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변신은 시작된 걸까?

by 고시환
KakaoTalk_20220106_105753080.jpg
DSC02934.jpg

전화들이 온다

해가 바뀌었다해서 핑계로 반가운 전화목소리도

의무적으로 전해오는 안부도


그를 접하게 된건 어찌 보면 어려 국민학교 6년간 5번 전학을 다니다보니 자연스럽게 친구들이 적어 혼자 있게 되는 시간이 많았고, 여유롭지 못했기에 나에 맞는 책을 보기 보다 사촌형들의 방에서 가져온 이름도 모른 작가들의 책들을 읽었던게 기회가 됐던 듯도 싶다


기억에 의하면 카프카와의 첫만남은 ‘심판’이었다

카뮈와의 첫만남은 ‘손님’이었다


나중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에 들어가면서 그들의 사상이 실존주의였다는 것과 그 들이 삶을 알면서 실존주의가 될 수 밖에 없었겠구나 싶은 생각을 가지게도 되었던 두 사람.


아내가 먼저 지인들과 남프랑스여행중 카뮈의 묘를 찍어서 보내주었었다

그 뒤 아내와 둘이 간 동유럽 배낭여행은 솔직히 어릴 적부터 꼭 가 보고 싶었던 카프카의 프라하를 가려던 내 욕심이 더 컸었다. 변신, 성등을 쓰다 마지막을 맞이했던 카프카의 글 쓰던 작은 집, 그리고 그의 묘


변신을 처음 접한 것은 우습게도 국민학생때

다시 접한 건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 대학교때

1년전에도 접했다

어릴 적 변신은 마치 SF영화처럼 느껴졌었을지도

사실, 지금 다시 읽어도 그 오래된 소설의 시작은 참 강렬하다. 시작의 앞에 무언가가 있었었을 듯하게 시작부터 끌고 가면서 작가가 말해주는 삶에 대한 한 사람의 모습. 새벽부터 한 밤중까지 자신과 무관하게 가족들을 돌봐야함에 일을 해야만 했던 그레고르

자고 일어나서의 그의 변신에 보인 가족들의 모습은 그에 대한 걱정이 아닌 경제적 현실에 대한 걱정과 대책, 그는 방에 갖히고 결국은 보기 싫다며 던진 가족의 사과가 등에 꽂힌채 썩어 죽게 되고, 가족들은 다른 홀가분하게 그를 버리고 떠난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속 주인공은 이름이 없다

이름없이 직함으로만 존재하는 그의 삶과 변신속 그레고리가 중첩되고,

반대로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선 박범신의 소금속 선명우가 대립되어지면서 다가온다

그레고리와 무진기행의 이름없던 자는 가족이나 조직속의

부품으로 그 쓰임새에 따라 그의 위치가 달라지고, 낡은 부품은 홀가분하게 버려지지만 박범신의 소금속 선명우는 같은 부속품과도 같던 처지를 어느 순간 깨고 자신의 길로 가버리자 반대로 그의 가족들이 그 이용했던 만큼의 부재감속에 무너져버림을 보인다.


아무리 멋진 옷이라해도 옷깃을 끌어내리고

허리가 맞지 않는 것은 내 옷이 아니다

시대가 흘렀으면 그 작품들 속의 이야기가 그 때는 그랬구나로 다가와야하건만, 시대가 흘러도 가장의 역할은 돌고 도나보다. 유목생활을 하던 인류가 정착화하고 만든 것이 조직이고 그 조직들이 세분화되면서 그 끝을 이루는 기본이 가정이 되었다하던가? 그 가정을 지키기 위해 선조들은 돌도끼로 맘모스와 맹수들에 달려들었었을 것이고, 오늘의 이 시간에도 영업을 위해 몇몇의 머리가 희끗희끗한 분들도 진료실을 다녀가며 새해인사를 전한다. 따뜻한 방에 앉아 인사를 받으실 나이인 듯하건만, 오래된 가방 하나들고 다님을 보면 그 분의 변신은 언제 어떠한 모습일까를, 아니 나는 언제? 아니 어쩌면 벌써 변신되어져 버린 모습으로 보여짐을 나만 모르고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카뮈를 좋아했었다

그의 책중 내 가장 많이 반복해서 읽고, 좋아하는 것은 ‘시지프스의 신화’이다

제우스의 심기를 건드렸었던 시지프스에게 내려진 형벌은 명계에 있는 높은 산꼭대리로 큰 바위를 올려 놓는 것, 하지만 그 돌을 올려놓으면 바로 다시 내려와 제자리에 있게 되어 이를 끝없이 반복할 수 밖에 없는 시지프스의 영원불멸의 벌

카뮈는 사실 시지프스 신화의 앞을 접하면 그 형벌의 가혹함보다는 해학을 느낄 수도 있지만 카뮈는 이를 달리 해석한다. 시지프스가 이 고리에서 벗어나는 길은 너무도 쉽다. 이를 형벌이라 생각지 말고, 영원불멸하게 살 수 없는 인간으로서 신이 준 벌은 아이러니하게도 영원한 삶을 그에게 벌이라는 이름으로 준게 아니겠느냐는

시지프스는 벌을 받아 바위를 올린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이를 즐긴다면

올렸다 생각하기 보다, 떨어질 걸 미리 생각하며 올렸다 떨어지는 바위를 바라보며 즐겨 다시 올리고 올리고를 한다면 신들은 오히려 그들이 내린 벌에 더 약이 올라 하지 않았을까?


카뮈는 개인을 중심으로 한 실존주의를 논하려

이 시지프스의 신화를 썼지만, 사실 이러한 노동을 즐길 자가 있겠는가?

공산주의와도 같은 사회적 실존주의를 찾던 사르트르와 달리 개인적 실존주의에 매달렸던 카뮈는 결국 절친에서 멀어지지만, 죽은 카뮈의 묘에 그를 가장 사랑했고, 그를 누구보다 잘 알았었던 사르트르는 팬을 놓고 갔고, 지금도 그의 묘는 초라하기만 해서 알고 가지 않으면 그냥 밟고 지나갈정도로 있다지만, 그 위에는 그를 그리워하는 이들의 펜들이 수북히 쌓여있다한다.


어제도 늦은 밤까지 멀뚱 멀뚱 창밖을 바로보았다

어젠 책도 읽히지 않고, 귀에도 음악이 들려오지 않아 시간의 지남이 더 느리게 느껴지던 밤

그러다 든 잠에 아침 평소보다 10분정도 늦은 듯하다

아내의 꺠움에 놀라듯이 일어나 시작한 하루

오전이 무기력해진다


내일을 위해 자야하는 그런 시간보다

숙취가 고민되어 마시지 않는 것보다

몸의 건강을 위해 오늘의 내 맘이 시키는 것을 피하려하기 보다

그냥 오늘을 내 맘이 시키는 대로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은 그 시간과 모양의 문제겠지

모두가 다 언젠가는 변신의 모습을 보이게 될 터이다

그 변신의 모습을 대하는 가족, 지인, 주변의 모습은 분명

지금과는 다르겠지

아니, 이미 달라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하하고 카프카도 카뮈도 아주 오래전부터 내게 말해주고 있었던 듯하다. 이를 이제서야 그래왔구나 생각할 뿐이지


매거진의 이전글미완성 교향곡과 같은 삶도 나쁘지는 않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