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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Aug 15. 2023

영화 이야기 <파벨만스>

이 영화는 성공한 영화 감독의 앞모습을 보여주는 대신 영화 감독을 꿈꾸는 청년의 뒷모습을 보여주면서 끝납니다. 정면은 결과입니다. 성공한 자의 얼굴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 앞에 있었던 모든 이야기가 끝내 이 얼굴로 수렴될 것임을 알게 됩니다. 어떤 위험한 일도 서러운 일도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을 뚫고 나올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때 과거는 현재의 재료로 소모됩니다.


하지만 이제 막 시작하려는 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그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음을 말합니다. 또한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사라지지 않고 그 뒷모습을 지키는 하나의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 영화는 연출을 맡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자전적 영화입니다. 요컨대 스티븐 스필버그는 성공한 자신의 정면 대신 시작할 때 자신의 뒷면을 지금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말인즉슨 그는 아직도 처음을 잊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여전히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영화 <파벨만스>는 결국 초심에 관한 영화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가 한 남성의 성장 서사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그 끝을 종점이 아니라 출발점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영화는 어떻게 해서 그는 완성되었나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 그는 시작하게 되었나에 대해 말합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바로 인간은 어떻게 꿈을 꾸게 되는가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꿈이라는 것은 언젠인가부터 개인의 전유물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아주 특별한 케이스를 제외하면 대개 꿈이라는 것은 공유의 대상이라기보다 경쟁의 대상입니다. 나와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은 너무나도 많은 반면 꿈의 기회를 그것보다 훨씬 적기 때문에 나는 꿈을 이루기 위해 나와 같은 꿈을 꾸는 자들과 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꿈은 공유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스티븐 스필버그가 스티븐 스필버그일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단 하나의 스티븐 스필버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일 만 명의 스티븐 스필버그라면 누구도 그 이름에 열광하지 않겠지요.


이런 생각은 꿈이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줍니다. 꿈은 단지 도달해야 할 목표이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타인과 구별할 수 있는 분명한 기호인 것입니다. 꿈을 포기한다고 생각할 때 가장 두려운 것은 바로 불특정 다수 속으로 빨려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꿈을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뚜렷하게 빛나는 나의 색깔은 꿈을 포기하는 순간 사라져 버립니다. 이것은 죽음의 공포입니다.


이 말은 거꾸로 꿈이 삶의 징후임을 말합니다. 꿈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남들과 다른 나를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은 곧 꿈이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고유한 정체성이 삶의 징후가 될 수 있다는 말은 삶이란 곧 개인의 삶을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들과는 다른 삶. 이것은 삶의 목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삶의 근거입니다.


그렇다면 왜 스티븐 스필버그는 이 영화의 제목을 <파벨만>이 아니라 <파벨만스>라고 했을까요. 파벨만스라는 것은 파벨만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즉 파벨만 가족이라는 뜻이지요.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이 영화 감독을 꿈꾸는 것은 오직 샘 파벨만 뿐입니다. 다른 가족들은 영화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감독이 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영화의 주인공인 샘 파벨만이 아니라 파벨만 가족 전체를 뜻하는 파벨만스로 영화의 제목을 고른 것일까요.


그건 바로 샘 파벨만이 영화 감독을 꿈꾸게 된 경로가 혼자만의 경험이나 사고가 아니라 바로 자신을 둘러싼 가족을 통해서이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꿈은 개인의 영역 안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의 바깥을 둘러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탄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꿈이 한 개인의 정체성과 성장을 암시하는 경로를 뜻하는 기존의 인식과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영화 <파벨만스>는 분명 꿈꾸는 자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혼자가 아니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어린 샘 파벨만은 부모님과 함께 처음 <지상 최대의 쇼>라는 영화를 보게 됩니다. 샘은 집에 있는 카메라와 장난감들을 이용해 <지상 최대의 쇼>에 나온 열차 충돌 장면을 되풀이해서 찍습니다. 이 과정에서 샘이 알게 되는 것은 기차와 자동차가 충돌했다는 하나의 사실이 어느 각도 혹은 어떤 거리에서 촬영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과 효과를 불러 일으킨다는 점입니다. 즉 어느 곳을 쳐다보느냐에 의해 하나의 사실은 여러 개의 의미로 분화됩니다. 이 말은 곧 영상을 촬영하는 방식에 따라 현실은 전혀 다른 의미로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이고 여기서 더 나아가면 이런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객관적 현실은 존재하지 않고 주관적 의미만 존재한다. 내가 쳐다보는 곳은 의미를 부여받고 내가 쳐다보지 않는 곳은 사라진다. 나는 카메라로 의미를 만들어낸다. 의미는 세계다. 나는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


샘이 영화에 점차 빠져드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창조자로서의 권위와 희열 때문일 것입니다. 남들이 만든 것만을 사용하다가 스스로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건 세상에 내 자리가 있음을 깨닫게 되는 일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창조라는 것은 만드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일입니다. 만든 것만을 받던 수여자에서 만든 것을 나눠주는 기여자라는 새로운 면이 생겨남으로써 비로소 세상과 주고받는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상호의존적 관계는 개인으로 하여금 삶의 정합성을 느끼게 해줍니다. 말하자면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 말입니다.


샘이 영화를 통해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일은 그 혼자만이 한 일이 아닙니다. 물론 영화의 인상을 기억했다가 장난감들로 그 장면을 재현해보는 일은 샘이 혼자서 한 일입니다. 하지만 극장으로 샘을 인도한 일이나 샘이 만든 영상을 보고 감탄함으로써 아이가 그 분야에 흥미를 가지도록 한 것은 부모님에 의해서입니다. 계단을 오르는 건 샘이 혼자서 하고 있는 일이지만 그 계단으로 올라갈 수 있는 문을 열어준 건 바로 샘의 가족이었던 것이지요. 누구나 영화를 보고 집에서 영상을 촬영해보지 않는 것처럼 누구나 영화관으로 아이를 데려가고 아이가 영상을 촬영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샘이 영화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샘을 둘러싼 가족이라는 세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샘이 카메라를 놓게 만든 것 역시 가족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샘은 캠핑을 가서 찍은 영상을 돌려보다가 그 속에서 엄마와 베니가 친구 이상의 관계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샘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엄마가 아빠의 가장 친한 친구와 불륜 관계라는 사실도 그렇지만 더욱 더 충격적인 것은 바로 그 장면을 자신이 찍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찍고도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샘이 영화에 빠져들게 된 것은 자신의 상상을 현실로 재현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상을 현실로 재현한다는 건 현실을 만들어간다는 것이고 현실을 만드는 건 곧 자기 의지대로 움직이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샘은 자신이 찍은 영상에서 자기가 결코 보고 싶지 않았던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씩이나. 게다가 그것을 촬영하는 내내 샘은 그런 사실이 있다는 것조차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 사실이 샘에게 충격적인 이유는 바로 자기 의지대로 만드는 세상이라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카메라는 모든 것을 찍지 않고 촬영자가 선택한 장면만을 찍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이렇게 선택한 장면들의 구성으로 만들어집니다. 즉 샘에게 영화란 자기 자신의 의도대로 만든 완전한 세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캠핑 영상에서 엄마의 외도를 확인하게 되면서 샘은 자기 의도대로 만들 수 있는 세상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이제까지 선택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보고 싶은 것만 보았던 것입니다. 


샘은 캠핑 영상을 영화로 만들면서 엄마와 베니가 함께 있는 장면을 모두 잘라냅니다. 이때 샘의 행동은 가족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누군가가 원하는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단순히 무엇이 선택하느냐의 문제만이 아니라 어떤 것을 은폐할 것인지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샘은 알게 됩니다. 자신이 이제까지 만들고 장악했다고 생각했던 세상은 실은 그 자신조차 모르는 심연을 품고 있었던 것이지요.


내가 원하는 세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세상과 나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일입니다. 샘은 영화를 만들면서 구김살 없는 소년으로 자라났고 용돈을 모아 필름을 사고 카메라를 사는 등 인생을 살아가는 재미를 깨달았습니다. 이렇듯 나와 세상 사이의 거리가 좁아지면 삶은 축복이 됩니다. 하지만 이 거리가 멀어질수록 삶은 지옥이 됩니다. 내가 만든 것 속에 내가 장악할 수 없고 심지어 내가 가장 보고 싶지 않은 것마저 담겨 있다면 그것만큼 삶을 괴롭게 만드는 것이 또 있을까요. 비유하자면 내가 낳은 아이가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자라날 때의 고통과 비슷할 것입니다. 결국 샘은 카메라를 놓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과 멀어지지요.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이 거리가 다시 가까워지는 것 또한 카메라를 통해서라는 점입니다. 졸업식날 로건은 자신을 영웅으로 연출한 샘을 찾아와 묻습니다. 왜 너를 그렇게 괴롭힌 자기를 영웅처럼 만들어 놨냐고. 그리고 말합니다. 네가 만든 나는 꿈에서도 따라잡을 수 없다고. 그렇게 오열합니다.


로건이 샘의 영상에서 본 자신은 현재의 자신이 아니라 도달하고 싶은 자신입니다. 그래서 영상 속에서 달리

고 있는 남자는 자신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아닙니다. 이런 패러독스가 발생하는 이유는 영상이 순간을 포착하되, 그 순간으로 전체를 상징화하기 때문입니다. 로건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영상을 본다면 그는 로건이 학교에서 가장 뛰어난 스포츠 스타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스포츠 스타라는 이미지에는 단순히 운동 능력만 있는 게 아닙니다. 최고의 스포츠 스타를 상상하면 실력과 인성 그리고 각종 커리어를 함께 떠올리듯이 영상 속 로건의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달리기 실력 이외의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이 이외의 것이 바로 로건이 말한 따라잡을 수 없는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말한 것처럼 이 지역에서 가장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은 로건입니다. 하지만 달리기뿐입니다. 영상 속 스포츠 스타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떠올리게 만드는 그 무수한 상상에 실제 로건은 전혀 응답하지 못합니다. 말하자면 관객이 로건을 과잉 상상할 때 정작 로건은 스스로의 결핍에 대해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로건이 오열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영상 속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건이 샘을 보호해주는 이유는 영상 속 자신이 바로 언젠가 도달하고 싶은 스스로의 이상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샘의 영상은 로건으로 하여금 결핍을 깨닫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도 깨닫게 한 셈이지요. 즉 영상과 현실의 괴리는 때로는 막다른 길이 되지만 때로는 도약해야 할 목표지점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샘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를 배신함으로써 세상과의 거리를 벌려놓은 카메라가 한편으로는 네가 얼마나 더 멀리 뛸 수 있는지를 알아보라고 말해준 셈입니다.


영화의 말미에 샘과 만난 존 포드 감독은 지평선이 아래에 있으면 흥미롭고 위에 있어도 흥미롭다. 하지만 중간에 있으면 지루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세상과의 거리가 아주 가깝거나 혹은 아주 멀 때는 재미있지만 어중간할 때는 재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영화 <파벨만스>의 지평선은 러닝 타임 내내 중간에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마지막에 가서야 비로소 ‘출발’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이 어중간한 삶이야말로 가장 영화적인 것이라는 스필버그의 전언이기도 합니다.  


스필버그는 <파벨만스>를 통해 두 가지를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는 꿈꾸는 자의 모든 이름이 파벨만이라고 할 지라도 그 이름의 정확한 명칭은 파벨만’스’라는 것. 단수로서의 자기를 꿈꾸는 모든 사람은 자신을 단수로 만들어준 복수의 세상을 망각하고 맙니다. 그리고 하나 더 잊어버리는 것은 초심이란 시작할 때의 마음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시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억이라는 것. 말하자면 세상과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못하던 방랑의 역사야말로 그로 하여금 지금까지 영화 감독을 꿈꿀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었다는 말입니다. 머릿속에 있던 기억을 영상으로 꺼내놓았으니 그는 이제 뒤돌아보면서 정면을 보여주기도 멋쩍어지고 말았습니다. <파벨만스>라는 필름이 있는 한 스필버그는 계속 걸어가겠군요. 그 뒷모습은 당분간 유효할 것 같습니다.



2023년 7월 26일부터 2023년 8월 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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