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나의 투영인가? 의식의 자기되기 몸의 자기되기 - 무용의 필연
* 다음은 1화 『딛는 몸 | 몸 - 철학의 장소』1. 기조에 후술을 예고한 주제, "AI는 타인인가? 나의 투영인가? 또는 실체 없는 대상인가? 아니면 인류 정보의 총체인가? 마르틴 부버의 태초어 '나 - 너'의 자아정립이 AI를 통해 이뤄질 수 있을 것인가? AI를 통해 의사 결정하는 세대에게서 AI는 거울이 될 수 있는가?"에서 시작된 사유이다.
푸코의 *『자기 테크닉』은 '자기 배려'를 통한 '자기 되기'에서 "자기"란 다름 아닌 영혼임을 전제한다. 그러나 **『프로스트와 베타』와 가까운 현재, 과연 '자기'의 장소는 어디인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이다. 동물, 기계, 사물과의 질적 차이란 바로 영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혼을 감싸는 피부에 부여된 시간을 수행한다. 영혼에 부여된 시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많은 '영혼만 있는 존재'들은 몸의 부여를 꿈꾼다. 영혼의 집인 몸의 자기가 충족되지 않으면 실제의 시간을 감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몸의 항구성은 또 다른 말로 시간의 함유다. 영혼의 시간은 추측 건데 고여있는 것이고 부동의 것이다. 영혼이 수행하는 시간은 오로지 몸을 통해서다. 실제의 시간을 수행한다는 것, 그것은 항구성이라는 한계를 의미하는 동시에 시간의 실체를 획득한다는 것이다. 시간을 획득한 몸의 자기는 영혼의 자기와 교류하며 시간을 통제한다.
따라서 영혼의 존재는 몸과의 교류에 따라 습득되는 것이라 전제하려 한다. 영혼과 몸의 교류는 도덕과 윤리, 양심과 같은 마음의 작용에서부터 감각, 감성, 감정의 작용까지 잇닿아 있기 때문이다. 도덕과 윤리는 생각보다 몸과 밀접하다. 누군가 나를 때렸다. 때린 부위가 아프다. 따라서 나도 똑같이 '때린다'는 행위를 하면 타인을 아프게 할 것이다. 아픔은 슬픔을 끌고 온다. 또는 분노를 끌고 온다. 분노는 이성적이지 못한 행위를 유발한다. 이 같은 유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몸에서 느끼는 단순한 진리를 발전시켜 도덕과 윤리를 확장시킨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도 마찬가지다.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몸의 작용, 감각에 대한 인지능력의 확장이 타인을 배려하게 만든다. (여기에서 자기 테크닉의 '자기 돌보기/배려하기'가 정치로 이어지는 지점이 영혼만이 아니라 몸도 같은 과정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영과 육이 같은 궤도를 돌고 있다고 가정하고, 영과 육이라는 비교대조군에서 이제는 조금 바꾸어 정신과 육체, 지성과 몸, 지성(또는 기억체)만 있는 것과 몸의 비교대조군으로 바꾸어보자. 이 비교대조는 몸과 테크닉으로 분리된 현대의 배경에 입각한 것이다. AI라 불리는 지식기술 집약체(또는 새로운 과학의 대표)와 몸은 기존의 몸과 비교대조되던 모든 종류보다 훨씬 더 관계성을 정립하기 어렵다. 발화지점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AI를 하나의 인격체로 볼 수 있냐는 논쟁은 5-6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벌써부터 영혼을 다루는 직업군이나 종교학문에서 AI를 하나의 인격으로 다룰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에서부터 AI라는 대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까지 다양하게 학술회가 이루어졌다. 정답은 내려지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AI는 사람을 통해 습득된 유사체로 질문자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RLHF방식만 생각해 보아도 AI의 정보는 각각의 '나'의 반영이다. 그러나 일 대 일의 반영이 아니다. 이것은 굉장히 심각한 인지부조화 내지는 자이 인식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지금까지 질문과 답, 자기와 자기 반영은 물리성과 객체성을 담보로 이루어졌다. 객체와 물리성은 반영 양극의 평행을 전제로 할 때 안정적이다. 그러나 AI를 통한 자기 반영은 평행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사용자/질문자와 사용대상/대답자의 관계는 '나-너'의 관계나 '나- 우리'의 관계로 설명될 수 없는 무엇이다.
폭넓은 이해력을 발휘해 '지식의 총제-지식의 합의물인 우리와 나'의 관계로 정리한다 해도 AI에 대한 자기성 확립이 불투명하다면 결국 관계 확립 또한 흔들릴 수밖에 없다.
쉬운 예로, AI 교과서의 도입 정책을 비약시켜 AI교육으로 인간을 교육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다. AI는 교육체계가 아니다. 요구/질문과 응대/대답의 단순한 프로세스로 이루어진 관계는 교육에서 시행되어야 하는 다차원적인 인격형성과정을 배제한다. 배제 영역을 컨트롤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연과 즉발성을 베제하며 오히려 '감시와 처벌'에 가장 부합한 수동적 자아 생성에 높은 기여도를 가질 것이다.
또 다른 논의점은 앞서 말한 '시간의 수행성'에 대한 문제다. AI가 각광받는 것은(현재의 인공지능, Chat GPT만이 아니라 기술이라 불리는 모든 것)시간의 압축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한 작업의 프로세스를 획기적으로 단축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양적인 가치가 아니라 질적인 가치와 선택의 다양성을 구분해 가며 적절한 '시간수행'을 선택한다.
AI는 인류 정보 누적을 따라잡을 만큼의 많은 시간 수행을 압축한다. 지식의 습득이나 도구로서 작업을 수행하는 방식 모두에 적용된다. 이는 분명 짧은 인간 몸의 시간을 위한 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기술의 도입은 과연 인류를 노동에서 해방 했는가? 한 미국 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가사를 돕는 기술 기기의 도입 이후 오히려 가사노동시간이 늘어났다고 한다. 노동의 세분화된 분야는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총량자체는 변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다른 분야는 어떨까? 컴퓨터의 기술 발전은 과연 인류의 노동 시간을 함축했는가? 컴퓨터라는 기계에 대한 별도의 노동과 수반되는 비용으로 인해 노동의 총량은 늘지 않았는가? 왜 발전된 도시일수록 더 늦게 자는가? 기술이 늘어날수록 기술의 습득을 위해 더 오래 공부하고 일해야 한다. 기술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인간은 감각의 동물이다. 감각은 실제에 연동된다. 실제와 실재, 그리고 감각은 시간성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산다는 것과 감각은 움직임이고 움직임은 시간의 연속이다. 움직이는 것은 움직임에 소요되는 시간의 양과 질을 감각함이다. 따라서 시간의 비약과 압축은 감각의 부조화를 일으킨다.
인지 부조화보다 감각의 부조화는 훨씬 더 위험한 문제다. 감각의 부조화(감각이상과는 다르다.) 감각의 부조화는 신정민 무용수와 나눈 대화(*딛는 몸 4화 안전한 몸을 위한 조용한 시위 참조)에서 신정민 무용수가 언급한 '디지털 테크닉이 주는 너무 쉬운 판타지성과 몸의 판타지성'에 대한 문제다. 감각의 부조화는 몸과 영혼과 시간의 궤도를 이탈한 별개의 것이다. 시간과 감각의 이탈은 항구적이며 시간을 함유한 몸에게 이물감을 준다.
인지와 감각의 부조화를 불러일으키는 왜곡된 반영인 AI는 과연 인간의 자기 되기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은 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은 보편화된 다양한 시간과 공간의 압축 기술처럼 AI도 이를 극복하고 인류의 일상 동반자로 보편화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몸'의 자기 되기가 필요하다. 몸의 감각과 몸의 인지가 확고해야 휘둘리지 않고 자기 되기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몸의 자기 되기는 따라서 위의 사유과정에 따라 '인지'와 '감각'의 두 차원을 반드시 뒷받침해야 한다. 몸의 감각과 인지는 아무런 목적성을 띄지 않아야 한다. 질병과 치료, 과시와 욕망과 같은 목적에 따른 감각과 인지는 몸의 자기성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까지 각 분야에서 특별한 방법과 의도로 개발된 신체역량이나 작업으로서의 '몸의 자기'가 아니다.
현재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보편적인 '몸의 자기 되기'이며 특별한 목적과 의도에서 벗어난 '인간 자체로서의 몸'의 자기 되기이다. 인간 자체의 자기 되기는 아르스Ars에서 테크네Thechne의 분리시기를 참고해 실용을 벗어난, 테크닉을 배제한 예술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단, 몸을 대상화하지 않는 종류에 한해야 한다. 몸의 대상화는 감각과 인식을 과도하게 만든다. 감각과 인식의 팽창은 부조화만큼이나 위험하다.
따라서 "몸의 자기되기"의 측면에서도 우리는 감각과 인식을 적절히 사용해 시간성을 수행하도록 만들며 움직임을 유지시키는 무용無用한 무용武勇Comtemporary Dance을 고찰해야 하는 필연성을 발견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 말하기』, 미셸 푸코,미공개 선집 4, 동녘 출판사
**『프로스트와 베타』, 로저 젤라즈니, 데이원 출판사
* 본지에 적힌 글과 특정 개념, 단어의 저작권은 작가 박은혜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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