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내 친구 이뭉치
결혼 후 해외 이민을 선택한 것은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영어' 때문이었다.
뉴질랜드 영주권자인 남편이 군복무를 하기 위해 한국에 왔을 때, 군종병이던 그를 만났다.
우리는 그로부터 해외롱디를 7년간 했다.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을 건너서라도~'라는
박상철 아저씨의 노래처럼 나는 태평양을 건너서 그를 만나러 갔고
그 역시도 태평양을 건너서 나를 만나러 왔다.
시차도 다르고 거리도 멀지만, 우리의 연애는 지속되었다.
우리는 아주 긴 시간 동안 결혼 이야기를 하였는데,
언제나 화두는 결혼 후 '어디서 정주할 것인가?'였다.
어쨌든 결혼을 하게 되면 두 사람 중 누군가는
살던 곳을 정리하고 누군가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와야 했다.
한국이 아니면 뉴질랜드였기 때문에 우리는 수많은 고심을 했다.
여러 생각들이 있었지만,
나는 뉴질랜드에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영어' 때문이었다.
나는 영어 콤플렉스(?)가 있다.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나는 영어 실력이 부족한 것이 늘 아쉬웠다.
수능영어가 아닌 실전 영어회화를 잘하고 싶었는데,
두 가지 모두 잘 해내지 못했다.
30년 가까이를 한국에서 지내면서
나는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을 즐겨할 만큼 한국어에 능통(?)했는데,
영어는 자주 쓰지 않는 언어이다 보니, 흥미는 있었으나 잘하지 못했다.
그리고 언제나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친구들을 보면 그들을 동경했다.
다년간의 동경의 경험을 통해 느낀 것은
'살다오는 것을 이길 수 없다.'였다.
언어는 아무래도 체득하는 것이었고 살아 움직이는 것이었기에
현지에서 생활하지 않는 한, 늘 제자리일 수밖에 없다.
나의 생존에 그것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외국어가 느는 것은 어느 정도의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나중에 한국어 교원자격증을 취득하면서 들었던 이중언어론 수업에서는
나의 다년간의 경험으로 이루어낸 가설이, 진짜 언어의 이론 중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약간 기쁨의 쾌재를 불렀었는데
여하튼 나는 영어를 잘하고 싶었고, 출산주의였기 때문에
내가 낳은 자녀들이 영어의 어려움이 없이 자라기를 바랐다.
그래서 결혼이민을 결심하게 되었는데,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이민자의 삶이 이렇게나 어려운 일임을 인지하지 못한 채로 결정한 것이었다.
이민은 '다시 태어나는 일' 같았다.
한국에서는 말싸움에서 져본 적이 없는 입 털기의 귀재였는데,
뉴질랜드에서는 유치원 생보다 못한 의사표현에 머물러야 했다.
물론 뭐 요즘 친구들이 자주 쓰는 말인
'누칼협?'(누가 칼 들고 협박했나요?)으로 질문한다면,
'스불재임'(스스로 불러온 재앙)이라고 답변해야겠지만
이민자의 삶이란 녹록하지 않았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실 내가 감히 이민자의 삶의 여유를 논하기엔 좀 역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사실 나는 배부른 소리, 호강에 겨워 요강에 지리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나는 결혼이민을 했기 때문에 비자(VISA) 문제에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이민이 어려운 이유 가장 큰 문제가 바로 비자문제인데,
머무를 권리, 일할 권리를 쉽게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민자의 처절함을 느끼는 정석(?)
워홀(워킹홀리데이)로 와서 워크비자를 받고 일을 해서 영주권을 따내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그 절절한 스토리에 속하는 이민자는 사실 아니다.
시부모님과 남편과 아갓쉬가 겪은
영주권을 취득하기 위해 쓴 그 10년의 진짜 '억까' 이야기 앞에
나는 감히 명함을 내밀 수 없다.
그렇지만 나 같은 초급이자 하수레벨의 이민자 역시도
해외 이민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나 역시, 진짜 '말 못 하는 어려움'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전까지 배운 영어는 하등쓸모가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영어를 다시 배워야만 했다.
산책과 스몰토크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생짜로 던져진 채로 '말'을 해야만 했다.
생존해야만 했다.
영어를 너무 못해서, 의사소통을 못하는 날도
영어를 마구 말해서, 의사소통을 못하는 날도
영어가 들리지 않아서, 의사소통을 못하는 날도
영어가 나오지 않아서, 의사소통을 못하는 날도
뭐라는지 하나도 모르겠어서, 울고 싶은 날에도
내 옆에는 뭉치가 있었다.
한 번은 결혼이민을 하지 않았다면
뭉치가 없었다면 나는 이민 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을까 생각했다.
혼자서 유학생활을 했다면
외로움에 못 견뎠을 것 같다는 생각을 20대 때 한 적이 있었는데,
나의 가늠이 맞았다.
나는 아마 결혼 이민을 하지 않았다면 진즉에 짐을 싸서 한국에 돌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왜 돌아왔는지 답답해서 도라방쓰했던 나의 심정을
대자보나 현수막에 써서 붙였을 것이다.
그러나 머물러야 할 이유가 분명하기 때문에
나는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하루에 영어단어 100개씩을 외웠다.
정말 내가 선택한 삶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민자의 삶이 쓸쓸하고 고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이 선택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었고
누구에게 이 어려움을 호소할 수도 없었다.
내가 선택했기에 나는 잘 해내고 싶었다.
그래서 혼자서 열심히 연습하고
뭉치와 나가서 실행해 보기를 반복하며 하루를 살아냈다.
매일 같이 좌절하고 매일 실패했지만
뭉치와의 약속이자 나와의 약속인
산책 덕분에 나는 매일 같이 포기하지 않았다.
뭉치는 나에게 '지속할 수 있는 용기'가 되어준 것이다.
덕분에 나는 이제 외국인(?)이라고 하기엔 사실 내가 여기서 외국인인데...
아무튼 영어를 쓰는 원어민들을 겁내지 않으며,
한국에 있다가도 이곳에 돌아오고 싶어진,
정주(定住)하는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