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와 효율의 영역에서 벗어나 자아 찾기
어떤 미래학자들은 인공지능이 기술을 대체해 가며 인간이 더 이상 기술적이지 않게 되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말한다. 일하지 않는 사회가 출연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직 세상은 기술을 내재한 인간을 가치 시장에 올려놓는다. 우리는 끊임없이 나의 효용성을 주장해야 하며, 심지어 사람과 사람 사이 간에도 그의 능력치를 환산해 판단한다. 미래학자들은 미래만 알고 현실을 모른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졌다.
다만 그들의 주장 일부는 동의한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 생활의 편의와 능력의 평등함을 위한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기술이 아닌 쪽에서 인간을 증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또한 기계적이지 않은 면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인간성을 증명해야 한다. 인간은 유용하지 않은 면에서 자아를 확립해야 할 것이다.
'번아웃'과 업무 이탈로서 '나'를 찾으려는 많은 이들의 노력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무한 경쟁 사회에 특화된 우리나라에서는 학창 시절부터 (사회에) 유용한 면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자아를 형성했다. 개인의 장점은 특정 분야에 대한 재능이며 경제적인 가치와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밑천이다. 재능은 돈 벌 수단으로 치부되기 십상이고 그것이 개인의 정체성이 된다. 그러나 일을 하며, 재능을 사용하는 시장경제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일이 잦아지면 그곳에서 만들어진 개인의 정체성은 점점 낡아간다. 나는 '번아웃'을 그래서 일종의 자기 소진이라고 규정한다.
1. 자기 소진 |
자기 소진은 자발적인 소진이다. '자발적'이라는 말은 자발적 이도록 조장하는 유도에 넘어간 것도 포함한다. 중요한 것은 자발적인 행위가 뭍에 드러나 책임을 전가시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공동체 혹은 어떤 형식의 규칙에 저항하지 않음(저항하지 않음은 순응과 다르다. 그러나 드러나는 행위가 같기 때문에 결국 자발적인 것으로 해석된다. 여기에서 개인의 자아가 받는 타격은 결이 다르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a. 순응에 대한 행위의 책임과 b. 저항하지 않음에 대한 행위의 책임은 내적으로 굉장히 다른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매 순간 뭍에 드러날 행위가 같더라도 두 개의 선택에 대해 진지하게 인지적으로 굴어야 한다.)으로 자발적으로 소진된 자아는 그 상실에 대해 보험을 청구하기 어렵다. 자기 소진에 따른 상실은 보험 역시 자기에게 책임을 묻기 때문에 더욱 절망적이다.
자발성은 언제나 위태롭다. 그것은 소통을 통해 성장하기 때문이다. 즉, 외부에 노출되어 있으며 외부와의 소통과 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자발성은 독립된 상황에서 구현되기보다 비독립적인 상황에서 내적인 결정의사 과정을 거쳐 일어난다. 독립된 상황과 독립된 결정의 상황은 자발성을 따지기 어렵고 다만 자발성이 가능한 것은 상황과 결정 자체를 묵인하는 방법이기 쉽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후술 하기로 한다.
자발적인 소진, 자기 소진 역시 외부와의 소통작용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자기' 혹은 '자아'는 반드시 외부의 소통 작용으로만 성장하지는 않는다. 자기가 자발적으로 소진되고 있다면 소진되어야만 하는 장소에 자기 자아가 생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외부와의 소통 작용으로 생성된 자기자아이기 때문에 소진되는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소진의 변수를 줄 수 있는 조건이 '자기'의 소진 형태가 아닌 '자기'의 생성 형태에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 자기 소진은 정체성이 뿌리를 내리는 곳(Terra)과 성장에 관여하는 물질(Water), 수확 또는 성과(Fruit), 그리고 성과의 씨앗(Seed)을 개인이 취득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깊게 연관되어 있다.
* 투자, 또는 교환의 개념은 소진과 다르므로 논외로 한다. 소진은 재생 불가함, 씨앗Seed없는 과실Fruit로 순환과정에 기여하지 않고 휘발되는 것이며 거세당한 에너지다.
2. 자기 자아의 장소 |
자기 소진은 정체성이 뿌리를 내리는 곳Terra에 따라 정도가 달라진다. 성경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겹비유한다. 자기 자아가 제대로 된 곳에 자리하고 있다면 성장과정의 분실, 성장 후 과실의 소진, 소비와 소진을 촉발하는 대상과의 소통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
핵심은 자기 자아를 자발적인 소진을 전제로 하는 세계가 아닌 곳에 씨를 뿌리고 뿌리내리는 일이다. 미래학자들의 말을 참고하여 재능과 유용함으로 자아 정체성이 뿌리내리는 장소가 아닌 곳에 뿌리내리는 일이다. 외부의 소통작용, 경제활동 또는 거래, 능력과 유용함으로 자기를 확립하는 장소에서 소진되어야 마땅한 곳이 아닌 은밀한 곳, 무용함의 땅에서 자기자아를 생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무용함이란 순수의 땅이다. 조건과 거래가 없는 장소다. 무용한 자기는 쓸모를 증명하지 않는 자아이며 자발성이 불필요한 행위 장소의 자아이다. 증명 없이 존재함은 거기에 그냥 있는 것이다. 이유와 결과, 인과관계를 묻지 않으며 오로지 있는 것은 자기의 존재와 자기자아의 관계뿐이다.
앞서 말한 자기 소모는 유용함, 경제 가치의 땅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문명의 땅이다. 문명이 이룩한 유용한 땅은 악한 땅은 아니다. 문명의 땅은 인공지능까지 연결된 수많은 지식의 연산과 축적 가운데 인류를 지금의 자리까지 키워왔다. 그러나 문명이 생명과 자아를 인식하는 방법은 위험할 수 있다. 현재 인공지능이 인간과 생명에 대한 윤리적인 인식에 문제가 있다는 점이 속속 밝혀지는 것은 문명 자체가 인간과 생명을 인지하는 방법에도 역시 부자연스러운 잣대가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유용한 문명의 땅은 유용함을 전제로 존재를 성장시킨다. 하지만 존재의 유용함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후행적이어야만 한다. 유용한 존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며(Tabula Rasa*) 유용하다는 개념 또한 시스템의 영역과 종류에 따라 후행적으로 뒤따라오는 것이다. 유용함을 전제로 한 존재의 선별은 육종법과 다를 바가 없다. 무리한 비유가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개량된 교육을 통해 우리 재능의 유용한 부위를 발달시키며 그것을 근거로 사회의 경제인구의 출입증을 부여받는다.
반면, 무용함의 땅은 문명과 유용함에 따라 선별되지 않은 땅이다. 그러나 결코 유용하지 않지 않다. 시스템화된 유용함의 기준을 따르지 않을 뿐이다. 자발성이 촉발되지 않으며 기준과 증명과 출입증이 없는 곳이다. 그러나 방종의 구역은 아니며 절제와 자기 테크닉이 전무한 곳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많은 자기 테크닉이 필요한 땅이다. 목적은 없으나 광범위한 미래를 위한 장소이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나 시간성을 함유해야 하는 곳이다.
대지를 상상해 보자. 품종이 개량된 목적성이 뚜렷한 작물의 밭이 아닌 들판을 상상해 보자. 개량되지 않은 야생의 꽃과 열매는 문명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다. 생산성도 현저히 떨어진다. 그 장소는 멸종되지 않은 가능성의 품종의 땅이며 인위적인 지식으로 개간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더 다양한 계절의 잔인한 속성을 견뎌야 하며 스스로 존립하기 위한 고군분투의 장소이기도 하다.
만약 당신이 땅의 주인으로 유용하지 않은 땅, 무용한 땅을 가꾸려면 더 세심한 관심과 테크닉이 필요하다. 품종을 선택하기보다 땅에 존재하는 품종을 인지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컨트롤에서 벗어난 생태계에 순응하거나 협의하기 위해 관찰과 인식의 과정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관찰과 인식은 유용함을 전제할 때보다 무용함을 전제로 할 때 훨씬 더 어렵다. 광범위한 관찰과 인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광범위한 관찰과 인식은 무한하며 기능을 따지지 않는 가능성을 함유하고 있다. 그것은 추출하지 않으며 따라서 성분 분석이나 성질 분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제약이 없기 때문에 제한되지 않는 어려움을 갖는다. 모든 것은 완결되지 않는 끝없는 관찰과 인식의 연속 속에 이루어진다. 먹기 위한 목적으로 작물을 재배하지 않고 먹을 만한 것을 가려냄, 관찰함, 발견함의 단계를 끊임없이 지속해야 한다.
그러므로 무용함의 땅은 무한한 가능성의 땅이며 지치지 않는 땅이며 동시에 지속의 땅이다. 이 땅은 단일 작물에 잠식당해 땅을 황폐화, 소진하지 않으며 계속적인 대립과 저항을 일으켜 끝없는 에너지의 순환을 요구하는 땅이다. 자아는 소진되기 전에 또 다른 가능성을 마주하고 다시 관찰과 인식 행위를 요구받으며 소진에서 소진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끝없는 자기 테크닉을 시행해야 한다.
* Tabula Rasa는 무용의 땅에 가깝다. 그러나 인류와 문명은 빈 석판을 빈 들로 인식하고 인위적으로 새기는 행위를 교육학, 사회학으로 접근해 계몽과 지식의 윤택한 땅으로 가꾸려는 의도 속에서 바라본다. 이 같은 관점은 분명 행동학, 사회학, 교육학적 희망을 설명할 수 있으나 본질적으로 '빈 상태' 또는 '백지'인 상태로 보는 관점이 과연 옳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머니의 신체 속에서 세포 분열로 탄생되는 배꼽의 종족이 가진 연대의 숙명, 무의식과 본능으로 이어내려 오는 선先지식, 몸에서 몸으로 비롯되는 혈통의 굴레에서 과연 인간은 '빈 상태', '백지'의 상태를 가질 수 있는가?
3. 정체성은 발견인가, 심기인가 |
두 개의 땅, 무용의 땅과 유용의 땅은 또한 '발견하기'와 '심기'의 차이를 가진다. 유용의 땅은 심고 가꾸고 거둔다. 효율과 능력의 법칙에 따라 취득하는 자아이다. 그러나 무용의 땅에서 존재는 취득되기보다 '발견'되기에 가깝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정체성은 발견인가, 심기인가. 정체성은 내재된 것의 발견, 발굴, 탐사와 탐구로 그동안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과연 자아는 자연발생적이며 그것을 단순히 발견하기, 캐내기로만 획득가능한 것인가? 자아는 발견된 자체로 그 존재가 인정되는가? 아니면 추가적인 행위가 후행되어야 하는가?
인간의 복합성과 본성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추가적인 논의가 가능할 수 있겠지만 확실한 것은 21세기의 인간은 두 방면 모두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정체성은 다만 현존할 수 있으며 현재에 이르는 많은 경험과 교류활동의 결과물이다. 또한 정체성은 단일하고 영구불변하지 못한다. 따라서 정체성은 수많은 가능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발견된 이후의 필연적인 추가활동이 요구된다.
하지만 앞서 말한 '소진되는 자아'는 발견된 자아가 아니다. 그것은 심긴 자아이며 가공된 자아에 가깝다. 왜냐하면 발견된 자아는 발견되어야만 인지 가능한 존재며 발견하려는 시도에 응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용함의 땅은 발견을 위한 노동을 기꺼워하지 않는다. 또한 정체성의 수확 Fruit 이후의 존재에 '성숙/성인'의 형식을 부여해 일괄적인 시스템을 꾀한다. 문명은 이런 식으로 지식화된 정체성의 거대한 창고를 이룩했다.
따라서 '정체성 발견하기'는 유용함의 땅보다 무용함의 땅의 일에 가깝다. 사회는 일부 발견하기의 과정을 교육에 편승했으나 실은 본능에 가깝다. 인간의 사고능력은 유용한 자아를 기르기 위함보다 발견을 위한 지능에 가깝다. 발견은 모든 선제조건이며 우연함과 본능과 본질을 복합적 요소에 대한 적법한 처리방법이다.
발견한 자아는 광의적 인간의 범주에 거주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땅(자기만의 방)을 이룩한다. 내적 영역이다. 알렉산더 클루게는 공론의 장Oeffentlichkeit를 설명하며 내적 영역intimate 에서의 자유가 공론장의 자유를 담보한다고 말한다. 나는 클루게의 '내적 영역intimate'을 무용의 땅으로 '공론장Oeffentlichkeit'을유용의 땅으로 치환한다. 두 개의 관계는 개인과 다수(고립과 광장)의 개념이나 상위-포함 개념을 뛰어넘는다. 이것은 생산성과 독자성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생산성이란 유용한 수확물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산성은 다름 아닌 창의와 지속의 생명활동을 의미한다. 이는 소진의 반대이며 쓰임을 반드시 목적으로 하지 않는 생산, 즉 무용한 땅의 지속과 가능성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생명활동이다.
4. 자아는 정보가 아니다 |
무용한 땅의 자아는 생명활동이다. 그러나 유용한 땅의 자아는 정보화되기 쉽다. 소진과 정보의 속성을 가진 자기 자아는 AI 시대에 반드시 구분해야 할 중요한 정체성의 유형이다. 데이터의 가치화는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니다. 행정과 국가의 시스템은 개인을 정보화처리한다. 정보는 지식이 아니며 따라서 정체성이나 자아를 부여할 수 없다. 다수의 시스템화는 개인의 정보를 최대한 간결한 것으로 처리하며 공론장마저 축소시킨다. 다시 알렉산더 클루게의 말을 인용하면, 스스로 자기 삶의 생산자로 살아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되어버리고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깨닫는 순간 인지 부조화를 경험하고 고통받는다. 이는 무용한 땅의 자아 생산자, 또는 창의자로의 역할로 사는 삶이 거의 불가능해진 사회, 소비재 또는 소비자로 데이터화된 유용의 땅의 자기 자아와 '실제' 자기 자아의 인지 부조화의 경험에서 오는 불행을 말한다. (여기에서 푸코의 말이 떠오르는 것이 당연하나 주제를 위해 생략하기로 한다.)
여기에서 '실제'는 Live, 진정한 경험/삶의 경험Lebens-Erfahrungen의 땅이다. (근대어인 '사회'에 적을 둔 개념으로의 실제real 실제의 삶(사회)Realworld와 명백히 다른 개념이다.) 경험, 즉 살아있는 - 생명활동의 자아는 단순 정보화를 위해 많은 부분을 축소, 탈각을 겪게 된다. 파편화된 정보, 즉 기능적 형태화된 자아는 '실제' 자아가 아니다. 이 괴리가 불러오는 소진은 이 세계(유용의 땅)에서 저 세계(무용의 땅)의 단절에서 더욱 극대화된다.
보다 근본적인 혜구책은 자아의 정보화를 막는 것이다. 기능적 자아, 유용한 땅의 산물인 가공된 자아의 단순화를 막는 일이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대비책은 정보화할 수 없는 자기 자아를 생명활동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는 지식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이성적 지식(플라톤의 관점으로)Episteme, 영지주의적 지식(깨달음, 앎)Gnosis, 감각으로의 지식(믿음/대중으로의 지식)Doxa에서 플라폰은 doxa를 억견, 빈약한 지식, 들은 것, 받아들여진 것, 즉 정보로서의 지식으로 여겼다. 푸코 등의 논의를 차치하더라도 자기 자아는 결코 doxa, 정보로서의 지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도리어 '발견하는 자아'로는 영지주의적 지식, 깨달음의 영역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앎으로서의 자기 자아, 정보화되지 않은 자아를 존속해야만 모든 것을 정보화하는 세대의 인간으로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5. 나의 유용함이 없는 곳에 내 가치가 있다 |
인간의 가치는 무용함에 있다. 목적 없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자유를 누리며 다른 목적을 상정할 수 있으며 의지와 의도를 창작하고 광범위한 생산가 가능성의 탐구와 발견으로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다. 유용함으로 인간의 가치를 환산하는 것은 도리어 무용함의 가치로 인해 축적된 문명사회의 역지배를 받는 것이다.
어쩌면 인간은 절호의 기회와 벼랑의 합선 위를 걷고 있다. 고도로 발전하고 있는 기술의 체계 안에서 살 것인가 기술이 요소로 존재하는 인간의 체계에서 살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순간이다. 우리의 땅 위에 세워진 유용한 한 평짜리 방 안에서 자기를 가공하며 물건의 값을 매겨진 인간은 과연 소진되지 않고, 소멸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나는 인간 본연 태생의 무용함의 가치를 따르는 성질을 믿는다. 즐거움과 무가치한 삶의 영역에 많은 지폐를 지불하는 성질을 믿는다. 그것은 단순한 문화예술의 활동이 아니라 무용한 자아의 부름이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생산, 대를 잇는 출생에도 값이 매겨진 지 한참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람과 사람의 사랑과 가족을 이루려는 본능을 정보화하지 못했다. 무용한 땅을 한 뼘이라도 가지려 하는 자아의 욕구다.
값을 매김과 다르게 인간 출현의 가치는 결국 본능과 자아의 욕구를 따른다. 즉, 유용함이 없는 곳에서 가치가 발현된다. 이 같은 주장이 경제적인 득이 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소진되어 가는 사람, 유용함의 땅에 심을만한 씨앗 Seed을 발견할 무용함의 땅을 획득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무용함의 가치에서 가장 높은 생명활동을 영위하며 인간성을 보장받는다.
ⓒ EHP 박은혜
2025. 05.08 Park Eun hye박은혜
『무용한 자아』첫 번째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