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아, <가녀장의 시대>
슬아는 문득 복희가 없는 미래를 생각한다. 복희를 그리워하며 멈춰 있을 자신의 모습이 꼭 기억나듯 그려진다. 이미 겪어본 것처럼, 마치 오래전에 살아본 인생처럼 그 슬픔을 안다. 그는 지금 이 시절을 꽉 쥐고 싶다. 그러나 현재는 언제나 손아귀에서 쓱 빠져나가버린다. 306p.
지금을 그리워할 미래의 내가 ‘한 번만 과거의 순간을 생생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해 달라’고 사정해서 다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부모님이 아직 건강하고 나는 밥벌이를 하고 건사할 가정이 없지만 함께 사는 친구는 있는, 자유와 우정과 연애로 충만한 이 황금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문득문득 주변을 둘러보며 이 기억을 절대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별건 아니고 오늘같이 소소한 일상 같은 것 말이다. 3호선 지하철에 나란히 앉아 오다가 두툼한 패딩 어깨에 머리를 가져다 댔더니 폭신했던 것, 집에 오자마자 후루룩 환복하고 나란히 앉아 TV에 아이패드를 연결해 <술꾼도시여자들 2>를 두 편 연달아 보는 것, 그러면서 까먹은 귤껍질이 소복이 쌓이고 걔네가 따끈하게 데워진 전기장판 위에서 말라가는 걸 구경하는 그런 저녁. 금세 기억에서 사라져 버릴 매일의 일상 따위 말이다.
<가녀장의 시대>도 그런 얘기다. 어떤 신기한 집의 시트콤 같은 일상 이야기. 다만 어린 슬아가 자라났던 집은 TV에서 많이 봤던 전형적인 할아버지 중심의 대가족이었다면 지금 슬아가 사는 집에는 가부장이 없다는 점이 다르다. 아빠 웅이는 (다른 부심이 아닌) 깨끗한 바닥을 만드는 청소에 자부심이 있는 출판사 직원이고, 엄마 복희는 정당한 페이를 받고 식사를 준비하는 직원, 그리고 딸 슬아는 이 가족 출판사를 운영하고 매일의 마감을 복근으로 쳐내는 이 집안의 가장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이 묻어난다. 웅이가 청소기와 대걸레 그림의 타투를 양팔에 새기고 뿌듯해하는 것이 가녀장의 집에서 당연한 일이라면, 웅이의 동창회에서 그 타투는 조금 감추고 싶은 것이 된다. 그렇지만 그것이 진심은 아니다. 웅이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이 있고, 슬아를 존경한다. 미안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웅이는 슬아의 책장을 짠다.
그는 문득 호시절을 지나고 있음을 느낀다. 딸에겐 젊음과 능력이 따르고 자신에겐 체력과 연륜이 따르는 이 시절, 별다른 슬픔 없이 서로를 도울 수 있는 이 시절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영원할 리 없다. 279p.
한 끼 차려 먹고 치우면 다음 끼니를 고민하게 되니까, 복희는 어느 날 슬아에게 책은 한 번 쓰면 몇천 부를 찍어낼 수 있어서 좋겠다고 말한다. 밥은 책처럼 복사가 안 되니까. 슬아는 자신이 하루 두 편의 글을 써내야 하고 딱 세 명에게만 보여줄 수 있다면 계속 쓸 수 있을까 생각한다. 어쩐지 미안해진 슬아는 멋쩍게 복희에게 소설을 한 권 쥐어준다. 주방에서 삶을 멋지게 살아가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남미 소설이다. 단숨에 끝까지 읽은 복희는 자신을 좀 더 이해하게 된 채 주방으로 돌아간다.
“아무도 안 읽어준다고 생각하면 글쓸 수 있겠어?”
“아니.”
“나도 마찬가지야.”
복희는 자신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된 채로, 그러니까 자신과 조금 더 가까워진 채로 서재를 떠난다. 서재를 떠나 부엌으로 간다. 저녁을 차릴 시간이다. 235p.
그렇게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멋쩍게 사과하고 살아가는 한 편의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가 세상에 더 많이 들려지기를 바란다. 재밌고 따뜻하니까. 또, 자신의 삶을 토대로 소설을 엮어낸 이슬아 작가처럼 나 역시 잊고 싶지 않은 순간들을 글로 적어두자고 생각한다. 다 아는 얘기도 이야기가 되어야 ‘기억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롭게 떠나보낼 수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더 진득하게 기억할 수 있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하지 않는대도 상관없다. 어차피 사건은 내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각색된 채 이야기로 남기 때문이다. 이미 남겨진 많은 이야기들처럼.
복희가 책을 덮었다. 다 아는 이야기인데 웃음이 나고 울음이 났다. 이 자리에 모인 다섯 명은 그 세월을 같이 겪은 이들이었다. (중략)
자신에 관한 긴 글을 듣자 오랜 서러움이 조금은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슬아의 해설과 함께 어떤 시간이 보기 좋게 떠나갔다. 이야기가 된다는 건 멀어지는 것이구나. 존자는 앉은 채로 어렴풋이 깨달았다. 실바람 같은 자유가 존자의 가슴에 깃들었다. 10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