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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달래 Aug 10. 2024

약대는 안 간다고요!

잘 난 딸이 못되어 죄송합니다.

달래는 이담에 커서 의리 번쩍한 아파트에서 부모님을 호강시켜 드리는 꿈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열심히 한눈팔지 않고 공부를 했습니다.

공부가 다인 줄 알았고 공부만 잘해서 대학만 가면 뭔가가 다 척척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대 음대에 들어가려고 성악을 고2 때 시작한 게 인생의 꼬임이 되어버릴 줄도 그때는 몰랐습니다.

아빠의 길을 따라 음악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었는데..


'약대 가라 약대 가라 하시던 엄마의 말씀.'

"왜 고리타분하게 약대를 가라고 하시지? 약대는 안 간다고요!"


그때는 새장에 갇혀있는 약사가운보다  TV에 나오는 조수미처럼 눈이 번쩍 뜨이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서는 모습을 상상하였던 철없는 아이였습니다.

음대 실기 시험 일주일 전에 성대결절이 걸려 목소리를 잃었습니다. 실기시험을 볼 수가 없게 되어 재수를 하게 되었죠. 성악을 포기하고 같은 공부를 두 번 하면 더 점수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던 게 어리석었음을 시험 점수 발표가 있던 날 깨닫습니다.

생각보다 수가 적게 나오자 약대지방도 어렵게 되고 지방국립대 자연과학대에 지원하여 별일 없이 다니다가 좀 차려입은  남학생들이 추파를 던져도

' 농사지으며 살기는 싫다고!!" 하며 주제도 모르고 코만 더 높아져갔습니다. 그때는 시골 살면 부모가 농사짓는 집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에서 자리를 잡아주던 잠깐 만나던  본과1학년 남자 친구가 같은 과 내 여자애 영화를 보러 갔다는 소문을 듣고 그 자식의 뺨싸대기를 한 대 치고 절교를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나의 연애는 왜 이렇게 꼬이는 거야? "

중학교 때 선배오빠에게도 이렇게 당했는데 남자에 대한 관념이 완전히 망가져가고 있었습니다.

남자와 제대로 연애도 안 해봤고 어쩌다 친구 따라 나간 자리에서 만난 남자의 계속 대는 편지에 3학년 때 약혼을 하고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합니다.

부모님의 적극권유가 반이상인 결혼을 하게 했고 졸업을 해도 직장을 가질 엄두가 안나기도 했습니다.

아마 음대를 포기한 이후로 진로를 잃은 것이기도 했습니다.

무대에서는 꿈은 사라지고 약사도 되지 못했기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도피라고 말하기도 부끄럽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결혼이라는 무덤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결혼생활,

결혼은 둘이 맞춰가는 거라는데 우리는 도무지 맞질 않았습니다.

가정적인 아버지와는 다르게 밖으로 나도는, 술자리가 많아서 일주일 내내 술이었습니다. 아이를 같이 돌봐주는 일을 전혀 하질 않았습니다.  

졸업하자마자 여기저기서 대우를 받으니 권위적인 사람으로 변해갔고 집에서도 대장입니다.




10년 만에 조기이혼을 감행하고 두 아이들을 데리고 외국으로 떠났습니다.

결혼 생활이 그렇게 삭막하고 치다꺼리하는 거였으면 하지 않았을 것을 왜 어린 나이에 하게 되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사람이 입은 제복에 눈이 회까닥 간 것일까요

처음 만남이 칵테일파티였는데 도에서 그 해의 졸업생들을 위해 마련한 파티여서 재학생들은 모두 제복을 입었고 여자 친구이나 휘앙새들은 한복이나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초대를 받았던 자리였습니다.

"나도 결혼하면 드레스를 입고 이렇게 이브닝파티에도 가겠구나! 내가 신데렐라가 되는 꿈을 꾸며 이 남자와  달콤한 꿈을 꾸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은 생각과는 아주 딴 세상이었습니다.

혼인신고를 하고 식도 올리기 전에 큰 아이가 들어서는 바람에 신혼의 아기자기한 생활은 아스라이 사라져 갔습니다. 졸업과 동시에 아기엄마가 된 달래는 아이를 키우느라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게 되고 남편이 당직을 서는 날이 오면 그날에 맞추어 친정으로 가기가 바빴습니다. 두 아이 캐어가 버거워서죠.

남편은 당직날이 아니면 새벽에 들어오기가 일쑤고 거의 얼굴 보기도 힘듭니다. 이런 걸 독박육아라 하나요?

아이들을 키우며 20대의 삶이 폭삭 40대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엄마 아빠는 딸하나라고 어릴 때부터 무용에 피아노에 그림에 이것저것 가르치고 남부럽지 않게 키워놨는데 은혜를 다 갚지도 못하고 두 분을 호강시켜드리지도 못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모시기는 했지만 계실 때 더 잘해드려야 했는데 그땐 벌어서 두 아이를 가르쳐야 했기에 더 잘해드리지 못했습니다.


아빠는 78세 간암으로 투병하시다가 한 일 년 병상에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고 이후로 1년 뒤 엄마가 75세 갑자기 심장마비로 아빠를 따라가셨습니다.

딸아이들이 임종을 보게 되었고 저는 그 시간에 직장에 있었습니다.

헐레벌떡 달려갔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가는 길에 차속에서 딸아이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엄마 할머니 돌아가셨어."

숨을 거 둔 뒤에 얼마간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하며


"엄마, 할머니가 들을 수 있대 할머니가 듣는대...."

달래는 겨우 울음을 참아가며 엄마한테 전화를 통해서 말을 합니다.

"엄마, 엄마를 젤 사랑하는 딸 용서하세요. 더 잘해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 엄마,  먼저 천국에 가 있으면 저도 곧 갈게요. 사랑해요. 엄마 이제 아프지 말고 편히 지내세요.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요.

엄마, 엄마, 내 목소리 들리시죠? 엄마 편히 쉬세요. 사랑해요 엄마." 

마지막 인사를 전화선을 통해서 내 진심이 전해질지 계속 눈물은 흐르고 있고 참고 있던 오열이 터져 나왔어요.

운전을 할 수가 없어서 길 한쪽에 대고 운전대를 부여잡고 엉엉 울었습니다. 전화기를 들고 말이죠. 내 울음소리를 듣고 엄마가 깨어나시면 싶어 더 크게 울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큰아이가

"엄마, 조심히 오세요 할머니 옮긴다고 하니까..."

하며 병원 영안실을 알려주며 전화를 끊습니다.


그렇게 엄마를 보내드리고 우울이 왔습니다.

말도 하기 싫고 살아가는 의미조차 잃어갑니다.

엄마는 내 자식보다 더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친구 같은 엄마였고 제 비밀조차 엄마한테는 다 말할 정도로 엄마는 저를 신뢰하셨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엄마한테 잘하려고 하지 말고 외출하고 들어갈 때는 꼭 뭐라도 사다 드리고 할머니를 엄마처럼 대해라 그게 엄마를 위한 선물이다."라고 누누이 말했습니다.



그런 엄마한테 더 잘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서 잘난 척만 서 죄송합니다.

제 발등을 찍고 싶을 정도로 잘 못 살았습니다. 다 제 탓입니다. 제가 허황된 꿈을 꾸지만 않았더라면 엄마 아빠의 가슴에 대못을 박지 않았을 텐데요...


엄마는 하나님을 믿었으니까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한동안 엄마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나고 엄마의 유품을 보기만 해도 힘들었습니다.

이제 10년이 흐르고 나니 조금은 돌아가심이 실감이 납니다.

못날 딸을 잘 키워주시고 보듬어주시고 그러다가 갑자기 돌아가시니 더 엄마라는 말을 떠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브런치라는 장에서 엄마에 대한 참회를 할 수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엄마말 안 듣고 약대 안 가고 잘 난척해서 죄송해요.


이제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 편하게 지내세요.

아빠랑 만나서 알콩달콩 행복하세요. 하늘나라에서 꼭 만나기를 바랄게요. 다음생이 있다면 제가 딸이 아닌 엄마의 엄마로 태어나기를 바랄게요.

엄마가 그땐 엄마 맘대로 제 속을 긁어놓고 저한테 못한 투정 다 부리세요.


어릴 때부터 엄마가 나를 잘 키워주셔서  고적대악장도 하고 여고 합창대회 반주도 하고 그러다 보니 눈만 높아졌어요


엄마, 사랑하고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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