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시 Aug 03. 2023

영화 이야기 <애프터썬>

영화 <애프터썬>은 어른이 된 한 여자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담은 영상을 돌려보는 이야기입니다. 뒤를 돌아보는 이야기는 대개 이렇습니다. 현재는 텅 빈 그릇처럼 설정되어 있고 과거는 달콤한 빙수처럼 그 속에 담깁니다. 그래서 완성된 빙수를 두고 이것이 새로운 현재라고 말하는 식이지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 과거는 얼음조각처럼 쏟아지지만 그것을 담는 그릇은 없습니다. 영상을 바라보는 여자의 모습은 실루엣을 제외하면 영화의 마지막에야 한 번 등장합니다. 그것은 이 영화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달라진 나’가 아니라 ‘달라지고 싶었던 나’이기 때문입니다.


영상을 보는 모습이 등장하는 건 마지막에서지만 성인 소피의 모습은 영화 곳곳에 삽입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 모습은 온전하지는 않습니다. 관객이 성인 소피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성정체성을 보여주는 장면을 제외하면 빛이 명멸하는 어둠의 공간에서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찰나의 인상들뿐입니다. 성인 소피는 소피의 현재이므로 그녀의 현재는 빛과 어둠 속에서 명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이것이 성인 소피로 하여금 아이 소피의 영상을 찾아보게 된 이유일 것입니다.


성인 소피가 있는 공간은 어둠의 공간입니다. 빛이 터질 때 드러나는 것은 순간의 모습, 즉 인상입니다. 말하자면 그녀의 현재를 붙잡고 있는 것은 카메라의 시선과 같습니다. 어둠 속에서 플래쉬가 터질 때 카메라는 대상이 가진 순간을 움켜쥡니다. 이 순간은 대상의 일부를 보여줄 뿐이지만 그 일부는 독립된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짐작하게 만드는 일부입니다. 한 사람의 일부를 가지고 전체를 짐작하게 만드는 시선을 편견이라고 합니다. 즉 어른 소피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는 편견의 세상인 것입니다.


이 편견의 세상은 이렇습니다. 쉴 새 없이 터지는 카메라 플래쉬는 나의 순간들을 영원에 가깝게 찍어내지만 빛이 터지는 그 사이사이에는 어둠에 잠긴 내가 있습니다. 드러난 나와 감춰진 나 중에서 어느 것이 진정한 나인지에 대한 해답은 주어지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은 위태롭게 명멸하는 삶뿐입니다. 영화 속에서 성인 소피의 성정체성을 보여주는 장면도 명멸하는 삶의 자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소수자는 도덕적 판단을 떠나 삶의 위태로움을 보여주는 기표이기 때문입니다.


사진으로서의 나는 나의 일부밖에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 말은 반대로 말하면 순간의 인상이 포착하는 것은 온전한 나가 아니라 훼손된 나라는 것입니다. 성인 소피가 어린 시절 영상을 찾아보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수많은 사진으로 분절된 내가 아니라 끊어지지 않는 영상 속에 오롯이 담긴 나를 발견하고 싶었기 때문이겠지요. 순간이 아닌 영원으로 존재하던 시절의 나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애프터썬>은 결국 기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서 기억은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는 등장인물이 핸드 헬드 카메라로 직접 찍은 흐릿한 영상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의 촬영 감독이 고정식 카메라로 찍은 선명한 영상입니다. 이 두 개가 다른 것은 전자가 사실이라면 후자는 기억이기 때문입니다. 캠코더로 찍은 흐릿한 영상은 정말 그때 있었던 일입니다. 하지만 고정식 카메라로 찍은 선명한 영상은 바로 현재의 시점에서 영상을 보고 있는 성인 소피의 기억입니다.


기억의 화질이 영상의 화질보다 좋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기억은 기억하는 시점의 기억이기 때문이지요. 똑같이 11살의 소피를 보여주고 있어도 영상 속 소피와 달리 기억 속 소피는 주관의 반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기억은 분명 과거를 보여주고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영상 속 소피가 그때 무슨 기분이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소피가 어떤 생각인지 또 무슨 기분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선명한 화질로 보여지는 소피의 모습이 다름 아닌 현재 소피의 반영이기 때문이지요. 말하자면 영상과 달리 기억 속 소피는 11살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실제로는 지금의 소피이기도 한 것입니다.


영화 <애프터썬>이 과거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영상과 더불어 기억을 선택한 것은 그것이 과거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도 보여주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는 영상이라는 과거와 기억이라는 현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흔히 과거로 돌아가는 타임슬립의 경우 과거와 현재의 분절을 전제로 합니다. 과거가 현재와 무관한 지점에 독립적으로 있음으로 해서 현재의 나는 과거로 돌아갈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 <애프터썬>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함으로써 우리에게 소중한 날들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굳거나 박제되지 않고 우리와 함께 흐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과거가 현재와 함께 흐르고 있다는 것은 영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과거와 현재를 분절시키는 것은 시간을 단선화시키는 것이고 그것은 곧 탄생부터 죽음으로 이어진 단 하나의 선만을 연상시키게 되어 필연적으로 죽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와 달리 과거와 현재가 함께 흐르는 것은 사라진 것도 멈춘 것도 없음을 말해주지요. 그리고 이것은 사진과 영상에 대한 비유이기도 합니다. 찰나의 플래쉬로 대상을 분절시키는 것이 편견, 즉 대상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끊어지지 않고 재생는 영상은 영원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편견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성인 소피가 자신의 어린 시절 영상을 찾아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단지 영상이어서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연히 영상에 담긴 내용입니다. 소피가 보는 영상은 11살 때 아빠와 단둘이서 튀르키예로 떠났던 휴가입니다. 현재의 소피가 떠올리는 기억 속에서 그날의 소피는 두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는 어른에 대한 동경입니다. 튀르키예는 이국이면서 동서양의 중간지대이기도 합니다. 그런 지리적 환경처럼 11살인 소피는 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그 중간의 낯선 시공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중간이라는 모호함이 싫어서 어쩌면 소피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스스로에게 어른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면 자신이 상상하는 어른이 어떤 어른인가에 대해서도 물어야 합니다. 소피에게는 아직 자신이 상상하는 어른의 형태가 구체적으로 잡혀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피는 행글라이더처럼 상승의 의미로서의 어른을 상상하거나 혹은 보호자 없이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구경하고 만져보는 자기결정권자로서의 어른, 이성 간의 성애처럼 에로스적 긴장감으로서의 어른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다른 하나는 바로 아빠에 대한 불안입니다. 소피의 부모는 이혼했습니다. 소피는 엄마와 살고, 영화 중간에 아빠가 엄마와 하는 통화를 들어보면 구체적인 내용은 없지만 대략 새로운 연인이나 새로운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걸로 짐작됩니다. 요컨대 엄마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반면 아빠는 하던 일도 그만두고 미래에 대한 전망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엄마가 정말로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거라면 소피는 그 가정의 일원이 되어 아빠와는 점점 더 멀어지겠지요. 소피가 가진 아빠에 대한 불안감은 그러니까 아빠를 상실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입니다. 만약 아빠도 엄마 못지 않게 새로운 인생을 잘 준비하고 있다면 이런 불안은 조금 덜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처럼의 휴가에 공사 중인 호텔, 카펫 가격을 물어보고 겸연쩍어 하는 아빠의 얼굴 등은 이런 불안은 오히려 부추기기만 하지요.


아빠에 대한 소피의 불안은 두 개의 극단적인 상상으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검은 바다 속으로 들어간 아빠가 다시 나오지 않는 꿈으로 이것은 아빠를 상실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극대화된 형태입니다. 다른 하나는 카펫을 산 뒤 그 위에 누워보는 상상입니다. 돈이 없어서 못 샀던 게 아니라는 상상은 아빠가 실제로는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암시합니다. 다시 말해 아빠를 생각하는 소피의 마음은 상실에 대한 두려움과 그 두려움에 맞서는 희망의 양 갈래로 어지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어른에 대한 동경과 아빠에 대한 불안은 서로 무관한 생각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면 이렇게 됩니다. ‘나는 어른이 되고 싶지만 어른이 이토록 아이를 불안하게 만드는 거라면 과연.’ 지나친 추측일지도 모르지만 소피가 동성연인과 함께 사는 삶을 선택한 것은 어쩌면 그러한 어린 시절의 불안이 반영된 결과일지도 모르지요. 요컨대 11살의 소피를 바라보는 성인 소피의 뇌리에는 그때 느꼈다고 생각한 동경과 환멸의 감정이 여전히 살아 숨쉬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빠가 나에게 준 것이 어른에 대한 환멸일 뿐이라면 성인 소피는 왜 이 영상을 보고 있는 것일까요.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차오르는 어른에 대한 동경을 죽음의 이미지로 덧칠해버린 게 아빠라면 소피는 영원이 아니라 삶에 대한 환멸을 확인하기 위해 이 영상을 보고 있는 것일까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환멸이 아니라 바로 환멸 이후에 아빠를 대하는 소피의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아빠와 다툰 후 소피는 호텔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돌아오지만 호텔방은 문이 잠겨 있고 결국 로비에서 잠이 듭니다. 그때 소피가 꾸는 꿈이 바로 아빠가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꿈입니다. 이것은 아빠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반영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빠에게 못된 말을 한 죄책감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이른바 아빠가 나 때문에 죽으면 어쩌지 라는 것이지요. 


소피는 꿈에서 깨어난 후 직원의 도움으로 방에 들어갑니다. 방에 들어가보니 아빠는 자기가 쓰는 침대에서 이미 잠들어 있습니다. 소피는 잠든 아빠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원래 베란다로 나갑니다. 이것은 아빠와 딸의 역할이 바뀐 것을 제외하면 호텔에 처음 들어왔을 때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때는 아빠가 소피의 이불을 덮어주고 베란다로 나갔었지요. 말하자면 소피가 문을 잠그고 잠들어버린 아빠를 용서하는 시점에서 원래의 보호자(아빠)-피보호자(소피)라는 관계는 보호자(소피)-피보호자(아빠)의 관계로 역전됩니다. 나아가 이 관계는 소피가 사람들을 모아 아빠의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고 아빠가 벌거벗은 채로 우는 장면을 통해 극대화됩니다.


그러니까 11살의 소피가 아빠와 함께 한 투르키예 여행에서 느꼈던 것. 정확하게 말하면 현재의 소피가 11살의 소피의 영상을 보면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느끼는 것은 바로 어른의 형태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높이도 아니고 자기결정권자도 성적 행위도 아닌 바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연약한 모습을 지켜주는 보호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보호자로서의 어른은 나이에 관계없이 될 수 있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아이-어른의 이분법적 구분은 과거-현재의 분절과 마찬가지로 무화됩니다.


영상이 끝나면 카메라는 화면을 돌려 조금 전까지 영상을 바라보던 현재 소피의 모습을 비춰줍니다. 즉 기억으로서의 재생은 이 시점에서 종료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카메라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회전하여 11살의 소피를 배웅하는 아빠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순서 상으로 보면 11살의 소피가 있고 11살의 소피를 바라보는 현재의 소피가 있으며 현재의 소피를 바라보는 그날의 아빠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다시 과거로 움직이는 원의 형태를 보여주면서 시간의 모양이 직선이 아니라 원임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과거를 돌아보고 과거가 멈추거나 정지한 것이 아니라 현재와 함께 순환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라는 구분은 없어집니다. 11살의 소피를 배웅하던 아빠는 물론 지금 없습니다. 하지만 11살의 나를 기억할 수 있다면 11살의 나를 배웅하던 아빠의 모습 역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내게 어른이 되는 법을 알려준 나의 피호보자이자 유년을 떠올리게 하는 나의 보호자로서 영원히 남아 있겠지요.


<애프터썬>은 햇볕에 탄 후에 바르는 선크림을 말합니다. 화상을 입기 전에 바르는 제품이 아니라 화상을 입은 후에 바르는 제품인 것이지요. 영화 속에서 화상은 아마도 카메라의 플래쉬가 만들어내는 불빛과 그 불빛에 찍인 편견의 모습들일 것입니다. 성인 소피는 이 화상을 치료하기 위해서 자신의 어린 시절 영상을 틀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본 것은 다름 아닌 햇볕에 타기 전에 선크림을 발라주는 아빠의 모습이었지요.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상처가 난 후에 바르는 약은 바로 상처가 나기 전에 선크림을 발라주던 누군가의 모습이라는 것을.



2023년 7월 17일부터 2023년 7월 19일까지


보고


생각하고


쓰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영화 이야기 <세 번째 살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