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복이 사라졌다

익숙한 게으름에서 벗어나기

by 할량


출처/이미지 투데이

바지를 벗었다. 아! 드디어 이 바지도 맞지 않다. 두터운 허벅살을 욱여넣고 튀어나온 뱃살을 눌러 담았더니 지퍼가 터질 지경이다. 이대로 밖으로 나갔다가는 숨이 막혀 죽을 듯싶다. 이로써 내가 마지막으로 의지하던 외출복이 사라졌다. 입고 나갈 바지가 없다.


이 빛바랜 회색 면바지는 내게 보험 같은 존재였다. 아무리 살이 쪄도 이놈은 날 배신할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일이 터져버렸다. 내 허리둘레가 36인치를 훌쩍 넘어버렸다는 소리다. 그러고 보니 요 근래 숨쉬기가 힘들긴 했다. 엊그제 화장실 청소를 하려고 허리를 숙이자마자, 호흡이 가빠졌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제 살을 빼지 않고는 못 배기는 상태가 된 것이다. 얼레벌레 살다 보니 한계선에 도달해버렸다. 숨 쉬기 위해서라도 살을 빼야 한다.


퇴사 후 찾아온 무력감을 음식으로 채웠다. 허전한 속을 달래려 끊임없이 무언가를 집어넣었다. 새로운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목구멍에 음식을 쑤셔 넣고서 침대에 누웠고, 고민으로 머리가 아파올 때면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넷플릭스를 열었다. 당연히 두터운 살덩이도 따라왔다. 살이 찌면 질수록 빈둥대는 시간들에 익숙해졌다. 아무런 이유 없는 휴식이 계속됐다. 그렇게 결국 여기까지 왔다. 헐떡대는 숨소리에 겁이 난다.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위험한 순간까지 나를 밀어 넣었다. 허리에 붙은 두툼한 살덩이가 익숙해질 때 과감히 나서야 했는데, 제기랄 너무 늦어버렸다. 후회해봐도 소용없다. 이제는 살기 위해서라도 살을 빼야 한다. 목구멍에 숨이 차오르고 나서야 결단을 내리는 나다.


익숙한 것들에 작별을 고했다. 수북한 각형 초콜릿과 시큼한 지렁이 젤리를 책상에서 치웠다. 매끼마다 더부룩한 속을 달래주던 콜라는 개수대로 흘려보냈다. 날씨가 화창할 때면 생각나던 메밀소바와 비 오는 날이면 먹게 되는 냉동 호떡도 이제는 안녕이다. 새로운 일에 대한 구상을 다시 시작했다. 지난날에 미련을 두지 않고 새 출발하겠다고 세차게 다짐했다. 대신 무력감과 조급함이 찾아올 때면, 그동안 멀리했던 자판을 다시 두드리기로 했다. 머릿속 어지러움을 글로 풀어내면 허기가 조금은 가실지도 모른다. 그래도 속이 허전할 때면 쌓아둔 무협지와 역사소설로 틀어막아 볼 요량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쩌면 살을 더 잘 뺄 수도 있을 거라고. 동기부여를 위해 회색 면바지를 문 앞에 걸어두었다. 숨 쉬기 위한 다이어트만큼 절박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그리하여 부디 크리스마스에는 회색 면바지를 입고 편하게 숨 쉬어 보기를 소망한다. 게으름의 끝까지 내달렸던 만큼, 분명 빠르게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다시 힘차게 시작할 수 있다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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