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푸르르기만 한 여름에서 끝을 얘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내 고국의 여름은 녹음이 온 땅에 가득했고 생기가 가득했습니다. 내 고국의 여름은 일 년에 절정에 이르는 위치에 있어 여름이 더욱 싱그럽게 느껴졌습니다. 뜨겁게 타올라서 숨마저 컥컥거리게 만드는 그 태양아래에서 삶을 가득히 느끼는 것이 여름이었습니다.
이곳은 내 고국에서 12시간 넘게 떨어져 있는 남반구의 나라. 이곳은 사시사철 푸르고 녹음이 가득합니다. 자연의 싱그러움도 가득하고 여름이 뜨겁긴 하나 그래도 저녁 바람은 제법 쌀쌀해 여름을 보내는 데 있어 지치지 않게 해 줍니다. 이곳의 여름에서도 끝을 말하는 것이 어색해 보이게 싱그럽고 푸르릅니다.
하지만 남반구의 여름은 한 해의 끝자락에 있습니다. 썰매를 타는 산타가 아닌 서핑 보드를 타는 산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헤치며 귀와 볼이 벌거진채로 꽁꽁 싸맨 목도리를 두르고 가던 성탄 미사를 이곳에서는 반팔을 입은 채로 여름밤바람의 설렘과 함께 드립니다.
나의 고국에서 연말이라 하면 자고로 바깥은 온통 얼었고 문을 열자마자 맞이하는 것은 추운 바람이지만 따뜻한 온돌 바닥에서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김장김치를 먹고 따뜻한 음식을 먹으며 보내는 겨울과 함께 보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그 풍경들과 촉감은 진정으로 한 해가 갔음을 실감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새해에 시작과 함께 얼어있던 땅들이 녹아가며 그렇게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기다리는 기다림의 순간으로 보냈습니다. 그래요. 자고로 연말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는 칼바람이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어서 인지 서둘러서 다시 인생을 살아가야만 할 것 같고 다시금 풀린 마음을 다 잡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나의 인생에 연말과 새해는 오직 칼바람 때로는 아름다운 눈송이와 함께 고국에서 맞이하던 연말과 새해뿐이었습니다.
그러던 내가 한 해의 끝자락을 여름의 녹음과 이 푸르름들과 함께 맞이하는 남반구에서 보내고 또 이렇게 새해를 맞이하려고 하니 어색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마치 나만 빼고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내게 여름은 끝을 논할 수 없는 정열의 계절인데 이 계절에서 한 해를 보내주려고 하니 내가 알고 있던 여름이 아닌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아주 오랫동안 내 안에 있던 명제가 - 어떠한 발견에 의해 바뀌게 되는 기분입니다. 살면서 이 명제가 바뀔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예상한 적도 없었는데 아마 이게 인생의 재미인가 봅니다.
언젠가 익숙해지겠고 또 남반구의 여름을 내 고국의 여름처럼 사랑하게 될 날이 오리라 생각합니다. 여름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계절이니깐요. 그래도 처음 맞이하는 남반구의 연말은 새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고 또 어색합니다.
여름에 맞이하는 연말은 그저 평범한 삶이 계속되고 있는데 어떠한 이벤트가 지속되는 기분입니다. 남반구의 따뜻한 날씨덕에 새해에도 어떤 천지개벽의 느낌이 아닌 어제에 이어지는 그저 평범한 하루 같은 나날들입니다.
어쩌면 그런 느낌이 남반구의 새해 일지도 모르겠네요. 인생은 그런 것이겠죠. 세라비 C'est La Vie.
남반구에 계절 덕에 마치 아무 일도 없던 듯이 새해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한 해를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한 감상에 잠기거나 새해에는 어떠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할 순간이 없습니다.
그저 여름을 만끽하며 태양의 정열을 녹음을 마음 가득히 넣어두기에 바쁩니다. 만물이 이리 생동하기에 매일 마주하는 아름다운 자연에 하느님을 찬미하기에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새해에도 그 어떤 거창한 이유 없이 그저 유영하듯이 삶을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그저 물 위에 떠 있는데 새해가 마치 거짓말처럼 찾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문득 그렇게 살아도 된다는 무한한 용기가 샘솟게 합니다. 한해마다 버킷리스트를 채우기 바빴고 다이어리를 새로 꾸미는데 바빴는데 - 계절의 절정 속에 맞이하는 새해 덕분에 새해에도 그저 하루하루에 감사하며 매일 행복하며 살아가겠다는 마음을 먹습니다. 새해에도 그저 부지런히 행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