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片花飛減却春 꽃잎 하나 날리어도 봄빛은 깍이는데!
風飄萬點正愁人 바람이 만 잎을 날리니 못내 시름겹다.
且看欲盡花經眼 우선 다 떨어지는 꽃을 눈에 담으며,
莫厭傷多酒入脣 지나친 줄 알면서 술을 입에 넣는다.
....
두보의 곡장 2수중 일부다
진료실에서 하던 말이 이젠 내가 그 대상이 되가나보다
봄과 가을과 같은 환절기의 일교차이는
마치 비행기의 이착륙시의 기압차이로 귀가 멍하고 기분이 묘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서 젊었을 때는 느끼지 못하나, 아기들은 이유없이 울고 나이들면 그 기압차이를 느껴 기운도, 기분도, 또 심하면 혈액순환에도 문제를 줄 수 있다고 하던 말의 대상이 이젠 내가 되버렸다
최인훈의 광장속 이명준은 지식인이었었을까?
염상섭의 취우속 학수와 순제는 다들 굶주림과 불안속의 전쟁안에서 가졌던 상대적 안락함을 주었던 부와 그 속에서 서로를 탐하던 둘은 안정을 찾았었을까?
박범신의 소금속 선명우는 가족으로인해 버려진 자신의 삶, 가족을 버리며 다시 자신을 찾은 것이었을까?
이즘
인류의 역사속에 수많던 이즘들
그 이즘들은 서로를 옳다고만 주장하는 듯하면서도 조금 더 그 안을 들여다보면 상대의 다른 이즘의 빈공간, 헛점을 공격하는것들이 더 많아오지 않았었을까? 그 수 많은 이즘들은 다 무언가를 위하고 돕고,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을 꾸게 해 주지만 그 꿈은 끝없이 꾸게만 된다
지난 주부터 다시 접하기 시작한 프롬의 책들
프롬의 책의 장점은 자기에 대한 주장보다 가능한한 담위를 걸으려했던 것은 아니었을지, 다른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인용함보다는 담위를 걸으면서 아슬아슬하게 세상을 바라보면서 종교도 아닌 것을 철학을 종교처럼, 때로는 계몽주의처럼 말해준다
대학시절 프롬을 말하면 회색주의자라 비난을 받았던 시절
실존주의자를 논하던 자도, 마르크스를 논하던 자도, 동시에 프롬을 이야기하면 그건 아니지를 동시에 말하던 것을 보면 그 둘 사이를 걷던 프롬을 그 두 이즘은 받아들이지 못했었던 듯싶다.
유일한 시간의 탈출구 글쓰기
말하기 보다 글을 더 쓰는게 편하지만, 글을 쓰든 말을 하든
프롬의 지적을 잊기 어렵다
젊어서는 그의 책 ‘소유냐 존재냐’, 나이가 들어서면서는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를 더 자주 읽었었던 듯
100분토론으로 대표되어지던 토론프로들
예능프로에 치여 코미디프로들도 사라지고, 토론, 시사프로도 드물어졌고
많은 다른 전문직종을 가진 이들이 예능화되어져가는 시대
하지만, 그 대화를 보면서 다시 한 번 프롬을 생각케된다
프롬, 프롬, 프롬… 지난 주부터 머리속을 채워버린 이 놈의 프롬은 이젠 내려놔야할텐데
소유가 덕이 되는 현대속에서의 대화는 자신의 이야기, 주장을 하고 자신의 모습과 생각을 보여주고 인정받으려 애를 쓴다. 그러다 자신과 다른 환경과 생각을 말하는 누군가를 접하면 전투태세를 갖추게 되고, 방어태세를 갖추게 되는건 아닌지, 이에 반해 존재의 의식을 가진 누군가는 말을 하기보다 스폰지와 같이 상대의 이야기, 상황, 환경을 내가 아닌 그의 기준으로 듣고 보고, 느끼면서 스스로를 더 성숙하게 하려 하게 될 것이다.
프롬이 말하는 소유와 존재에서 대화의 요체이기도 하다
소유는 자신을 내세우기 위한 지식이라면, 존재는 정신적 성숙을 위한 지식을 말한다면
난 어느 쪽일까?
프롬은 누군가의 글과 사상의 인용이 적다
그의 책은 대부분 화자가 본인이다
어제의 죽음을 보는 시각에는 사회적으로 거의 대부분의 유사한 평을 내리고 있다. 역시나 그럴 수 밖에 없는 삶을 살아왔었으니 당연한 것이겠지. 하지만, 끝끝내 자신이 했던 행동에 대해 스스로가 화자가 되서 자신의 인생을 썼던 그 본인 스스로가 생각하는 자신의 삶은 어떠한 것이었을 것?
자신의 머리, 마음속의 것을 말하기보다 이를 듣고 보는 이들이 어찌 받아 들일까를 더 고민하면서 자신의 행동과 생각과는 무관한 말과 행동을 보여주고 있는 자와의 차이는 어떠한 것일까?
책상위에 동화책 한 권이 올려져있다
밖의 수도가 얼어가는 계절이 되지만,
눈을 감은 머리속엔 꽃이 피고 푸르른 들판위에 놓여 따스한 커피한 잔하는 하루를 꿈꿔보고자한다. 커피가 술 한잔이 될지도 모르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