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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cy Mar 01. 2023

남의 일에 함부로 입대는 거 아니지

그렇지


몇 년 전, 직장 동료는 뇌졸중을 앓았던 엄마를 돌보고 있었다. 엄마에게 전화가 오면 화를 팍 내곤 했다. 엄마한테 왜 저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저럴 바엔 옆에 없는 게 낫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때 그런 생각을 했던 나를, 엄마에게 오만가지 짜증을 다 냈던 동료의 찌푸린 눈썹을 떠올린다. 나라고 별반 다를바가 없으니…


공자님은 부모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봉양해야 한다고 했다. 그게 아니면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것과 다름 없다고 하셨다. 나는 갈수록 바보같아 지는 엄마의 모습에 적응하고 있다. 엄마의 바보 같은 모습이란….어떤 것이냐면 엄마는 문맥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엄마와 나는 오후 다섯시에 집 근처 중국집에 가기로 했었다. 갑자기 네시 삼십분이 되어서 엄마는

“떡국 먹자”

“그래? 그럼 일단 나가서 한 바퀴 산책 하고 먹자.”

“나 안먹을래.”

“무슨 말이야?”

“배 안고파. 안 먹을래?”

“대체 무슨 말이냐고!”


이런 식으로 나는 엄마에게 화를 낸다. 나의 자식이면 화를 안낼 것이다. 아마 귀엽겠지. 어리니까 그럴 수 있다며 귀여워했을 테지만 엄마는 그렇지가 않다. 화가 난다. 엄마가 나를 미워하는 것 같아서 속이 상한다. 나를 미워하니까 나에게 저러는거야, 나에게 괜히 심술 부리는 거야 하는 마음이 올라온다. 엄마도 엄마 나름대로 속이 상할 것이다. 엄마가 생각하는 것과 말이 자꾸 다르게 나오니 말이다.


곧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독립하지 못한 내가 죄인이요 하며 한숨을 내쉰다. 법륜스님에게서 배운 수행자의 자세를 떠올린다. 지금이 가장 좋은 때임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좇까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건 고통받는 서민들을 위한 정신고문이며 불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가 결국은 세상의 불평등을 없애지 못했고, 가난한 이들의 마약으로 쓰이고 있는거라며 어디서 들은 말들을 내 머릿 속에서 쉴새 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내 나의 모습을 알아차린다. 좇까든 땅콩을 까든 엄마는 내 엄마다. 나를 키워준 이 세상의 단 한 사람 나의 엄마. 자꾸 옆에서 엄마의 말을 못 알아듣겠다며 짜증을 내느니 차라리 몇 안되는 돈으로 독립하는 것도 방법일 것 같다. 생리를 곧 하려나보다. 걸음걸음마다 짜증이 솟구친다. 제길. 왜 생리같은 걸 해서 이 난리인가. 애를 낳을 생각도 없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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