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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May 14. 2023

영화 이야기 <벨파스트>

영화의 주인공인 버디(주드 힐)는 할아버지(시아란 힌즈)에게 묻습니다. “캐서린과 짝이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돼요?” 학교는 매번 수학 시험을 치고 성적에 따라 자리를 바꿉니다. 캐서린은 항상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아이이므로 캐서린과 짝이 되기 위해서는 1등을 하거나 적어도 2등을 해야 합니다. 할아버지는 말합니다. “숫자를 부정확하게 써보렴. 가령 1이나 7이나 구분할 수 없도록 말이다. 그럼 틀렸더라도 착각해서 점수를 잘 줄 수도 있는 것 아니겠니.”


말하자면 편법을 쓰라고 손자에게 할아버지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말이 좋아 편법이지 거짓말을 하라고 말하는 셈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버디는 할아버지에게 묻습니다. “그건 속임수잖아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능청맞습니다. “뭐 어떻게 해서든 캐서린 옆에 가면 성공하는 것 아니겠니.” 버디는 다시 묻습니다. “답은 하나 아니에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말합니다. “답이 하나라면 밖에 사람들이 저러고 있겠니.”


할아버지가 말하는 밖의 사람들이란 20세기 후반 아일랜드에서 종교분쟁을 일으킨 사람들을 말합니다. 평화롭던 마을에 가톨릭과 개신교의 충돌이 벌어지면서 마을에는 바리케이트가 쳐지고 사람들은 폭동을 일으키고 상점을 약탈합니다. 버디의 말처럼 답은 하나니까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자신들이 믿는 신이 유일신이니까 상대는 악마에 속한다고 생각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사실은 신이 하나이기 때문에 싸움이 터지는 게 아닙니다. 신이 둘 이상이기 때문에 유일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지요.


저는 종교를 믿지 않기 때문에 가톨릭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개신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뭐가 다른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지 확실히 어느 쪽의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인가를 가리는 파이팅보다는 좋아하는 여자애 옆에 앉기 위해 속임수를 쓰는 편이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밖에서 싸우는 사람들도 결국은 하나님 옆에 앉기 위해서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차이가 있다면 버디는 아무도 피해주지 않는 속임수를 쓰지만 밖의 사람들은 모두를 피해자로 만드는 진실을 부르짖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수학 공부를 열심히 해서 아무도 속이지 않고 캐서린 옆에 앉는 것이 최고겠지요. 하지만 오히려 이렇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왜 수학 성적대로 자리를 정해야 하는 걸까요. 학교에서는 수학 성적이 나쁠수록 뒷자리로 가고 성적이 좋을수록 앞자리로 옵니다. 다행히 캐서린이나 버디는 그렇게 키가 크지 않지만 만약 아주 키가 큰 아이가 가장 수학을 잘한다면 뒤에 앉은 아이들은 아무것도 안 보이게 될 겁니다. 또 공부는 열심히 하지만 시력이 나쁜 아이가 있다면 앞자리에 앉아야 성적이 오를 텐데 만약 칠판을 제대로 읽지 못해서 시험 성적이 계속 나빠지고 점점 뒷자리로 가게 된다면 이 아이의 성적은 도저히 회복될 희망이 없겠지요.


앉고 싶은 자리에 앉으면 안 되는지. 그게 어떤 이유든지 말입니다. 물론 앉고 싶은 자리가 겹칠 수는 있겠지요. 예컨대 캐서린을 좋아하는 아이가 버디만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그때 수학 성적으로 자리를 결정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어디에 앉고 싶은지 물어보기도 전에 오로지 수학 성적이라는 기준으로 자리를 정해버리니까 결국 노력해도 2등이나 1등을 이기기 힘든 버디 같은 아이는 속임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영화를 보신 분은 알겠지만 버디는 꽤 성실한 아이입니다. 속임수 밖에 쓸 줄 모르는 아이는 아니에요.


종교도 학교와 비슷합니다. 자리를 신에 비유하면 아이들이 앉고 싶은 자리에 앉는 것처럼 사람들도 자기들이 믿고 싶은 신을 믿으면 됩니다. 가령 우리나라에는 교회도 많고 점집도 많은데 땅이 좁아서 그런지 교회 근처에 점집이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주일에 오지 않으시거나 혹은 무당이 모시는 장군님이 불편하다고 눈치를 줬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가톨릭을 믿는 사람은 가톨릭을, 개신교를 믿는 사람은 개신교를 믿으면 되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학교에서 수학 성적으로 자리를 정하는 것처럼 종교에도 기준이 있나 봅니다. 수학 성적에 1등이 있는 것처럼 종교에는 유일신이라는 개념이 있지요. 종교 분쟁은 가까이서 보면 마치 수학 시험처럼 아주 어려운 기호들로 가득 차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멀리서 보면 결국 어느 신이 1등인가 하는 걸로 싸우는 것이고 이것은 1등 신을 믿는 사람들이 1등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영화가 흑백으로 촬영된 이유는 결국 세상을 흑백논리로 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반대로 그것을 어린아이의 눈으로 보는 이유는 아무리 어려운 말을 쓰고 고상한 이유를 대도 끝내 그것은 어린아이의 눈높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유치한 싸움이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본다면 세상이 비록 흑백일지라도 아이의 눈에는 얼마든지 총천연색으로 비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영화 중간중간에 삽입된 연극이나 영화는 실제 흑백 영화를 제외하면 모두 컬러로 나옵니다. 이 말은 빛은 현실에 없고 초현실적 세계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읽히지만 이 초현실적 세계는 어디까지나 현실을 무대나 영상 속에 재현해 놓은 것입니다. 즉 흑백의 세계처럼 보여도 그것은 세계의 본질이 아니라 누군가의 재현인 것처럼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얼마든지 컬러풀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영화 속에서 버디는 한 번도 컬러로 나온 적이 없지만 버디가 만난 세상은 흑백 밖에 없는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종교 분쟁으로 인한 재앙 같은 상황이 있는가 하면 좋아하는 여자아이를 떠올리며 한숨 쉬는 면도 있고 부모님의 싸움으로 우울한 날이 있으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달래주는 시간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누군가는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는 강박에 빠져 세상을 빛과 어둠으로만 인식할 때 누군가는 그런 빛과 어둠 속에서도 수많은 세상의 색깔을 찾아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일랜드의 종교분쟁이 일어난 해는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한 해이기도 합니다. 달은 빛과 어둠밖에 없는 황무지입니다. 하지만 총천연색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인간이 달에 간 것을 마치 환상의 세계에 도달한 것처럼 생각했지요. 말하자면 달 착륙은 컬러풀한 세상을 외면하고 흑백에 사로잡힌 인간의 모습과 비록 흑백의 세상일지라도 그곳을 세상에서 가장 환상적인 곳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습을 둘 다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종교 분쟁에 참여해 이웃을 상처 입히고 원래의 세계를 파괴한 사람들은 흑백에 취해 원래의 컬러풀한 세상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버디의 경우에는 그렇게 흑백이 되어버린 세상 속에서도 컬러풀한 세상을 재현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이죠. 즉 종교 분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우주인이라면 버디는 어린 왕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중간에 재미있는 소품이 하나 등장합니다. 바로 세제인데요. 이 세제는 처음에 광고로 영화 속에 등장합니다. 세금납부서를 받아든 버디의 어머니(카트리나 밸프)가 망연자실해 있을 때 라디오에서 광고가 나오죠. “주부님들, 효소 세제 스파클로 흰 옷을 더욱 희게 세탁하세요. 어머니들의 꿈!” 요컨대 세제는 처음 환상의 이미지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 세제가 실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폭도들이 상점을 약탈한 사이 버디가 자기도 모르게 주워든 장물로서였지요.


그러니까 세제란 어머니의 꿈이라는 광고 문구처럼 벨파스트를 떠나고 싶지 않았던 버디 어머니의 꿈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그 꿈은 아들이 도둑질을 하고 가족의 생명이 위협당하는 현실로 나타난 셈이지요. 버디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벨파스트를 떠나고 싶지 않은 모든 사람들은 세제의 꿈을 꾸었는지 모릅니다. 세상에 묻은 얼룩과 때가 아무리 짙어도 언젠가는 이것을 말끔하게 씻어낼 수 있으리라는 꿈을요. 하지만 재현된 것은 꿈이 아니라 얼룩과 때가 사람을 지워버릴 수도 있다는 공포였습니다.


이 사건 이후 버디의 가족은 결국 벨파스트를 떠나게 됩니다. 할아버지는 달나라로 떠나라고 말했지만 사실 진정한 달은 벨파스트였다는 점에서 버디의 가족은 달이 아니라 지구로 떠나는 셈입니다. 아폴로 11호가 착륙했을 때 모든 사람들은 달에 있었습니다. 그 달의 앞면은 환상과 낭만이라는 빛으로 빛났지만 뒷면은 냉전과 이분법이라는 어둠 속에 파묻혀 있었지요. 지구였던 벨파스트는 달이 되었고 달에서 살 수 없는 인간은 다른 지구를 찾아 떠났습니다. 버디의 가족도 그 중 하나였던 셈이지요.


영화 <벨파스트>는 시작과 끝에 빛을 되찾은 벨파스트를 보여줍니다. 요컨대 한 때 달이었던 벨파스트는 다시 지구가 된 셈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상실과 회복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그래피티로 칠해진 벽 속에 1969년이 있었던 것처럼 달이었던 벨파스트는 지구가 된 벨파스트 속에 있고 냉전과 대립의 과거는 역사라는 이름으로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영화 <벨파스트>는 회고하는 영화가 아니라 말하는 영화입니다. 달은 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고.



2023년 5월 5일부터 2023년 5월 1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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