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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까 말까 할 땐 하자

by 깡미

소풍 가기 전날 밤.

가만히 누워 어두운 방안을 구석구석 눈으로 훑다 설레는 마음을 눈에 담고 잠들던 시절이 있었다.


어젯밤이 그랬다.

10km 러닝대회를 하루 앞둔 밤.

너무 들뜬 나머지 잠자리에 누워서도 나를 자꾸만 출발선 앞에 데려다 놓는 기분 좋은 상상을 했다.




그런 설레는 마음에 찬물을 확- 끼얹은 건 일기예보였다.

총 3사의 일기예보를 섭렵했지만 대회 당일 비를 피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집 현관을 넘기 전까지 대차게 흔들려버린 마음.

'아 갈까, 말까.'


사실 나이 마흔 줄에 비를 맞고 뛴다는 게 여간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다녀와서 몸살감기라도 걸려 아프면 어떡하지. 비에 젖어 축축한 거 정말 싫은데. 시간당 강수량을 보니 더욱 망설여진다. 챗GPT에게 이 정도 비면 괜찮은지 물어볼까.


"여보, 그러다 무릎까지 나간다. 나이 생각도 좀 해."

오늘은 달리지 말라는 남편의 당부였다. 생각해 보니 최근에 자전거를 타보겠답시고 생긴 허리 통증이 다 가시지도 않은 마당에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안 뛰면 된다. 오늘이 아니더라도 다음 기회가 또 있겠지.




몽글하게 피어올랐던 마음을 꾸깃하게 접어 넣다가 한편에서는 다른 장면들이, 생각들이, 느낌들이 마구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난 1년 가까이 운동방 작가님들과 함께 운동하며 남긴 인증샷. 그것은 '저 오늘도 운동했어요.' 하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함께 쌓아온 마음이었다. 그 모든 시간들이 모여 오늘의 내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무렵,




'할까 말까 할 땐 하자.'


물끄러미 인증 사진을 들여다보다 번뜩 스쳐간 이 말이 나를 출발선에 서게 했다. 망설이다가 멈춰서 후회할 내 모습을 보느니 끝내 빗속을 달려낸 스스로를 더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도착해서 마주한 광경들은 내 걱정들이 모두 기우였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스팔트 위의 물 웅덩이를 밟을 때 흩어지는 물줄기, 환희의 소리를 지르며 뛰는 러너들, 급수를 전해주며 파이팅을 외쳐주는 자원봉사자들 덕분에 덩달아 도파민이 싹- 돌기 시작했다. 참 오랜만에 느껴보는 삶의 생기.


뛰길 잘했다.


빗속에 미끄러지지 않으려 힘을 주다 보니 무릎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피로감이 생생해져왔고, 물을 머금은 러닝화는 점점 무거워졌다. 거추장스러운 우비는 중간에 벗어던졌기 때문에 온몸은 흠뻑 젖었지만, 까짓 거 온몸이 다 젖으니 더 이상 젖는 게 두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음은 더 가벼워져서, 이제 내게 비는 달릴 이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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