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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낑깡 Mar 15. 2022

천재 말고 요절

체리필터의 Happy Day를 듣고


천재 말고 요절

w. 낑깡





  어렸을 적의 나는, '요절할 천재일 줄만' 알았다. '모든 게 다 간단하다 믿었'다. 나는 천재고 내 인생은 내 마음대로 될 거라고, 지구는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그렇게 믿었다.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은 아마도 지구의 중심축이 내가 아님을 깨닫게 되는 과정이 아닐까. 나 하나 없이도 지구는 돌고, 나는 '천재'가 아니라 범인임을 깨닫는 과정. 그런 게 정말로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면, 슬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 또한 이제 천재보다 요절이 더 현실성 있음을 믿는 (어쩔 수 없는) 어른이지만, 그래도 '딸기약 해열제처럼 환상적인 해결책'을 원하는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으니까.


  중학교 때 수학을 가르쳐주시던 학원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평범하게, 남들처럼 사는 게 제일 어려운 거야. 남들 입는 거 입고, 먹는 거 먹고, 남들 잘 때 자고 남들 일할 때 일하고. 그런 게 제일 힘들어. 그래서 사람들이 나이 들수록 평범하고 싶어 하는 거야."


  '거칠 것이 없었던' 나는 나이 드는 게 그런 거라면 영영 나이 들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평범하긴 죽기보다 싫었다. 누구보다도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인정해야만 했다. 특별함은 세상에게 부여받는 것으로, 나의 의지와 무관하다고. 그렇게 나 자신을 달래며 평범이라도, 제발 그거라도 꿈꾸는 사람으로 자랐다.


  그런 나지만, 이 노래를 들을 때만큼은 다시 특별해지고 싶다. '작은 것에도 행복했었던' '어느 별로' 날아가버린 그때의 나를 찾고 싶다. 천재보다 요절이 더 빠른 선택지라고 하더라도, '요절할 천재'가 되고 싶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날개를 쓴 이상처럼. 나는 무얼 바라 다만, 홀로 침전하고 있던 걸까 고민했던 윤동주처럼. 반짝 빛을 보고 요절해버린 천재들의 삶은 범인의 삶보다도 슬프고 비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빛나고 싶다.


  물론 (약간은 하고 싶지만) 요절하고 싶다는 말도, 요절해버릴 만큼 천재가 되고 싶다는 말도 아니다. 그저, 나를 나로서 인정해주었던 어렸을 적의 나를 찾고 싶다. 나라는 사람 속 있는 그대로 반짝이는 무언가를 인정해주었던 나로. 이미 너무 낡디 낡아버린 나에게 그 반짝임을 찾아내는 일은, 많이 어렵겠지만 틈날 때마다 닦고 또 닦다 보면 어렸을 적 반짝였던 나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세상의 때를 묻어 뭉툭해졌을 뿐, 원래부터 빛나고 날카롭던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가끔 내 탓인 일에 세상을 탓하고 싶다. 어차피 미운 세상 조금 더 미워한다고 달라질 건 없을 테니까. 나를 조금 덜 미워하기 위해, 세상을 미워해야 한다면 기꺼이 미워하겠다고. 그러면 나도, 세상도 사랑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예전에도 나였고, 지금에도 나이므로. '어느 별'로도 날아가지 않았다고. '어느 별'에도 묻히지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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