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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Jul 02. 2023

영화 이야기 <손님>

이 영화를 보고 맨 처음 떠오른 것은 ‘이동’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서 일어나는 참극의 원인은 이동의 제한이기 때문이고 반대로 참극이 일어나는 형태는 이동의 수행이기 때문이지요. 영화 <손님>은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라는 독일 민담에서 모티프를 가져왔습니다. 마을에서 쥐떼를 몰아낸 피리 부는 사나이는 보수를 받지 못하고 쫓겨나고 그 대가로 마을의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사라진다는 내용입니다. 이 민담에서 쥐떼를 몰아낸 방식이나 아이들을 데리고 사라지는 방식 역시 ‘이동’이었습니다.


영화에서 참극이 일어나는 원인은 표면과 이면으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자신의 아들마저 살해한 마을 사람들에 대한 복수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자는 반드시 보복당한다는 인과응보의 윤리적 뉘앙스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면의 원인은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 마을에 살았던 게 아닙니다. 마을 사람들은 전혀 다른 장소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이주해왔는데 이주의 원인 그리고 이주의 장소 모두 특별합니다. 먼저 이주의 원인은 6.25 전쟁으로 인해 원래 살던 곳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고 이주의 장소는 바로 원래 살던 곳에서 자신들이 쫓아낸 나병 환자들이 만든 마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순서상으로 보면 이렇게 됩니다. 마을 사람들은 나병 환자들을 마을에서 쫓아냈고 북한군은 마을 사람들을 마을에서 쫓아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나병 환자들의 마을을 점령했고 북한군은 마을 사람들이 살던 마을을 점령했습니다. 요컨대 지금의 마을이 만들어진 원인은 바로 폭력에 의한 강제 이동인 것입니다.


윤리적 문제를 논하기 전에 나병 환자들이 마을에서 쫓겨난 이유는 병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병으로 인해 자신들이 머물고 싶은 곳에 머물고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는 이동의 자유를 빼앗겼습니다. 원인은 다르지만 마을 사람들 역시 이동의 자유를 빼앗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살 곳을 찾아 자신들이 쫓아낸 나병 환자촌으로 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동의 자유를 상실하는 것. 이것이 참극의 시발점입니다. 이동의 자유를 상실하게 되면 크게 두 가지 현상이 생겨납니다. 하나는 분쟁의 발생입니다. 영화 속에서 마을 주민들이 나병 환자들을 살해하는 것이 그렇고 나병 환자를 먹은 쥐떼가 마을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장소와 식량은 한정되어 있고 이미 원주민들에게 배분이 끝난 상황에서 이주민이 들어오면 결국 장소와 식량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원주민 입장에서는 이주민에게 도덕적 지탄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래 갖고 있던 것인데 왜 그걸 빼앗으려고 하느냐고 힐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지요. 하지만 이주민 입장에서는 이것을 차지하지 못하면 죽음만이 기다릴 뿐인 경우 도덕적 문제를 따지기는 매우 어려워집니다. 왜냐하면 죽으라고 쫓아내는 것 역시 도덕적 지탄의 대상이기 때문이지요. 가진 것을 빼앗는 것이나 목숨을 빼앗는 것이나 어느 쪽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억울한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원주민 입장에서 먹을 것과 살 곳을 빼앗기면 억울한 것이야 말로 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이주민 역시 자신들이 원해서 이곳으로 온 게 아닙니다. 원주민 입장에서는 침략이지만 이주민 입장에서는 강제 이주에 해당합니다. 이주민 역시 자신들의 터전을 빼앗기고 방랑하며 심지어 남의 터전을 빼앗아야 하는 딜레마에 처해 있습니다. 역시 어느 쪽이 더 억울한가에 대해 논평할 수 없습니다. 이동의 자유를 상실하게 하는 것은 이렇듯 폭력을 야기하는 것입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이동의 자유를 상실하는 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폭력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학교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한 방의 정원이 약 33명 정도였는데 지금은 27명 정도라고 알고 있습니다. 즉 2~30명의 학생이 한 장소에 있고 등교할 때부터 하교할 때까지 이 장소를 떠날 수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 괴롭힘을 당하게 되더라도 피할 장소가 없는 것입니다.


학교 폭력은 거의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사이에서 발생합니다. 대학생들 중에서 학교 폭력을 당했다는 사례는 그에 비하면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대학생부터는 이미 성인이기 때문에 학교 폭력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바로 한 반이라는 제도가 없고 이동의 자유를 묶어놓는 교육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학생들은 수업을 들으러 이 강의실 저 강의실로 옮겨다닙니다. 학기 초에는 개강한 뒤라도 수업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즉 누군가 괴롭힘을 시작하더라도 얼마든지 그로부터 벗어날 장소가 있는 것입니다.


대개 괴롭힘은 장난으로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표적을 삼고 사냥하듯 피해자를 학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한 반에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반 내 모든 학생들의 성격과 행동은 서로에게 온전히 노출됩니다. 가해자는 먹이를 노리듯 피해자를 찾고 장난은 미끼처럼 여기저기 떨어집니다. 그 와중에 장난의 정도는 점진적으로 강해지고 어느새 장난이라고 부를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며 설령 장난의 단계에서 혐오감을 느꼈다고 하더라도 피해자는 안전한 곳으로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해자와 피해자가 뚜렷해지면 가해자는 하교 후에도 피해자를 끊임없이 불러냅니다. 즉 교실이라는 제도가 이동의 자유를 박탈함으로써 폭력을 야기한 것처럼 그것은 교실 바깥에서도 그대로 재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이동의 자유를 박탈함으로써 발생하는 두 번째 현상은 바로 권력 구조의 발생입니다. 학교 폭력에서는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자가 가해자이고 제한당하는 자가 피해자입니다. 영화 속에서 마을 사람들을 쫓아낸 북한군은 권력자이며 마을 사람들은 권력에 지배당하는 자들이고, 나병 환자촌에서 마을 사람들은 권력자로 돌변하고 나병 환자들은 지배당하는 자들로 전락합니다. 요컨대 이동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은 곧 권력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는 촌장의 말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동의 자유를 상실하여 분쟁을 일으키고 이 분쟁으로 말미암아 권력의 구조가 형성되는 것. 이것이 영화 <손님>에서 일어난 참극의 이면적 이유입니다. 사람에 한해서만 말했지만 사실 쥐떼 역시 엄밀하게 말하면 이주자에 속합니다. 마을 사람들의 양식을 약탈하고 심지어 사람마저 공격하는 쥐떼는 마을을 차지하려고 하는 침략자이며 촌장과 마을 사람들은 그런 침략자에 맞서 터전을 지키려는 자들이지요. 그런데 마을 사람들과 쥐떼와의 싸움에는 누구도 윤리적 우위를 점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과 짐승의 싸움이어서가 아니라 마을 사람들 역시 나병 환자들을 잡아먹은 짐승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에서 참극이 발생하는 표면적 이유는 인과응보라는 윤리에 해당하지만 실제로 이곳에는 윤리가 없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나병 환자들을 살해했고 쥐들이 나병 환자들을 잡아먹음으로써 인간을 먹이로 인식하게 됩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로도 읽을 수 있는데 왜냐하면 마을 사람들이 나병 환자를 죽인 것 역시 그들을 먹이로 삼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쥐들은 물리적인 의미에서 인간을 먹이로 인식하는 동시에 서로가 서로를 먹이로 여기는, 홉스의 말을 빌리자면 서로가 서로에게 늑대인 사회적 상황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마을 사람들과 쥐들은 형태만 다를 뿐 사회적 존재로서 그 속성은 같은 셈이지요.


그러니 이것은 인과응보가 아니라 순환이라고 읽어야 진실에 가까울 것입니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침략하고, 피해자는 다시 가해자로 바뀌어 새로운 피해자를 만듦으로써 사회는 모두가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기이한 순환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에 이름을 붙인다면 ‘악의 순환’이라는 표현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악의 순환은 바로 이동의 자유를 상실할 때 발생한다는 게 영화 <손님>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영화의 제목인 <손님>이라는 단어는 방문객이라는 뜻과 적이라는 뜻을 함께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역병을 손님이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그건 아마도 사람의 힘으로 돌려보낼 수 없는 이 역병이 손님처럼 머물다가 가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붙인 이름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손님이라는 말은 언젠가 떠나는 사람에게 쓰는 말이니까요. 즉 손님이라는 단어는 떠날 것을 염두에 둔 말이며 떠날 것을 염두에 둔 이유는 언제 돌변하여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침략자가 될 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인을 마을 사람들이 제공한 것은 맞지만 결과적으로 우룡은 쥐떼를 다시 몰고와서 마을 사람들을 모두 살해하고 마을의 주인이 됩니다. 즉 그는 손님으로 와서 주인이 된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그가 나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그에게 나쁜 짓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나쁜 짓을 한 이유는 바로 마을의 권력을 다른 누군가에게 넘기지 않으려는 목적에서였습니다. 요컨대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악의 순환에 충실했던 것이지요. 같은 논리로 우룡이 마을 사람들을 죽인 것 역시 납득할 수 있는 정황이 있다고는 하나 결과적으로는 악의 순환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말미에 우룡이 아이들을 데리고 쥐떼를 가둬두었던 동굴로 가는 것은 이러한 악의 순환을 끊으려는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면서 관객을 응시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이동의 자유를 상실하고 악의 순환 속으로 편입된다. 이 순환을 멈추는 방법은 바로 죽음뿐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떠한가. 풀이하면 대략 이런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손님>은 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선한 인간조차 악의 순환 속으로 편입되는 순간 사람을 즐겁게 하는 광대가 아닌 무참한 광인이 된다는 면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일면 생각할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래도 마지막에 아이들을 죽이는 극단성은 좀 지나친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순간을 기점을 그 전까지 '보여주던' 영화는 '가르치는' 영화로 바뀌기 때문이지요. 특히 우룡이 관객을 정면으로 쳐다보는 장면은 뭐랄까 관객이 수용하기 어려운 다소 공격적인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서양의 민담을 가져와서 인간사의 어두운 면을 열어보는 열쇠로 사용한 것은 꽤나 흥미있는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잔혹 동화라는 장르를 좋아하시는 분께는 추천드릴 만한 영화입니다.


2023년 5월 23일부터 2023년 7월 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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