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를 전공이를 마치고 가다보니 비교적 늦은 나이에 가게 됐다
아마도, 서른 주음
대구에서 1차 훈련후, 영천 사관학교에서의 8주코스와 성남 문무대에서의 1주 정신교육훈련
그 시절 북의 김정은은 남쪽을 향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 위협을 했었다
저 먼경구 대구에서도 더 내려간 영천에서 항상 대기상태에서 밤중에도 워커를 신은채 힘대에 눕던 훈련병시절, 장교 대위가 되기 위한 훈련병, 그것도 군의관으로서의 훈련이었지만, 나이 서른에 쉬운 과정은 아니었던듯...
각개전투
한 밤중 어딘지도 모를 산위에 놓여 홀로 나침판로 복귀를 해야했고
4월 아직 다 녹지 않은 땅위에서 잠을 자며 이루어지던 야간 도보훈련
유격훈련
사격과 야간사격훈련
화생방훈련
아침 새벽이면 군복윗도리를 벗고 워커를 신은채 산악마라톤하듯이 30분을 뛰곤하던 시절
이외에도 참 다양한 훈련들
그 훈련은 오히려 나이들어 하니, 젊어 괜한 반항심이 있을 때보다 더 경건하게 열심히 즐겁게, 요령없이 받은 듯하다. 더 걱정은 서울에서 멀다해도 가족과 막 태어나 백일이 지난 모습을 보고 들어왔던 딸아이에 대한 걱정으로 시간이 될 때면 전화기로 달려가곤 했었던 시절, 그 때는 아내와도 많이 다투었다. 왜? 혼자 나와 있는지 ... 그래도 나보다는 편할텐대, 부모곁에 있기를 바랬었던 듯하다.
어릴 적 할머니 손을 잡고 교회를 다녔었다
종교가 뭔지 모르고 그냥 다녔다
중학교는 불교학교인 동국대학교 사대부국 중학교를 나와 아침이면 책상위에 올라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불경에 따라 10여분 명상과 삼귀의를 부르며 하루를 시작했다
대학시절
여자친구가 케톨릭 신자여서 또 교리공부를 일정기간하고, 묵주를 선물받았다
참 종교도 다양하게...병원생활중에는 철저하게 어떤 종교보다 '아교' 나 我교를 신봉했다
그 어느 신도 만에 하나 있다면, 병원내의 이 들을 이렇게 몰고만 갈리가 있을까?
레지던트 2년차에 찾아온 내 온 평생에서 가장 컸던 아픔도 그 때 내게 주셨다.
더 이상의 그 누구도 믿도 싶은 맘없었고, 또 원망도 싫었다. 그냥 다 현실이었을 뿐이니, 좋은 말로 그 득한 여러 종교서적들의 미사어구들이나 종교인들의 그럴 듯한 말들에 남일이라 함부로 말하지 말라하고 싶었던 시절, 그러다 군에서 서울 불바다 이야기를 듣고 나도 모르게 찾은 곳이 법당이었고, 그 곳의 스님이 고맙게도 나를 잘 챙겨주셨다. 주말이 아니어도 찾아와 훈련에 여유를 가지는 시간이면 걸으며 말도 나누고, 덕분에 훈련소에서 중국집 제대로된 짜장면도 먹어보고^^
그 분이 먼저간 내 말을 안했기에 모를 어떤 아픔이 아마도 몇번은 당신을 지켜불거라 ...
그리고, 법명을 주셨다. 도아 稻芽 씨앗, 양질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되라고... 아니, 될거라고...
지금도 글을 쓰거나, 뭔가를 이름대신 적을 때는 도아를 쓴다
절을 자주 찾고는 했었다
이른바 조기유학이 아닌, 스님이 말씀하셨던 나를 몇번은 지켜줄 것이란 말중 하나였을지도 모르지만, 내 아이의 아픔을 너무도 다행히 조기진단하여 완치하고 무리없게 하기 위해 부모와 동생이 있던 외국으로 보내야만 했던 시절... 그 때는 토요일이면 그냥 아무 길 막히지 않는 방향으로 차를 몰아 해가 지면 차를 세우고, 트렁크에서 버너를 끄내 밥을 간단히 해 먹고 이른 잠에 들어 새벽 2-3시면 일어나 부근 산을 올라 절을 찾아 절을 올리며 기도를 드리고 공양을 하고 내려와 오전중 서울로 올라오곤 했던 몇년의 시간
절을 들려 108개의 염주를 세며 절을 드리며 본뇌아닌 번뇌
내 맘속의 숙제와 짐들을 잠시만 맞아 달라, 찾으러 오겠습니다. 하고는 했었는대...
이젠 찾아올 때가 됐나보다
아니, 참 심술궃게도 찾으러 가기도 전에 하나 둘씩 돌려주시려한다
아마도 전국 이곳 저곳 다니며 몰래 몰래 맞겨둔 속세의 짐들이라 다시 찾아와 가져갈 것에 대한 배려로 택배로 보내주시는것인지도 모르겠지만 ^^
금주(禁酒)의 자신은 아직은 없다
떄론, 나를 찾는 반가운 이로 인해
떄론, 나를 찾는 역겨운 이로 인해
때론, 나 홀로 앉아 달아래 나로 인해
한 두잔을 다 거부할 자신은 아직은 없다
대신 절주(節酒)
와 함께 인연을 줄여가는 절연(節緣)
감정을 무디게 할 절감(節情)
나에 대한 자아애를 줄일 것도 함께 해야겠고,
일어나지 않은 내일의 일에 대한 걱정이나,
내 살아온 길의 고단함을 아이들에게 주지 않으려했던 괜한 의미도 결과도 없을 일에 대한 것도 다 줄여야겠다.
한 가지 걱정은
깨진 것은 날까로움을 함께해서 손을 비게도 하고
자칫, 의도하지 않은 상처를 내기도 하기에 조심스레 하나 둘 씩
난 의사가 된걸 이젠 행복해한다
그 들과 같이 아파했었고, 마지막도 함께 하며, 가는 길에 가능한한 옆에 마치막 주치의로 남아있을 수 있었으니 ... 무엇보다도 따짐을 가지지 않았던 삶
박물관에 보관되어져 있다는 스트라디바디우스
한 연주회
더더구나 비발디가 스트라디바디우스로 바이올린 독주회를 한다하니 그 홀은 가득찰 수 밖에
연주중 한 관중의 '역시 악기가 좋으니, 소리가 소름이 돋을 정도야!'
감탄이 이어졌다
이 떄 비발디는 연주를 중단하고 연주하던 바이올린을 바닥에 내리치며 산산조각을 내 버리며, 이는 킅느라디바리우스가 아닌 거리에서 오다 산 싸구려 바이올린입니다.
단지 바이올린, 악기란 소리가 지나는 통로이지 주연은 연주자입니다.
삶속에서 나 자신을 가장 속이며 살아온게 바로 이것이었던 듯하다, 어떤 직업, 직능이든 무엇을 하고자 함이지 순위를 매기는 점수표는 아니었음을 ...
이젠 서서리 줄여가고, 덜어내다, 멈출 시기를 찾아가는 여정에 오르기로 했다
함부로 누가 뭐라 말을 하든, SNS 시대에 그의 주관에 따른 댓글을 달든 다 그의 몫
기대된다. 이번 주말에 심을 마늘.... 첫 마늘농사 겨우내 어찌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