라 사랑받기 위해서는 헐리우드 스타가 되어야 하는가입니다. 둘은 비슷해 보여도 지하철 1호선과 2호선만큼이나 다릅니다.


수많은 헐리우드 스타가 있는데 그들이 모두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직 그 자신만이 알 따름입니다. 반대로 사랑받기 위해서는 헐리우드 스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한 사람이 상상하는 이미지입니다. 헐리우드 스타가 된 자신을 떠올릴 때 한편으로 떠오르는 것은 헐리우드 스타가 아닌 현재의 자신입니다. 요컨대 헐리우드 스타라는 정체성을 자아에 심음으로써 결과적으로 현재의 자신을 부적격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언젠가 헐리우드 스타가 되면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 거야 라고. 


특정한 이미지를 상상하고 자기 자신을 거기에 맞추려는 노력은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는 각자의 고유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상상하는, 자신이 아직 되지 못한 자신의 이미지는 대개 상업적으로 생산된 소비의 이미지인 경우가 많습니다. 헐리우드 스타가 대표적이지요. 슈퍼에서 파는 물건처럼 이런 이미지는 대개 정형화되기 마련입니다. 단순해야 사기 쉬우니까요. 따라서 상업적 이미지에 맞게 스스로를 변형시키려는 노력은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입니다.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이것만큼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위한 노력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결핍을 만들면서 결핍을 해소하려는 식이지요. 이 역설의 수레바퀴가 바로 자기애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자신을 만들고 그런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러나 이것은 고유한 자기 자신과 오히려 멀어지는 일이지요. 리건이 지향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느낌이라는 것은 실제 사랑받는 느낌이 아니라 단지 특정 이미지에 대한 집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리건이 딸을 포함해서 주위의 그 누구와도 사랑을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삶은 이미지입니다. 헐리우드 스타가 사랑의 이미지인 것처럼 샘(엠마 스톤)에게 보여주려는 좋은 아빠의 모습 역시 흔한 좋은 아빠의 이미지이며, 레이먼드 커버의 칭찬이 담긴 쪽지 역시 그가 생각하는 배우의 이미지를 대변할 뿐이지요. 실제로 그는 자신의 아기를 임신했다고 말하는 여자에게도 무관심하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연극의 성공을 위한 소품처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이미지란 세상을 보는 창과 같습니다. 이 창을 통하지 않고는 그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습니다.


이미지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삶을 연기하고 있다는 것. 그에게 생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흉내내는 것입니다. 예컨대 영화 중간 중간에 그는 공중에 떠 있거나 손을 대지 않고도 물건을 자유롭게 움직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버드맨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이 능력은 당연히 현실의 것이 아니라 영화 속에서만 발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현실 속에서 버드맨의 능력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가 현실을 현실이 아니라 영화 속 세계로 상상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실제로 날아다니는 물건은 모두 직접 던진 것이고 브로드웨이의 거리를 자유롭게 달아다닌 것은 택시를 탄 것이었습니다. 리건에게 세상은 영화이며 삶은 연기이고 생은 캐릭터인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가짜의 삶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텐데요. 영화 속에서 이 가짜를 혐오하고 멸시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마이크인데요. 그는 연극 중에 정말 술을 마시거나 심지어 성관계를 시도하는 등 진짜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 인물입니다. 연극은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졌어도 당연히 인위적으로 구성된 세계입니다. 테이블이 놓인 집 안을 묘사하고 있어도 정면에는 관객이, 측면에는 스태프가 그리고 머리 위에는 수십 개의 조명이 돌아가고 있지요. 마이크는 이 인공의 세계 속에서 진짜를 찾으려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한 번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연 중에 소품 대신 진짜 술을 마시고 상대 배우와 진짜 성관계를 시도하는 일이 과연 철학이나 예술적인 의미에서 진짜를 추구하는 일일까요. 그가 추구하는 진짜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진짜를 추구하기 위해 했던 모든 행동들은 오히려 공연을 망치거나 혹은 망칠뻔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그는 진짜를 추구하는 예술가인 척하지만 실제로는 단순한 광인이라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행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마이크의 모순적인 태도입니다. 마이크는 연극 무대를 두고 가짜라고 평하지만 연극이 실재가 아니라 연출된 것이라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요컨대 연극을 만드는 사람이나 보러오는 사람들은 연극이 가짜라는 것에 합의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합의자 중에는 당연히 마이크도 포함됩니다. 따라서 그가 진짜 술을 마시고 성관계를 시도하고 특히 금기 중의 금기인 관객에게 말을 거는 행위들은 자신이 합의한 세계를 스스로 파괴하는 모순적인 행위에 다름 아닙니다.


그가 진짜를 추구하면서 가짜로 만들어진 세계, 즉 무대에 오르는 이유는 그의 말처럼 무대에서 자신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불구자인 그가 무대 위에서 발기할 수 있는 것은 대표적인 예지요. 하지만 공연 도중에 술을 마시고 취해서 결국 막을 내리게 한 사건에 대해서는 자기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마이크는 합의된 가짜 세계에서만이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자기 자신은 스스로를 만들어준 가짜 세계를 파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되고자 했던 무엇이 되는 순간 그 무엇이 될 수 있도록 해준 세계를 파괴하게 된다는 역설은 내가 상상했던 것이 현실이 되었을 때 그 현실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 같지 않다는 말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지와 실재에 관한 말이기도 합니다. 상상한 이미지는 어떤 경우에도 현실에서 그대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상상의 이미지라는 것은 언제나 그것을 상상하는 시점의 이미지이기 때문입니다. 이미지를 현실에서 재현하기 위해 움직일 때 나는 이미 이미지를 상상했던 시점의 내가 아니게 됩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 이미지를 재현하더라도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모두 사라진 뒤입니다.


이것은 단지 마이크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레슬리 역시 브로드웨이 배우가 되기를 그토록 꿈꾸었지만 실제 브로드웨이 배우가 되었을 때 그것은 자신이 꿈꾸었던 이미지가 아니었습니다. 나아가 리건의 경우를 보면 이미지란 닿을 수 없는 욕망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희롱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입니다. 리건은 연극의 성패를 쥐고 있는 비평가로부터 악평을 듣자 공연 도중에 자살을 결심하고 마이크가 했던 것처럼 소품이 아닌 진짜 권총을 발사합니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고 오히려 연극은 흥행에 성공하여 그는 그토록 원했던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지요.


말하자면 그가 그토록 꿈꾸었던 이미지는 그의 의도나 노력과 전혀 무관한 데서 이뤄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건 이미지가 현실로 재현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아무 생각도 없이 얻은 행운에 대해서는 신에게 감사하지만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얻은 결과에 대해서는 배신감을 느낍니다. 그것은 바로 인생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고난이 와도 자신의 생각대로 인생을 쌓아갈 수 있다면 인생은 노력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난도 승리도 모두 자신의 의도나 노력과 무관하게 온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회의에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건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리건의 자기애와도 연결지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리건의 자기애는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대로의 성공을 이루면 다시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되리라는 믿음이었습니다. 리건에게는 자신이 상상하는 이미지가 있었고 그는 그 이미지를 현실에 재현하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현실에 재현한 이미지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이 아니었지요. 그것은 얼굴을 가린 붕대처럼 버드맨의 가면과 흡사하게 생겼지만 버드맨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할 때 현재의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지향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컨대 자신이라는 것은 현실과 이미지의 결합인 것이지요. 리건은 버드맨이 아닐 때 다시 버드맨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상상 속에서 버드맨의 기술을 모두 사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다시 버드맨이 되었을 때 알게 된 것은 자신은 영원히 버드맨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요컨대 이미지는 아무리 현실과 닮았어도 현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지는 미래에 재현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니라 그것을 상상하는 바로 그 순간의 현실의 일부이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 리건이 버드맨이 될 수 있다고 상상하고 있었을 때 오히려 그는 버드맨에 가까웠으나 현실로 재현되었을 때 그는 버드맨이 아니라 환자인 것입니다.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결코 될 수 없다면 삶을 살아갈 이유도 사라지는 거겠지요. 리건에게 그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던 자기애의 상실과도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리건은 창 밖의 날아가는 새들을 보면서 결국 죽음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람들의 눈에는 성공한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리건에게 있어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작은 방마저 허락되지 않은 것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 밖을 보면서 샘이 미소짓는 이유는 리건이 노예로서의 삶이 아니라 주인으로서의 죽음을 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리건의 성공은 리건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무수한 타인의 우연한 의지에 의해 만들어진, 요컨대 신의 동정처럼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국 생의 주인 자리를 신 혹은 타인의 의지에 양보하고 자신은 노예의 자리에서 연명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리건은 절망 속에 자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삶의 주인 자리를 놓지 않은 채 주인으로서의 권리로 스스로를 죽이는 것입니다. 요컨대 신의 노예가 아닌 자신의 주인으로서의 삶을 택한 것이지요.


영화 <버드맨>은 이미지와 운명에 희롱당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렸지만 동시에 그 희롱에 맞서는 모습도 보여줍니다. 이 영화가 말하는 것은 어차피 인생은 생각대로 되는 게 없으니 죽는 게 낫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이 영화가 말하는 것은 생이 끝없이 스스로를 배신할 지라도 생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 자의 위대함입니다. 그리고 그 권리라는 것은 다름 아닌 이미지를 상상할 권리입니다. 이미지는 미래의 환상이 아니라 현실의 일부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미지를 상상한다는 것은 현실을 상상하는 권리가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상상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창문 밖으로 날아간 것은 리건이 아니라 날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는 인간의 권리입니다. 그래서 샘은 비로소 미소지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2023년 4월 26일부터 2023년 4월 3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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