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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May 11. 2023

영화 이야기 <라 비 앙 로즈>

영화의 제목인 <라 비 앙 로즈>는 번역하면 ‘장미빛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영화 속 주인공인 에디트 피아프(마리옹 꼬띠아르)의 삶은 아무리봐도 장미빛 인생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거리에서 태어나 매춘을 하고 알코올 중독과 약물 중독에 시달렸으며 부모로부터 버림받았고 유부남과 사랑에 빠졌으나 그마저 사고로 사별합니다. 가수로 성공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녀의 삶은 장미빛이라기보다는 흙빛에 가깝지요. 이 영화가 지향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이 흙빛 인생 속에 있는 무엇이 그녀의 인생을 장미빛이라고 불리게 만들었을까.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는 대부분 20세기 초에 만들어졌지만 21세기인 지금도 영화나 광고에서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영화와 동명의 제목인 La Vie En Rose가 그렇고 예전에 뮤지컬 배우 임태경이 <불후의 명곡>에서 불러 화제가 된 Hymne A L'amour (사랑의 찬가), 에디트 피아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Non, Je Ne Regrette Rien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까지. 특히 Hymne A L'amour는 그녀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남자가 비행기 사고로 죽은 뒤에 발표한 노래이고 Non, Je Ne Regrette Rien는 이미 알코올 중독에 약물 중독으로 삶이 만신창이가 된 뒤에 발표한 노래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에디트 피아프는 사랑을 상실한 뒤에 사랑의 찬가를 부르고 삶을 상실한 뒤에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 셈입니다.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가지고 있던 것을 잃어버렸을 때야 가진 것의 소중한 것을 알 수 있는 거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에디트 피아프에게 사랑과 삶은 둘 다 원래 가지고 있던 게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부모로부터도 애인으로부터도 계속 이용당하기만 했고 진심으로 사랑했던 남자조차 가정을 가지고 있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관계였지요. 그러니까 어쩌면 에디트 피아프에게 사랑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에디트 피아프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았고 살기 위해 노래를 때로는 매춘을 해야 했습니다. 성공한 예술가들을 보면 자신의 생을 예술을 위해 바쳤다는 표현을 하곤 합니다. 가령 가수라면 노래를 위한 삶이었다고 자기 자신의 인생을 회고할 수도 있겠지요. 사람은 자신을 잊고 몰두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았을 때 비로소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스스로의 인생을 두고 노래를 위한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노래를 부르는 과정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말이 되겠지요. 


하지만 에디트 피아프에게 노래는 삶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그녀가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단 한 순간도 잊어버릴 수 없었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녀의 비참한 처지란 단순히 가난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정말로 그녀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무도 그녀를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도 그녀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노래도 매춘도 모두 누군가의 필요에 속하는 것이지요. 에디트 피아프에게 삶이란 자신의 의미를 발견하는 시간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필요한 대상이 됨으로써 연명하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죽지 않았다고 해서 모든 것을 삶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만약 자신이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면 그것은 스스로의 삶을 박탈당한 존재라고 밖에 할 수 없지요. 그러니까 에디트 피아프에게는 애초부터 자신만의 삶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처음 그녀는 생존을 위해 노래했고 나중에 생존을 위해 노래할 필요가 없어지자 욕망을 위해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술을 마시고 금지된 약물을 사용하는 등 욕망을 무제한으로 추구하는 모습이 그녀의 삶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장면을 바라보는 관객이 느끼는 감정은 위태로움입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원료로 스스로의 삶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욕망에는 끝이 없는 반면 삶에는 끝이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녀의 삶은 욕망의 해소를 위해 소모되어 갑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지요. 말하자면 욕망이란 죽음에의 충동인 것입니다.


이 영화는 에디트 피아프의 유년과 노년을 번갈아 보여주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유년의 에디트 피아프가 생존을 위한 삶이라면 노년의 에디트 피아프는 욕망을 위한 삶입니다. 이것은 그녀가 그토록 살아남기 위해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삶이 아니라 죽음에 닿았다는 말이겠지요. 그리고 이것을 순차적으로 보여주는 대신 교차 편집해서 보여주는 이유는 유년의 고통이 그녀의 노년을 만들었다는 인과관계로 에디트 피아프의 삶을 조명하는 대신 태어난 순간부터 한 번도 그녀의 곁을 떠난 적이 없는 죽음의 그림자를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에디트 피아프에게 사랑과 삶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사랑했던 남자가 비행기 사고로 죽은 후 사랑의 찬가를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사랑의 상실감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짧은 시간이나마 사랑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역시 그녀가 실제로 살았던 생이 아니라 그녀가 꿈꾸었던 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장미빛 인생이란 그녀가 살았던 인생이 아니라 그녀가 살고 싶었던 인생에 대한 비유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러한 생의 모습을 꿈꿀 수 있었기 때문에 잔인한 현실의 생을 견뎌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그녀의 인생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장미빛 인생은 현실 속의 꿈이거나 혹은 꿈 속의 현실인 셈입니다. 그리고 삶은 언제나 그 두 가지를 모두 동반하지요.


이 영화의 원제는 La Môme(어린 아이)입니다. 에디트 피아프가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후회하지 않는 삶을 꿈꿀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육체는 늙어도 그녀의 영혼은 한 순간도 어른이 된 적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아이는 어른들 속에서 어른이 됩니다. 어른들에게 버림받음으로써 스스로의 생을 가질 권리를 박탈당한 에디트 피아프는 영원히 어른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른이 아니었기 때문에 장미가 없는 세상에서 장미빛 인생을 꿈꿀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물은 기자에게 한 번도 진실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세요" 라고 대답했던 것처럼요.



2023년 5월 1일부터 2023년 5월 4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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