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깡미 Oct 22. 2024

수영 강습 레인 초고속 승진


회원님, 오늘은 앞에서 출발하지 말고

맨- 뒤로 가세요.


강습 회차가 오래된 레인의 선배님들이

늘 “애기엄마가 먼저 출발해야지!”라고

나를 선두에 세우는 바람에,

그게 타의였든 자의였든 스타트 하나는 ‘내가 바로 에이스’라고 합리화 하기 타당한 근거가 있었는데 그날은 어쩐일인지 강사님이 나를 줄 맨- 뒤에 세우셨다.


 ‘뭐지? 내가 뭘 잘 못한거지?’


다른 회원들도 무슨일인가 싶어 곁눈질로 흘끔 거렸지만 나는 스승님 말씀은 곧 법이라 생각하는 에프엠이라 이유따윈 묻지 못하고 조용히 내 가슴 속에 묻어 두기로 했다.


곧 있으면 찢어질 수도 있을 것 같은 최대한 늘려 입은 얇디얇은 수영복 위로 물에 젖은 이불솜, 목화솜, 온갖 솜뭉치란 솜뭉치는 다 걸치고 있는 기분이 들었었더랬다.

  




 1등이 되려는자, 왕관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고 그랬던가.

레인마다 선두로 출발하는 영자는 본인 외에는 앞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순수하게 자력으로 물의 저항과 싸워 이겨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물 속에서의 움직임은 지상에서의 움직임과 다르게 힘을 더 들이게 된다. 거기다 더해 뒤에서 쫓아오는 영자들이 있다는 부담감은 필사적으로 팔 다리를 물속에서 휘저어 내게 한다.


앞서 간다는 것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지.



 

 하지만 그날은 꼴찌로 출발하는 바람에  앞에 천군만마와 같은 영자들이 물의 저항을 이겨내 주고 있었다.

 

내 뒤꿈치를 따라 쫓아 오는 이가 없자 비로소 마음이 숨을 쉬었다. 고요한 물속을 유유히 헤집으며 마음의 짐을 덜어내니 그동안 속도전에 급급했던 비루한 내 몸뚱이가 진짜 수영을 해냈다.


물 속에서 느끼는 안락함, 아늑함, 편안함. 물속에 누운 그곳이 바로 무릉도원, 지상낙원이었다. 침대는 과학이라던 그 브랜드의 광고는 정말이지 틀림이 없었다.


 킥, 턴, 터치. 50m구간을 돌아 재 출발의 순간을 앞두고, 강사님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내 뒷꿈치를 지긋이 붙잡고 속삭이신다.

“회원님, 옆에 중급반 레인으로 지금 바로 넘어가세요.”


 앞서간 영자들이 모두 재 출발 하고 난 뒤, 강사님이 비밀스레 레인 승진을 선물 하셨다.


 아까는 맨 뒤로 가라며 불친절 하기 짝이 없었던 그가 이제 내 수영인생에 첫 비게이션이 되어 줬다는 사실과, 나중된 자가 처음 된다는 옛날옛적 여름성경학교에서 들었던 그 말씀이 전두엽을 빠르게 스쳐갔다.

 이내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맨 뒤에 오던 에이스가 옆레인으로 승진하게 된 사실을 알게된 선배님들 중, 누군가는 물장난 하듯 물을 흩뿌리며 승진을 축하해 주기도, 누군가는 본인보다 늦게 수영을 시작한 이가 왜 먼저 중급반으로 가냐며 질투와 시기가 반반 섞인 볼멘 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던 수영장 텃세가 시작될 조짐을 알려왔다.


그러고 보니 웃지 못할 일이 하나 더 떠오른다. 수영장은 들어갈 때 한번 나갈때 한번, 그러니까 운동 전 과 운동 후 각각 한번씩 샤워를  해야하는 시스템인데 같은 레인을 썼던 선배님 아니, 선배들이 샤워기 자리를 맡아놓고는 본인들이 선 사용하고 어쩔 수 없이 한참을 기다렸다가 내가 후 사용하게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빨래금지, 염색금지, 유제품 마사지 금지, 온통 금지타령인 안내문구가 버젓이 물이 떨어지는 거울 앞에 붙어 있어도 그녀들은 청개구리가 되어 금지령이 내린것을 기필코 해내느라 샤워기 앞을 떠날 줄을 몰랐다.


말에도 행동에도 온도가 있다는 것을 새삼 벌거벗은 채로 느끼던 날들 이었다. 




  

 
“삐-익! 삐-이-이익!!”

강습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그 어느날보다 상쾌하게 들린 건 기분탓이겠지.

모두 빠져나간 텅빈 물에 몸을 맡긴다.

씨익, 웃음이 난다.


그런데 서서히 수경 안으로 따뜻한 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수경이 새는 거였다면 딱 수영장 물만큼만 미지근한 물이 느껴졌어야 할텐데, 이 물, 어딘가 좀 뜨끈하다.나 지금 울고 있나보다.

누구도 묻지 않고 궁금해하지 않고 관심없을 북받치는 감정은 뜨끈한 눈물이 되어 수경을 채웠다.


초급반 강습 2개월차, 텁텁한 락스물에서 이토록 강력한 도파민이 생성될 줄이야.

  

“이봐, 아들들아, 남편아. 보고 있나? 나도 뭔가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해낼 수 있을 것 같단 말이라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