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내 친구 이뭉치
드라마 커피프린스에는 이 명대사가 나온다.
"네가 남자건 외계인이건 이제 상관 안 해.
정리하는 거 힘들어서 못해먹겠으니까.
가보자 갈 때까지. 한 번 가보자."
물론 뭐 드라마 커피프린스에서 이 대사는 현재에 와서 재평가를 받고 한다.
이 대사는
남자인 줄 알고 채용한 여자주인공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남자주인공이
남자여도 상관없이 사랑하겠다는 희대의 절절한 사랑 고백이었으나,
10년이 지난 지금에서는 '근로계약서'만 제대로 썼어도 이런 대사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하튼 내가 이 대사를 가져온 이유는
뭉치와 나의 시작이 어찌 됐던 간에 뭉치는 나의 첫째가 되었고
나의 가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엄마인 어머님이 계시지만,
뭉치는 내 마음속에서는 도련님이 아닌 첫째가 되어버린 것이다.
뭉치야 네가 도련님이건 지랄견이건 이제 상관 안 해.
산책하는 건 힘들어서 못해먹겠다 싶을 때도 많겠지만,
가보자 대학까지. 한 번가 보자.
뿌이뿌이 뿌이~~~ 찢었다~ 뿌이뿌이뿌이~
혼자 이런 추임새를 넣어보며
뭉치의 관한 내 사랑을 고백한다.
임신 소식이 또 있었을 무렵,
아가씨는 내게 약간의 머뭇거림과 함께
"언니 아기 낳으면, 저랑 뭉치가 나가야죠"라는 말을 했었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했다.
아갓쉬도 내 식구고 뭉치도 내 식구인데
어딜 가냐고 말했다.
1년 이상 우리는 함께 밥을 마주하면서 먹었다.
식구(食口)는 함께 밥을 먹는 사람을 말한다.
가족, 식구는 같은 말이기에 우리는 가족이다.
뭉치는 우리 집의 '첫째'인 것이다.
둘째 낳는다고 첫째를 버리지 않듯이,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뭉치를 버리거나
어디로 보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근래에도 강아지나 고양이를
임신하게 되었을 때, 파양 하는 경우가 있다.
알레르기나 뭐 다양한 이유로 파양 하곤 하는데
'아이'와 함께 반려동물을 기르는 것에 관한
어르신들의 따가운 눈총과 잔소리로 인해 벌어지곤 한다.
우리 사회에는 당연히 '반려동물'에 관한 간극이 있다.
'짐승', '애완동물', '반려동물' 사이에는
절대로 뛰어넘을 수 없는 엄청난 장벽이 서있다.
그렇기에 아이의 기관지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반려동물을 파양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뭐 누구를 비난하고 비판하고자 이 글을 쓰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내 경우에서는 My case에서는 그런 일은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강아지와 아이가 함께 자랄 때
더 많은 것들을 느끼면서 아이가 자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반려동물과 함께 자란 아이가 감성적으로도 더욱 풍부하고
면역적으로도 더욱 튼튼하게 자란다는 것은 이미 숱하게 많은 논문에 나와있다.
이는 가설이 아니고 가정이 아니고 '사실'이다.
그것이 '거짓'이라고 하고 아이에게 좋지 못하다고
판명이 난다고 하더라도 나는 뭉치와
내 아이를 분리해서 키우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과학적 사실은 틀렸다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
내가 뭉치 덕분에 성장한 이민 1년 차를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뭉치가 두 살이 될 동안 나도 함께 컸다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서른 살 넘은 나를 이 작은 생명체가 다시금 일으켜 세우는데,
어린아이들에게는 얼마나 더 많은 사랑과 놀라운 경험을
작은 털뭉치들이 전해줄지- 정말 모를 일이다.
난 내가 임신을 했을 때도 뭉치에게
기저귀 가져오는 훈련을 시킨다고 말할 정도로
뭉치를 내 육아의 든든한 동지,
함께하는 가족이라고 생각한 적은 있어도
뭉치와 내 아이를 분리해서 키운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아직 우리 가정이 불완전하고
우리가 언제까지 한 집에 살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가족들이 따로 살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우리 가족 모두
'뭉치'의 행복과 거처에 관해서
제일 먼저 논의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스레드인가 어느 SNS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열띤 토론이 열렸다.
'모르는 사람과 내 강아지가 물에 빠진다면? 누구를 구할 것인가?'가 주제였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내 강아지'를 건진 다였다.
사람들은 강아지를 선택한 사람들에게 '인본주의'에 어긋난다면서
반려견을 선택한 사람들을 비난했다.
사람의 목숨이 어떻게 강아지보다 못하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외쳤다.
"당연히, 내 강아지지"라고 말했다.
모르는 사람보다는 수 백번, 수 천 번 내 강아지를 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려동물은 가족이고, 모르는 사람보다 소중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나의 소중한 가족이다.
모르는 사람은 나를 일으켜 세우지 않았고
모르는 사람은 유산한 나를 지키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은 나에게 지속할 용기를 주지 않았고
모르는 사람은 영어를 못해 허둥지둥한 내 곁에 없었다.
모르는 사람은 나를 위로하지 않았고
모르는 사람은 나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심리학과 교육학 용어에 있는
'의미 있는 타인'은 무척이나 중요한 존재이다.
그런데 나는 이 타인의 정의가 조금 더 넓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사, 친구, 지인, 직장 동료 등이 아닌 반려동물 역시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 존윅에서는 죽은 아내 사이에서 남은 유일한 가족인
자신의 강아지를 킬러들이 죽이자, 분노한 주인공이 복수를 시작한다.
물론 그는 전직 전설의 킬러였으니까, 잘못 건드린 것은 맞는데
여하튼 반려동물이 각자의 가정에 있어 의미 있는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뭉치와 내가 어떻게 만났건 무슨 사이로 시작되었건 간에,
뭉치와 나는 낯선 타국 땅에서 만나 가족이 되었다.
서럽고 서러운 어렵고 어려운
그 많은 좌절과 두려움 속에서
끊임없이 나를 세워 준, 소중한 존재이다.
이민 3년 차에 접어들고 있는 나를
지속하게 해 준, 언제나 다시금 일으켜 세워줄 뭉치-
어느덧 난임 3년 차에 접어들고 있는 나에게
수많은 위로와 용기가 되어준 뭉치는
언제나 나에게 있어 영원한 첫째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