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기 기말고사가 끝나고 나면 교실은 여유를 찾는다. 교과서야 기말고사 전에 다 배웠겠다, 늘어지는 분위기가 생긴다. 고등학교 2학년 교실이 곧 3학년이라며 불타오르는 것도 옛말이다. 수능 최저 기준을 준비하는 학생이 아니라면 2학년 내신이 끝나면 한숨을 돌릴 여유가 생긴다. 몇 년 전까지는 학년 말은 곧 입시에 가까워진다는 뜻이라며 자습 분위기를 형성하기도 했지만 분위기 변화는 아이들이 더 빨리 감지한다. 수능이라는 한 방 역전 시험을 노리는 게 자신의 일이 아니라면 굳이 학기말에 에너지를 쏟으려 하지 않는다. 3년 내내 수능 때문에 쥐어짜였던 80년대생의 눈으로 보기엔 이 분위기가 크게 나쁘지 않다. 교실에서 불 다 꺼놓고 엎드려 있는 게 보기 좋진 않지만 또 학기 말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하는 마음이 더 크다.
하지만 이 여유는 교실 한정이다. 교무실은 굉장히 바쁘게 돌아갈 때다. 우선 기말고사 후 방학까지 시간이 얼마 없기 때문에 내 과목의 성적을 빨리 처리해야 한다. 요즘은 수행평가 비중이 높아서 평가 횟수도 많고 채점도 까다롭다. 채점을 하고, 잘못 채점한 부분 없나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이제 됐다 싶으면 학생들에게 자기 점수 확인시키고, 이의제기 들어오면 검토하고, 나이스에 입력하고, 입력 제대로 했나 다시 확인하고, 출력해서 학생 싸인 받고, 싸인 이상하게 해 오면 다시 출력해서 다시 싸인 받고, 싸인하라고 보내놓은 종이가 실종되면 다시 출력해서 주고, 싸인 받는 날 하필 결석한 아이가 있으면 다음 날 쫓아가서 싸인받고...이런 과정을 거쳐야 한다. 중간, 기말고사야 컴퓨터가 채점하니 좀 낫지만 학생 싸인 받는 과정이 지난한 것은 매한가지다.
담임교사들은 좀 더 갈려나간다. 학기말에 주는 상은 또 왜 그리 많은지. 모범상, 봉사상 같은 상 받을 학생 추천서 써서 올리고, 담당자는 추천서 받아서 결재 올려 상장과 부상(문화상품권)을 준비해야 한다. 그뿐이 아니다. 봉사활동도 정리해야 한다. 1년 동안 교내에서 각종 봉사활동을 한 학생들은 연말에 봉사활동 시간으로 보상을 받는다. 이 서류 작업도 간단하지만 또 봉사맨들이 한 두명이 아니라 누락시키지 않으려면 몇 번 확인을 해야 한다. 진급 사정은 또 어떻고. 출결을 꼼꼼히 봐서 개근인지 아닌지 살펴야 한다. 혹시 출결 정리 중에 실수한 부분은 없는지 확인해야 한다. 확인!확인!확인! 확인의 연속이다. 난 확인하다가 수업 들어갔다 오면 어디까지 했는지 까먹어서 또 시간을 투자한다. 멍청하다.
학기말 업무의 끝판왕은 생활기록부다. 매년 '올해는 생기부를 미리미리 적어서 학기 말에는 좀 여유있게 보내야지' 하지만 절대 지켜지지 않는다. 나름의 계획에 따라 좀 써나가다가도 학생 상담 같은 더 중요한 일이 겹쳐 계획이 어그러지면 그걸로 끝이다. 안 그래도 짬을 내서 쓰고 있었는데 그 짬이 한 번 없어져 버리면 다시 그 틈을 내기는 참 어렵다. 결국 연말에 몰아서 쓰게 된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생활기록부의 근거가 되는 자료는 잘 보관해 놓았다는 것 정도다. 이 때 학년 교무실에 가면 담임들끼리 어디까지 썼느니, 벌써 거기까지 쓰다니 대단하다느니, 자율활동 시수가 안 맞니 하며 키보드를 두들겨 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요즘은 생활기록부가 대학 입시에 중요하다 보니 학기말의 아주 중요한 업무가 되었다. 생기부는 완성하더라도 다른 교사가 몇 번 더 확인한다. 이 과정이 2월 말까지 계속된다. 2월 28일자로 휴직하거나 퇴직하는 자도 예외없다.
연말 예산 정리는 또...됐다, 그만하자. 어쨌든 학생들은 교실에서 1년에 두 번, 그 중에서도 히터의 따뜻함 때문에 즐거움이 배가되는 나태함을 즐길 때 교무실은 정반대의 치열함을 산다. 마무리라는 게 이렇게 어렵다. 내가 지금 학기말 업무에 미쳐있어서 이런 걸 쓰는 게 아니다. 사실은 맞다. 그래도 교실에 가서 아이들이 여유있게 노는 모습을 보면 잠깐 정신이 든다. 그래, 방학 때까지 끝내야 한다. 방학 때까지 생기부를 쓰고 있을 수는 없다. 나는 할 수 있다. 하 정말 이거 끝나기는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