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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Jul 20. 2023

영화 이야기 <세 번째 살인>

도쿄의 천변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피해자는 식품 공장 사장이고 가해자는 얼마 전 식품 공장에서 해고된 미스미라는 남자입니다. 미스미는 피해자의 후두부를 스패너로 내려쳐서 살해한 후 불에 태웠습니다. 그런데 그가 살인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사실 그는 전과자로 약 30년 전에 훗카이도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살인을 저지른 적이 있습니다.


영화 <세 번째 살인>은 제목부터 감독의 의도를 짙게 드러냅니다. 이 영화 속에서 살인은 두 번 일어났습니다. 살인자는 둘 다 미스미로 훗카이도에서 처음 그리고 도쿄에서 두 번째입니다. 그런데 왜 제목을 세 번째 살인이라고 지었는가. 이 영화 속에는 미스미가 저지른 두 번의 살인 외에 하나의 죽음이 더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법정이 미스미에게 내린 사형 선고입니다.


말하자면 감독은 미스미라는 개인이 또 다른 개인을 임의적으로 죽인 두 번의 사건과 법정에서 심리를 통해 내려진 선고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즉 검사와 변호사가 서로의 주장을 다투고 형법에 근거하여 판사가 내린 사형 선고조차 똑같은 ‘살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개인이 자신의 의도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국가가 공적 절차를 거쳐 사람을 죽이는 것은 과연 다른가. 분명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있습니다. 살인 사건의 피해자든 사형 선고의 범인이든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생명을 빼앗긴다는 점은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면에서만 본다면 타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생명을 빼앗는 행위를 살인으로 규정하고 처벌하도록 하는 국가가 정작 그 스스로는 타인의 생명을 해친다는 모순을 갖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살인 사건의 피해자는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고 사형 선고를 받은 범인은 죄를 지은 범죄자라는 점에서 두 사람을 같은 대상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범인은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스스로의 목숨으로 갚는 것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감독은 살인 사건의 피해자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을 살인으로 규정했습니다. 일단 그 이유는 강도 살인이라는 표면 안에 있는 이면의 사실 때문으로 보입니다.


죽은 사장, 즉 피해자는 윤리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원산지를 속인 위장 식품을 들여와서 판매한 악덕 업자였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딸마저 성적으로 학대한 인면수심의 인간이었습니다. 만약 국가가 죄인에게 사형을 선고할 때 그 사형의 정당성이 대상의 위법 행위 혹은 윤리적 타락에 근거하고 있다면, 미스미가 사장을 죽인 것은 국가를 대신해 사형을 집행했을 뿐 억울한 사람을 죽인 것은 아닙니다. 이 경우 오히려 미스미는 살인이라는 행위를 통해 정의를 실현한 것이며, 이런 미스미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은 역설적으로 잘못이 없는 미스미의 목숨을 국가가 강탈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제목과 같이 ‘세 번째 살인’이 되는 셈이지요.


하지만 그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사형 선고가 살인이 되는 이유는 그러한 이면의 사실보다 표면의 절차에 있습니다. 어떤 이유든 간에 미스미가 사장을 죽인 것은 한 개인이 다른 개인의 목숨을 빼앗은 것이며, 이때 살인은 공적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임의적으로 실행되었습니다. 말하자면 미스미는 그 어떤 이유로든 개인의 판단에 의해 살인을 저지른 것입니다.


설령 미스미의 살인이 갱생의 여지가 없는 인간에 대한 징벌이라고 해도, 다시 말해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사법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라고 해도 이 살인이 범죄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임의성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자기 마음대로 타인을 징벌할 권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윤리적 이유를 근거로 개인이 개인을 임의로 징벌할 수 있다면 세상은 그야말로 무법천지가 되고 말겠지요.


문제는 바로 이 지점입니다. 그렇다면 국가의 사형 선고, 즉 법원에서 검사와 변호사 그리고 판사가 최종 심리를 거쳐 내리는 선고는 과연 임의적이지 않은가.


이 영화 속에서 검사와 변호사 그리고 판사는 서로 독립된 역할이 아니라 협의체로 보입니다. 검사와 변호사는 법정에서는 대립하지만 법정 뒤에 있는 작은 방에서는 판사와 더불어 사건의 내용을 ‘협의’합니다. 이때 법원은 어느 쪽이 올바른지를 가리는 진실의 장이 아니라 법복을 입은 사무직의 ‘직장’으로 전락하고 사건은 ‘업무’가 되며 판결은 ‘합의’로 추락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본다면 법원의 최종 판결은 법의 집행이 아니라 법을 대행하는 사람들의 ‘임의적 합의’가 됩니다. 다시 말해 사형은 국가의 선고가 아니라 사람들의 결정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법은 입법부와 사법부에서 만드는 일종의 규칙이지만 실제로는 마치 원래 정해진 준령처럼 선험적인 후광을 받습니다. 말하자면 법은 일종의 진리처럼 여겨져서 특정 법령에 의해 내리는 선고는 사람이 내린 것이 아니라 선험적 진리의 결과로 인식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사람들의 입장과 무관하게 사회를 지키고 유지하는 규칙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실제 절차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과 사람의 합의로 진행됩니다. 이것은 선험적인 규칙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히 자유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말하자면 무엇이 올바른가는 법에 적혀 있는 게 아니라 법을 다루는 사람들의 합의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지요. 이 경우 합의하는 사람이 달라지면 비슷한 사건이라도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법원에서 내리는 선고는 개인의 임의성에 비해 얼마나 그 정당성을 담보할 수 있는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법이라는 절대적인 규칙이 있음으로 해서 나는 내가 잘못을 하지 않은 일에 당당히 대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합의에 의해 결정된다면 결과적으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정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영화의 제목인 <세 번째 살인>이란 결국 이러한 임의성에 대한 지적입니다. 그것은 사형이라는 법적 외피를 둘렀을 뿐 실제로는 미스미가 저지른 임의적 살인과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나아가 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를 당한 딸 사키에를 보호하기 위해 진술을 번복한 게 아니냐는 시게모리의 말에 그건 그저 우연일 뿐이라고 대답하는 미스미를 보면 이 임의성은 단지 법원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인간 사회를 전체를 겨냥하는 것으로 확대됩니다.


미스미가 처음 살인을 저질렀을 때 그를 체포한 훗카이도의 경찰은 미스미를 두고 ‘텅 빈 그릇’ 같았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미스미가 살인을 저지른 것이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그냥 저지른 것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사형 대신 징역 판결을 내린 시게모리의 아버지 역시 그를 두고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간’이라고 힐난합니다. 다시 말해 그의 첫 번째 살인에는 그를 이해해줄 요소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두 번째 살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키에를 보호하기 위해서 일부러 진술을 번복한 게 아니냐는 시게모리의 말에 미스미는 “정신 차려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만약 그 말이 맞다면 나 같은 인간도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겠다고 말하지요. 이 말은 그가 사장을 죽인 것이 이제까지 시게모리와 관객이 믿었던 것처럼 납득할 만한 윤리적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그냥 죽였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이 경우 첫 번째 살인 때처럼 그가 진술을 계속 바꾸는 것도 설명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유가 없으니까 상대가 물을 때마다 계속 말이 바뀌는 것이지요.


따라서 미스미가 정말로 그냥 사장을 죽인 것이라면 시게모리는 미스미를 ‘오해’한 것이 됩니다. 즉 시게모리는 ‘임의적’으로 미스미를 이해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임의적인 이해로 인해 시게모리는 원래 자신의 모습이었던 냉소적인 변호사를 그만두고 윤리에 불타서 정의를 위해 헌신하는 인간으로, 딸을 사랑할 줄 아는 남자로 거듭났습니다. 말하자면 어떤 내적 정합성이나 인과관계도 없이 말 그대로 살인도 변화도 우연히 일어난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인간사를 관통하는 법칙이 윤리나 질서가 아닌 우연과 오해라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이때 인간은 보편적 선을 지닌 윤리적 존재가 아니라 동물과 다를 바 없이 자연 법칙에 종속된 존재로 전락합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인간이 이룬 모든 것은 모두 우연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것이 이 영화의 전부는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것은 이 영화가 그리는 좌표의 X축입니다. 이 영화의 Y축은 여전히 윤리와 질서라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미스미가 저지른 첫 번째 살인이 야쿠자에게 고통받는 사람을 대신해서 저지른 것이라는 가정과 두 번째 살인 역시 시게모리의 추측대로 사키에를 위한 정의의 실현이었다는 가정입니다.


고통받는 여자아이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상대를 구원하고 혹시 모를 생명의 끈까지 버려가며 구설수를 방지한 것이라면 그는 법정 권력이 서로의 이득을 다투고 있을 때 진정으로 정의를 실현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가 새들의 무덤에 새긴 십자가나 사장을 살해하고 남긴 십자가는 바로 타인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죽음을 택한 예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가정이 맞다면 영화의 제목인 <세 번째 살인>은 말 그대로 정의로운 한 사람을 국가 권력이 죽였다는 뜻이 되겠지요.


요컨대 영화 <세 번째 살인>은 임의성과 우연이라는 X축과 윤리와 질서라는 Y축으로 만든 십자가입니다. 이 영화는 인간에 대한 극단적인 두 가지 이해 방향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것을 교차시키고 있습니다. 영화는 어느 쪽이 답이라고 하지도 않고 어느 쪽이 답이 아니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단지 인간은 그것이 교차하는 한가운데에 서 있다고 말할 뿐이지요. 마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나온 시게모리의 모습처럼요. 그 모습은 길을 잃은 인간의 모습처럼 보이는 한편 함부로 길을 선택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도 겹쳐 있습니다. 마치 교도소 유리창에 겹친 시게모리와 미스미의 얼굴처럼요.



2023년 7월 8일부터 2023년 7월 1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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