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래할 지식, 도래할 예술에 대하여 제 1 장
*이 글은 6월 4일 한-독 학술교류 ADeKo 학술간담회를 바탕으로 AI 기반/매개의 예술과 그 이후의 과제에 대한 내용을 골자로 한다. 따라서 "몸"의 차원으로 나아가기 위한 사전 단계의 지식이다.
* 제 58차 학술간담회 "예술과 사회에서의 인공지능 - 열풍 이후 남는 것은 무엇인가? KI in Kunst und Gesellschaft - Was bleibt nach dem Hype?" von Miro Lean Bucher미로 레온 부허(Mediankünstler Dozent RWTH Achen아헨 공과대학 강사/미디어 아티스트)의 강연내용 전반에 대한 요약과 강연에서 촉발된 담론과 사유지점을 짚어보려는 시도다.
전통적인 예술과 예술교육을 배운 사람들이 갖는 AI 기반 예술에 대한 반감은 필연적이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고리타분한 반대가 아니라 새로운 기술의 적용단계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성찰, 비판적 수용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전통책, 그보다 앞선 사본Manuscript, Codex을 존경하는 나로서는 AI와 공유하는 언어체계와 프롬프터를 위한 초현대어(*언어의 보수적인 성향을 바탕으로 이룩한 언어철학이 소실된 즉실용주의 언어관-기계를 운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정서법마저 간과하고 있는 초현대어에 대한 우려를 버릴 수가 없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후술하기로 한다.)로 새로운 언어 사용처에 규제와 통제 없이 양산되는 예술에게 바로 환영 깃발을 들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4년 전, 방문한 독일- 네덜란드의 동시대 예술은 우리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AI와 예술의 너저분한 관계에 대한 정리를 바탕으로 만든 작품들이 즐비했으며 두 해 전 즈음엔 대만, 홍콩 등 아시아 현대미술시장에서도 비슷한 경향을 목격했다. AI의 존재에 대한 고민과 철학이 이미 어떤 예술가들은 자기 안에서 정리, 정립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니 이제 막 AI에 감탄하기 시작한 시장의 소비자들에게 '벌써, 열풍 이후'를 논하는 자리에 각자 다른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이미 '열풍'이 한 김 식어가고 있을지언정, 아직 대중의 의식, 시민의 의식은 오리무중이다. AI 기술에 대한 접근과 관계 정립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벌써 AI 열풍 이후의 사회의식 논의를 다루고 AI 예술의 미래에 대한 자아성찰 지점을 재점검하는 학술간담회가 이뤄진다는 게 성급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뒤쳐졌다는 신호일까. 어느 것이든 진지한 태도를 갖추는 것이 맞을 것이다.
Refik Anadol의 작품은 4년 전 감상한 일이 있다. 강연자 레온 부허는 가장 처음에 아나돌의 unsupervied (2022, MoMA)에 대한 Jerry Saltz의 비평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AI Art에 대해 운을 뗐다. "....이 작품은 내 내면의 어떤 것도 건드리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값비싼 스크린세이버와 같다. Unsupervised has the virtue of not disturbing anything inside you; it triggers no mystery. [...] It’s like looking at a half-million-dollar screensaver.” 동의한 지점은 내면의 건드리는 것, 바로 성찰에 대한 기능이다.
레온 부허는 '자아 성찰'이라는 단어를 자주 언급했다. AI에 대한 자아성찰, AI 작업과 작품과 기능에 대한 자아성찰, AI 체계에 대한 자아성찰 …. AI가 자아성찰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자아 성찰은 '자아'의 존립을 전제로 하고 또한 '자아'와 '자기'에 대한 자기 테크닉이 촉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부허는 '성찰적인 태도'가 '정확한 인식'을 가져온다고 말한다. 현재 AI의 정확성에 대한 의문과 의심이 조금씩 퍼져가는 있는 이때, 역으로 정확성이 떨어지는 현상으로부터 '성찰적인 태도'의 부재를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성찰해야 하는 것은 인간이다. 어쩌면 자아성찰이 인간 지성의 총체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AI를 성찰의 태도로 이해하고 의미 있는 역할을 부여하며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레온 부허가 사례로 들고 있는 결과물에 대한 자아성찰은 그런 의미로 시의적절하고 더 많은 성찰적 태도의 확장을 촉구한다.
접근성이 좋은 대기업의 AI는 상업적 거대모델이다. 부허는 손쉽게, 저렴하게 양산된 AI는 모순적 가치환산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RLHF(Human Feedback방식의 정보 수집 방식)으로 구축된 AI 데이터는 사용자들로부터 정보를 무상으로 공급받는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공급한 정보로 구축된 데이터에 사용요금을 지불한다. 광의적인 의미의 IP, 개인 정보 보호의 사각지대를 노린 무차별적인 데이터 수집에 공급망과 공급처에 대한 처우는 끔찍한 수준이다. 생산의 과정에 관여한 지분을 돌려받지 못한 지식의 구조는 은밀한 불합리와 권력 - 피권력자의 구도를 생성한다.
예로부터 지식은 곧 권력을 의미했다. AI의 정보를 통제하고 규제하는 자는 가장 현대적이며 비물리적인 지식의 권력을 갖는다. 이런 유형의 권력은 사회, 정치적인 권력보다 훨씬 더 막강한 의식지배를 가능하게 한다. 언론이나 교육 통제의 수준을 넘어서 인류 전체에 대한 지식의 규제 권한을 갖은 핑계와 명분으로 획득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식의 감시와 처벌에 용이한 최고의 환경을 가지고 있으며 (*이 부분에서 우리는 푸코의 <감시와 처벌>과 최근 2월에 구글 AI윤리 정책에서 '무기와 감시에 관한 규제를 해제'한다는 윤리강령의 숨겨진 의미를 다시 한번 성찰해 봐야 한다. 이것은 게슈타포를 뛰어넘어 불특정 다수를 향한 불특정 다수의 감시 체계와 감시 체계를 통제하는 상업적 목적의 거대 AI모델, 오염된 지식 기반 세계와 같은 디스토피아적인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이미 경제구조를 이 같은 환경에 이식한 우리 사회는 자연스럽게 새로운 지식 권력층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다시 '지식 소유권' 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상업적 목적으로 AI가 자동 재생산 REPRUDUCE 하고 있는 인류의 지식은 과연 아무런 소유권 분쟁 없이 제공되어야만 하는가? 레온 부허는 지식의 보편성, 전인적인 소유권에 대해 말한다. AI 매개로 생성된 지식에 대한 IP를 논의하기 전, 지식의 공공성을 성찰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식은 공공재다. 물론 전문적인 소수의 지식은 개개인의 선택이다. 그러나 지식은 보편적일 권리가 있으며 인류의 기여도를 가치환원할 수 있어야 한다. 많은 혁명이 권력화된 소수의 지식인에 대한 저항으로 일어났고 문명과 기술도 지식의 저변화, 보편화, 공공화를 이룰 수 있는 방향을 따라 성장해 왔다.
그러나 이에 역행해 AI는 지식의 권력화를 부추길 가능성이 오히려 농후해 보인다. 무상으로 제공받은 정보에 값 매기기, 책임회피 기능이 딸려 있는 매매, 데이터를 소유한 자와 제공받는 자의 명확한 계급체계화는 지금도 벌써 꽤 명확하게 볼 수 있다.
AI는 소유될 수 있는가? AI의 소유권은 기술 소유권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지식 소유권에 대한 문제로 인식해야만 한다. 또는 정보 소유권의 문제이다. 레온 부허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주장하듯 AI는 매개체이며 도구이다. 그러나 이 같은 물리성을 뛰어넘는 도구의 조건은 '소유하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한다. AI에 접근가능한 모두에게 소유권이 있으며 사용에 따라 축적되는 지식은 더더욱이 개인의 소유가 아니다. 따라서 오픈소스, 보편적 지식의 범주에 들어야만 한다.
만일 지식이 공공재라면, 지식과 정보의 기여- 기반-제공의 순환 속에 있는 AI도 공공재로서의 가능성이 있다. 레온 부허는 AI 열풍이 식은 뒤엔 공공재로서의 AI가 구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AI 맥락의 확장, 사회적 확장 이후에 공동 AI 인프라를 구축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규제 Control 하는 자들이 상업적 권력이 아닌 성찰과 검증이 가능한 윤리적 지식인일 때, 공공의 이익, 공공의 재료로서의 AI는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거대 AI모델의 마케팅 전략과 소비자 모니터링에 따른 것이다. 최근의 *리서치에 따르면 낮은 AI 리터러시, 혹은 AI 이해도가 낮을수록 AI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기업은 이들을 겨냥하고 있으며 낮은 AI 리터러시와 이해도로 성찰 없는 소비자들을 위한 개발 방향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 여전히 RLHF의 방식을 선호하는 AI가 이 같은 방향을 꾸준히 지속한다면 학습은 지식의 전문화 및 발전이 아닌 반대의 방향을 가질 것이며 이는 결국 질적 가치의 하락을 의미할 수 있다.
*참고자료 The AI Knowledge Paradox (https://journals.sagepub.com/doi/10.1177/00222429251314491 https://www.centeraipolicy.org/work/the-ai-knowledge-paradox)
또한 이 점은 집단지성 패러독스와도 연계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집단지성 패러독스 COIN(Collective Intelligence) paradox는 흔히 브레아스 역설Braess's paradox과 함께 논의된다. (*참고자료 Collective Intelligence and Braess’ Paradox https://cdn.aaai.org/AAAI/2000/AAAI00-016.pdf) 교통체증에 넓은 도로보다 오히려 좁은 도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브레아스의 이론과 집단 지식인의 멍청한 합의 가능성에 대한 이론은 지식 습득이 수월해진 AI 사용자들의 논의와 문제해결 방식이 과연 지성적인 결론에 가까울지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AI의 정보 보편화가 과연 민주적인 방식인가? 그럴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이 비록 에너지와 기기접근에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적절한 규제와 통제, 윤리의식이 성찰될 때 기술이 새로운 형식의 민주주의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레온 부허를 비롯한 많은 전문가들의 우려처럼 보수적인 시각과 높은 AI 리터러시를 가진 이들의 제도적 성찰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강연에서 미처 논의되지 못한 키워드들은 다음과 같다.
● 무분별한 AI소비와 에너지- 환경 문제
● The Knowledge Paradox
● 보편적 지식수준의 AI와 수익을 기대할 수 없는 전문 영역의 보조 AI tool
● Open Model Ai의 개인정보보호와 정보 기여도 가치 환산
● Process Matters from Knowledge to Pruduct 지식에서 결과물까지의 프로세스 문제들
● 언어개발 : 출처에 대한 성찰과 언어 표현의 문제
레온 부허는 질의응답시간에 미디어 아티스트로 작업할 때 정작 AI 툴을 사용하지 않으며 반드시 모든 예술가가 AI를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AI 기반, 매개, 결과물에 대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본인의 AI Art 예술 수업의 전시 결과를 예시로 든다. 그가 만든 HEIBARA AI와 비슷한 작업으로 모든 젠더적 특징을 지워낸 이미지를 생성하는 방식을 진행한 학생의 작품이다. 학생은 AI를 이용해 젠더리스 이미지를 여러 차례 생성해가며 젠더리스Less를 위해 얼마나 많은 정보를 입력plus해야 하고 정보의 입력은 얼마나 많은 젠더적 특징인가, 에 대한 '-(+ -)=+?'프로세스 성찰과정을 겪었다. 성찰에 따라 그의 작품은 최종적으로 도출한 AI 생성 이미지 위에 투명한 유리판을 부착하고 이머시브의 형태로 관객이 직접 이미지 위에 젠더리스적인 요소를 그리고 지워내며 완성해 나가는 '프로세스형' 전시로 귀결된다.
나는 프로세스형 전시 형식을 선호하지 않았다. 이머시브도 마찬가지이다. 고전적이 의미에서 이는 미완성의, 혹은 작가 책임의 부재 또는 회피를 의미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질문 던지기, 개념 예술의 가치와는 다르게 어떤 예술의 결과물은 반드시 일정 수준의 완성도와 일정 수준의 작가 관점의 제시가 담겨있어야 한다. 그러나 레온 부허의 예시와 함께 근래의 AI Kunst/Art를 보며 인식의 저변이 넓어짐을 느낀다. 특히 아나돌을 비롯한 다양한 E- Kunst(* AI Kunst는 반드시 E -Kunst인가? 생성 작업, 또는 결과물 도출 과정에서 AI가 기여한 많은 경우, 작품이 물리성을 갖더라도기여도에 따라 E-Kunst로 여겨야 할지도 모른다. 이에 관해서는 추후 다시 전개할 예정이다.)와 AI Photo, AI 매개의 작품을 보면 광의적인 이머시브(AI라는 학습 지식 체계의 활용은 무수한 정보제공자들의 참여도가 인정되어야 한다.)와 극단적인 개념 Konzept 예술이 뒤섞인 결과물을 보게 된다. 그것이 정신적인 의미에서 얼마나 많은 예술적 영감과 감흥을 일으키는가, 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더라도 완성을 책임지는 테크닉, 매끈한 표면이 과연 중요한 가치를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오히려 프로세스형 예술, 과정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논의(*물론 이는 다시 공예와 예술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 예상된다. 프로세스를 그대로 노출하는 방식은 작품에 대한 구구절한 설명이 아니라 작품이 AI 매개이든 아니든 작가의 작품임을 증명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이 방식의 희망은 결과나 성과 만능주의를 뒷받침하는 가치관에게 중요한 것은 과정이며 충분한 과정이 성찰을 통해 진행될 때 어떤 완성을 꿈꿀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것이다. 이 방식은 예술 작품의 층위를 더 세심하게 할 가능성도 품고 있다. 테크닉에 대한 성실한 훈련만이 아닌 다른 정신적인 요소들, 분석과 인식의 끊임없는 지적 활동의 레이어와 각 레이어 사이에 얼마나 많은 성찰과 판단이 들어 있는지가 예술에 기여하는 방식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다. 역으로 훨씬 더 많은 정신적 활동의 증명과 투명성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로버트 휴즈의『새로움의 충격The Shock of the New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건만 새로운 사조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레온 부허의 ' - 그 이후의 남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강연 제목은 엄밀히 따지면 새로운 사조에 대한 준비를 촉구하는 것이다. AI Paradox에서 철학이 가장 심도 있게 논의하는 바와 같이 '지식'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할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구분 짓던 지식의 종류(Gnosis. Ephisteme, Doxa)로부터 지금의 학문의 구분에 이르기까지 지식은 출처와 연구 방식, 주제, 전개 방식, 결과물, 실용성에 따라 많은 재정의를 거쳐왔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허다한 어원과 새로운 기술개발에 의한 급격한 미의 새로운 정의에 따라 변화한 사조변화에서 중요한 것은 '매개'였다. 인상주의가 튜브 물감의 발명과 사진기의 발명의 영향을 받았고 문학과 종교는 인쇄기술이라는 기술의 영향을 받았다. 이번 기술은 과연 예술은 어떤 곳으로 이끌 것인가. 지식을 어떤 개념으로 이끌 것인가.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거대 상업 모델의 AI 앞에 낮은 리터러시를 가진 사용자들을 기만하는 수익모델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과 기술과 데이터의 기여도에 따른 예의만이 아니다. 사회, 정치적인 문제는 결국 지식과 예술이 해결해 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E- Kunst는 육체적 과정을 많은 경우 생략한다. AI 매개의 지식은 경험에 근거하지 않는다. 경험에 근거하지 않은 지식은 쉽게 체화되지 않는다. 예술은 더욱 그러하다. 아나돌의 Unsupervied 작품에 대한 Jeff Saltz의 또 다른 비평대로 MoMA의 아카이브 쇼에 불과한 AI 작품은 중요한 씬이 아닌 스크린 세이버의 역할로 머무른다. 또는 정보 수집과 사서의 대행을 이행할 뿐이다. 그렇다면 도리어 예술과 지식은 AI 기반의, 매개의 '경험 없는 지식 Das Wissen ohne Erfarung'을 체험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경험 없는 신체(Körper ohne Erfarung)'다. 우리 몸의 감각은 쓰지 않으면 퇴화한다. 몸의 경험 없는 지식은 과연 우리의 신체에 머물 수 있을 것인가? 감각의 경험이 없는 몸은 과연 예술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도래할 지식과 예술은 반드시 몸을 투과하여 경험되는 것이어야 한다. 이 말은 '몸을 이용한 지식과 예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몸은 이해의 통로요, 사유의 본거지다. 몸의 철학과 몸의 사유를 통한 받아들이기,를 의미한다.
도래할 지식과 예술이 새로운 종은 아닐 수도 있다. AI로 학습된 선지식들의 합의로 그치기가 더 쉽다. 지극한 형이상학의 세계의 지극히 형이상학적인 형태의 지식이 막강한 권력을 가지기도 쉽다. 어라, 아테네 학당이 떠오른다. 플라톤주의자들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의 대립구도 속에 철학과 예술이 팽팽한 텐션을 만들고 그 위에 지식의 개념이 생성되는 때이다.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는 아니다. 오히려 언어를 다루는 일은 플라톤에 가깝다. 그러나 이제는 이천 년 정도 지났으니 전복이 필요하고 형이상학적인 아리스토텔레스와 형이하학적인 플라톤이 존재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나는 더욱 철저한 경험을 통한 지식과 예술의 세계를 꿈꾼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공공재이다. 사람에게 몸은 가장 큰 특징이고 몸을 위한 지식과 예술은 AI 인프라를 앞선다.
** “경험 없는 지식 Das Wissen ohne Erfarung”과
“경험 없는 신체 Körper ohne Erfarung”는 글쓴이의 독자적인 개념어입니다.
ⓒEHP 박은혜
딛는 몸 - 철학의 장소』두 번째 정리.
참고자료
1. 레온 부허의 HEIBARA AI 프로세스 영상 https://youtu.be/d3yqBZwF0hM
2. 레온 부터의 HEIBARA AI Blog Heibara.ai Blog
3. Refik Anadol’s “Unsupervised” (2022, MoMA) https://youtu.be/H9wr2hx1PY0
4. AI 지식 패러독스 https://www.centeraipolicy.org/work/the-ai-knowledge-paradox5.
5. Collective Intelligence and Braess’ Paradox https://cdn.aaai.org/AAAI/2000/AAAI00-016.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