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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Jul 02. 2023

영화 이야기 <플래툰>

살다보면 길을 잘못 드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분명 들어설 때는 옳은 방향이었는데 정처없이 헤매다가 간신히 나와보면 처음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만신창이가 되어있곤 하지요. 동전처럼 모든 것은 양면이 있습니다. 개인주의라는 것은 개인의 특성을 존중하는 동시에 개인의 한계는 존중하지 않지요. 개인주의 사회에서 개인이란 곧 생존의 단위입니다. 사람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말은 반대로 이야기하면 사람은 무엇이든 그 스스로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하니까요.


분명 그 말대로 개인의 잠재력과 가능성에 대해 지나치게 많이 말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자기계발서를 보면 개인은 마치 신처럼 보입니다. 안 되는 것도 못하는 것도 없지요. 그러나 사람이란 본래 어디에나 끼울 수 있는 만능 블록이 아니라 구멍이 숭숭 뚫린 스펀지 같은 것입니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보다는 오히려 무엇이든 스며들기 쉬운 쪽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어떤 상황이든 극복해낼 수 있는 개인이라는 건 환상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어떤 상황이든 거기에 적응하는 개인이 현실적이지요.


늘 즐거운 상상을 할 수 있는 환경 속에 있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제 경험으로만 보아도 그런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상황보다 원하지 않는 상황 속에 있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원하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은 자기가 되고 싶은 자신을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한 번 그 속에 들어가면 스펀지처럼 그 상황 자체에 적응해서 처음에 자기가 가장 싫어했던 사람의 행동조차도 어느샌가 따라하고 있는 경우가 생깁니다. 하얀 스펀지도 빨간 물감 속에 담그면 빨간 스펀지가 되는 것처럼요.


영화 <플래툰>은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한 인간이 본래의 성질을 잃어버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크리스 테일러(찰리 쉰)은 하층민만 징집되는 현실에 반대하고자 대학을 그만두고 자원하여 베트남으로 옵니다. 그는 용기와 도덕으로 무장한 일라이(윌렘 대포)의 소대에 배치되지만 전쟁 범죄를 저지른 반스(톰 베린저)에게 일라이가 살해당한 뒤 나중에 반스를 살해함으로써 결국 같은 전쟁 범죄자가 되고 맙니다.


이 영화가 말해주는 것은 윤리적 삶이란 개인의 의지와 특성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상황 속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크리스는 하층민만이 피를 흘리는 현실에 분노하여 자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인이 마을 사람을 약탈하고 동료를 죽이는 지옥 속에서 결국 똑같은 동료 살해자가 되고 말았지요. 크리스라는 개인의 윤리적 자질은 자원 입대를 하는 순간 이미 검증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크리스를 살인자로 만든 것은 그 자신이 아니라 그가 들어갔던 전쟁터인 것이지요.


요컨대 영화 <플래툰>은 최고의 윤리적 자질을 가진 사람조차 타락시키는 전쟁이라는 끔찍한 상황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묻는 방식과는 다릅니다. 문제는 개인이라는 심연 속에서 솟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개인이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영화는 말하지요. 달리 말하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개인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활동하는 환경 자체를 바꾸는 것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책임의 공유라는 말을 찾기가 어려워집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은 결국 누군가의 탓으로 귀결되고 사람들은 그 누군가가 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웁니다. 어쩌면 윤리가 훼손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일지도 모릅니다. 영화 속에서 마을을 약탈한 반스는 그들이 주민이 아니라 베트콩이라는 말로 스스로의 행위를 정당화합니다. 요컨대 상대에게 책임을 던져버리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크리스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일라이를 죽였기 때문이라는 명분은 있지만 그렇다고 개인이 법적 절차 없이 또 다른 개인을 단죄하는 것은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폭력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폭력이 지배하는 사회는 폭력을 양식화한 인간을 탄생시킵니다. 이러한 인간들이 만든 사회는 겉으로는 높게 솟은 빌딩과 첨단 문명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전쟁터와 다름없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무수한 기사에 사용되는 전쟁의 은유들은 사회가 서로에게 책임을 난사하는 전쟁터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수전 손택은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군사적인 은유는 전쟁광에게나 돌려주라고 성토하기도 했지요. 영화 <플래툰>이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베트남이지만 영화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베트남 전쟁을 만든 미국이니까요. 그리고 전쟁을 낳은 사회는 총알만 날아다니지 않을 뿐 전쟁터와 같습니다. 그곳에서는 책임이 총알처럼 날아다니고 무수한 윤리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습니다. 


2023년 5월 14일부터 2023년 5월 2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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