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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May 23. 2023

영화 이야기 <원더>

영화 <원더>는 기형적인 얼굴을 가진 아이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인 어기(제이콥 트렘블레이)는 선천적인 문제로 수차례에 걸쳐 성형수술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얼굴이 되는데 실패했습니다. 특별히 잘생긴 얼굴이었다면 좋았겠지요. 뛰어난 외모는 ‘재능’에 속하니까요.


하지만 지나치게 못생긴 얼굴은 ‘장애’가 됩니다. 어기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학교를 다니지 못했습니다. 어기의 얼굴은 외관상으로 이상하긴 하지만 기능적으로 문제는 없습니다. 눈이 안 보이거나 귀가 안 들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가지 못했다는 것은 어기의 얼굴, 즉 외관이 사회 생활을 가로막는 장애로 작용했다는 뜻이지요.


외면과 내면 중에서 무엇이 더 중요할까 라는 질문에 윤리적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윤리 외에도 많은 것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윤리 이외의 것들은 종종 윤리보다 힘이 셉니다.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동일한 중력을 받지만 개중에는 중력에 더해 이 ‘윤리보다 강한 힘’을 견뎌야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기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기가 바깥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우주인의 헬멧을 쓰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시선을 견뎌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어기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공포와 동정 그리고 안도와 혐오의 감정이 뒤섞여 있습니다. 그 시선은 사람들이 사라진 뒤에도 상상 속에서 멈추지 않고 자신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어기가 종종 자신을 우주인으로 상상하는 것은 아마도 남들보다 무거운 중력을 견뎌야 하는 지구보다 훨씬 가벼운 우주가 좋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이 영화 속에서 남들보다 무거운 중력을 견뎌야 하는 사람은 사실 어기만이 아닙니다.


어기의 아버지(오웬 윌슨)는 장애를 가진 자식의 아버지이고 어머니(줄리아 로버츠)는 어기를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했습니다. 누나(이자벨라 빅도빅)는 어느 날 친구로부터 버림받았고 미란다(다니엘 로즈 러셀)는 가족을 상실했으며 줄리안(브라이스 게이사르)은 허영과 권위로 가득한 부모 밑에서 인간성을 상실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기능적인 장애를 가지지는 않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데 남들보다 무거운 중력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들이 짊어진 무거운 중력은 요컨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장애’이기도 합니다. 영화 <원더>는 이렇듯 어기라는 ‘특수한 장애’로부터 시작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안고 있는 ‘보편적 장애’로 이야기를 확장시킵니다. 이 이야기가 말해주는 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크고 작은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각자의 장애를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얼핏 나와 무관해 보이는 누군가의 장애 역시 나와 무관한 것이 아니며, 세상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 아니라 장애를 모른 체하는 사람과 장애를 끌어안는 사람으로 구분되어 있을 뿐이라고 영화는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겨운 싸움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라”는 영화의 대사는 결국 특정한 누군가를 향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것입니다. 이 영화에는 친절에 관한 격언이 종종 등장하는데 그 중 가장 첫 번째는 “올바름과 친절함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친절함을 선택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것과 친절한 것은 같은 것이니까요. 하지만 굳이 둘을 나눠놓은 것은 여기서 말하는 올바름이 윤리가 아닌 정의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따르면 정의란 가치이며, 윤리란 공동선입니다. 가치는 사람마다 다르게 부여할 수 있습니다. 가령 미란다나 줄리안에게 최고의 가치는 주목받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어기에게는 주목받는 것만큼 싫은 일도 없습니다. 요컨대 스스로가 생각하는 가치를 최우선으로 정하면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분쟁이 발생하게 됩니다. 미란다가 주목받기 위해 어기를 자신의 동생이라고 속인 후 비아와 결별하게 되는 것이나 줄리안이 단체 사진에서 어기를 지운 후 어기를 괴롭히는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지요.


게다가 정의라는 것을 따른다면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윤리적으로 올바른 것이 과연 정의로운 것인가. 그건 사람마다 다릅니다. 가령 어기 같은 아이가 있을 때 그 아이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은 윤리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괴롭히지 않는 한 어기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윤리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개중에는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의 호의를 받는 것은 특권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요컨대 모든 정의는 각자의 정의일 수밖에 없고 정의와 윤리는 그런 면에서 늘 일치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정의보다 윤리를 강조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건 바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세상 모든 사람들은 각자만의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나 한 번쯤은 박수를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고,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쳐주기 위해서는 바로 “올바름보다 친절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올바름이란 각자의 입장이고 친절이란 서로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타인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뜨거운 박수를 보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영화 <원더>는 사실 유연해 보여도 경직되어 있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시작부터 무엇이 윤리적으로 옳은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분명히 제시하고 그러한 정의를 관객에게 설득하려고 하기 때문이지요. 나아가 잘못을 저지르고 후회하는 악역은 모두 백인인 반면 가식 없는 도움으로 다가오는 사람은 모두 흑인이라는 점에서 편견을 깨뜨리는 편견을 심어주는 면도 있습니다. 이것은 영화가 했던 말과는 다르게 올바름과 친절 중에서 올바름을 선택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사랑스러운 것은 이것이 혼자만의 우주로 떠났던 어기가 모두의 지구로 귀환하는 여정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기는 처음 학교에 갔을 때 자기 자신을 우주인으로 상상했을 때에만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스스로를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기가 혼자만의 우주에서 지구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맨 얼굴로 세상과 대면했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누군가가 어기의 산소가 되어주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혼자만의 우주에 갇힌 사람이 우주복을 벗고 지구로 올 때까지 질식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 그것은 바로 친절입니다.



2023년 5월 13일부터 2023년 5월 14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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