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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부기 아빠 Apr 23. 2023

기록하고 싶은 기억의 단상 B-1

외할머니의 메모

정확한 시기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고등학생시절이었던 것 같다. 아마 고 1, 2 학년 때였을 것 같은데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


부모님께서 맞벌이를 하셨기 때문에, 양가 할머니께서 나와 동생을 키우는데 많은 도움을 주셨다. 친할머니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내며 우리 남매를 돌보아주셨고, 외할머니께서도 종종 찾아오셔서 며칠 혹은 몇 주씩 머무시며 집안일부터 시작해서 밀린 청소와 식사, 그리고 각종 집안의 궂은 일을 도맡아 주셨다. 특히 외할머니는 특유의 꼼꼼함으로 집안 정리와 청소를 엄청 잘해주셨는데, 성인이 되어 가정을 이룬 지금 돌이켜보면 참 번거로울 수 있는 일을 너무도 묵묵히 잘해주셨던 것 같다.


그날도 외할머니께서 한 주간 머무시며 우리 남매를 돌보아주시고 가시는 마지막 날이었던 것 같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나는 버스를 타고 한 30-40분 걸려 학교를 갔는데, 그날은 조금 늦게 일어났던 것 같다. 허겁지겁 씻고, 옷을 챙겨 입고 인사드리고 집을 나섰다.

야자(야간 자율학습)였던가, 학원이었던가, 아무튼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책상에 아래 메모와 함께  만원이 놓여있었다.


"앗침에 느저서 미안하다"


처음에는 만원을 보고 설레였지만, 무슨 돈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삐뚤빼뚤하고 맞춤법도 틀린 초등학생 저학년의 글씨 같은 메모를 보고 무엇일까 한동안 생각을 했다.


"앗침(아침)에 나에게 느저서(늦어서) 미안할 사람이 누가 있지?"...


그 순간 불현듯 오늘 본인의 집으로 가셨을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아침에 정신없이 아침도 먹지 않고 학교로 갔는데, 할머니께서는 본인이 아침을 빨리 챙겨주시지 않아서 미안하다고 메모와 함께 용돈을 남겨주셨던 것이었다. 사실 아침은 원래도 잘 먹지 않았었는데, 할머니께서 그렇게 본인의 탓으로 여겼다는 사실에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마음 아팠던 것은 맞춤법이 틀린 할머니의 메모였다. 나의 세대, 그리고 부모님 세대만 해도 6.25 전쟁 이후 나름? 평화로운 세상 속에서 눈부신 경제성장과 함께 많은 풍요를 누리고, 교육도 잘 받고 자랐는데, 할머니의 세대만 하더라도 그렇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헌신과 사랑으로 자녀들을 키워내신 세대인데, 그런 우리 할머니인데, 맞춤법이 틀린 메모를 보니 감사한 마음과 죄송한 마음 등 다양한 감정에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그날 이후 할머니의 메모는 내 지갑 속에 담겨있다. 나는 종종 꺼내보며 할머니의 사랑을 되새겨보곤 한다. 외할머니는 몇 년 전 오랜 투병 후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할머니의 사랑은 이 메모를 통해 계속 내 마음속에 깊은 울림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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