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안전의 굴레에서 벗어난 진공상태의 몸
*다음은 신정민 무용수의 작업을 지켜보며 기록한 내용이다. 따라서, 첫째, 아래의 내용의 개념, 아이디어, 워딩은 전적으로 신정민 무용수와 기록자 박은혜에게 있으며, 둘째, 기록은 기록자이자 『딛는 몸 - 철학의 장소』시리즈의 작가의 관점으로 관찰, 연구, 기록된 것으로 신정민 무용수의 개인작업과는 차이점이 있을 수 있음을 미리 밝힌다.
불안은 심리적인 현상인가? 안전은 물리적인 개념인가? 안전을 촉발하는 불안과 불안을 누르는 안전은 쌍방이며 순환적인 활동이다. 또한 심리와 신체의 복합작용이며 순환작용이다. 리서치를 위해 모인 4인의 인물은 안전과 불안의 상관작용과 작용사이에서 일어나는 몸의 징후를 포착하기 위해 모였다. 나는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놓고 시작했으며 수행 중에도 끊임없는 질문을 던졌다.
1. 불안은 무엇인가? 몸의 일인가? 심리의 일인가?
2. 안전은 무엇인가?
3. 쓸데없다는 말의 정의는 무엇인가?
4. 반복하는 행동과 버릇은 의도와 목적에서 차이가 있는가?
A | 위험Lisk 감수하기. 혹은 위험 제거는 안전을 반드시 보장하는가?
A의 경우, 시각정보 통제 상황, 안전하지 못한 위험/불안의 상황에서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부동의, 혹은 고집스러운 행위로 보인다. A는 아주 느리게 움직이거나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다. 안내자의 안내를 거부한다.
위험에 방어적인, 혹은 감수하지 않는 것은 쉽게 바닥에 눕는다. 혹은 앉는다. 혹은 움직이지 않는다. "바닥에 누운 몸"의 상태다. 『몸 - 철학의 장소』의 "누운 몸"이다. 역으로 A는 누운 몸의 내적 상태를 증명하는 셈이다. 위험에 대항하지 않기, 혹은 움직이지 않기로 자기를 보호한다.
몸이 눕는 것은 소진이다. 패배다. 추락이다. 그것은 '불안'의 자세이다.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누운 몸은 과연 일어날 것인가? 디딜 것인가?
A는 무시, 또는 차단하기를 수행한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빌어 의미를 밝힌다. "자기의 소원을 포기한다는 것은 위대한 행위이다. 그러나 자기의 소원을 버린 다음에도 그 소원을 간직한다는 것은 더 위대한 일이다. 『공포와 전율』"
A의 상태, 또는 수행은 '누운 몸'의 위대함을 밝히는 것처럼 보였다. 불안과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행동하기를 포기하기, 거부하기, 그러나 안전을 간직하기의 몸이다. 실제로 A는 대체로 마지막까지 누워있었으며 또는 눕거나 움직임을 억제하거나 통제하기를 바랐다.
A는 후술하며 '인정은 존중이며 포기는 무시'라고 정의했다. 몸은 안전을 위해 본질적인 자기 욕망과 욕구, 희망과 소원을 포기한다. 이것은 인간 전반의 원리이다. 나는 서서히 포기한 것들의 잘게 쪼개진 상실의 무게를 감지했다. *포기와 상실은 반드시 연속되는가?
A의 인식은 점진적으로 발전된다. 위험을 감수하고 움직이기 위해 위험 요소를 제거하기로 한다. *위험 요소는 어떻게 인식되는가? 위험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제거와 무시/포기의 욕구가 교차된다. 이는 '소진시켜 버리기'의 한 방법이다. 조르주 페렉의 『파리의 한 장소를 소진시키려는 시도』, 혹은 트리거를 끊임없이 반복하기, 상처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 다시 한번 상처를 직시함으로써 그것 자체를 소진시키는 것이다. 이 방식은 신정민 무용수의 아이디어, 무의식적인 행위의 크고 작은 반복행위로 완전히 에너지를 소진시키는 방법과 결을 같이 한다. *그러나 에너지는 소진되는가? 자연의 원리는 완전히 소진, 소멸되지 않는다. 끝없는 순환의 연속이다. A의 사고 진행은 연속적이며 순환적인 흐름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안내자의 존재는 안전을 확인하는 순간 통제자로 바뀐다. 통제는 또 다른 불편함과 불안을 야기한다. 안전을 담보하던 것이 심리적 안전(평안)의 상태를 거스른다. 해소된 불안은 공허를 불러온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했던 것인가? 결국 두려움은 두려운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에 대한 자기 자신의 두려움의 문제이다.
불안의 제거는 반드시 안전을 담보하지 않는다. 제거된 상태는 바로 안전으로 직결되지 않으며 안전의 지위를 가졌던 미지의 상태를 현재로 내려 앉힌다. 다시 말해 현시된 상상의 안전은 더 이상 유토피아가 아니며 안전이 아니다. 불안이 부르는 안전은 오로지 미래와 미지의 개념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안에 대응하지 않는 '안전'은 존재하는가?
* A의 상태는 공간을 생성/지배/점유/확보 하는가?
* 안전은 몸의 고정된 상태인가?
B | 써 버리기, 멈추지 않기 - 움직여서 움직이지 않는다.
B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다소 성급하다. 달린다. 소리를 낸다. 자신의 현재를 알리는 방식을 취한다. B에게 불안은 헐떡임이다. 정보가 제한된 상황에서 안내자를 상관하지 않고 계속 움직여 자신의 불안을 '써버린다.' 써서 없애 버린다. 불안은 생명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B는 뛰어든다 *부테스Boutes는 위험을 부르는 사이렌과 폭풍의 바다로 뛰어들어 죽었다. 부테스는 죽음으로 안전해졌으며 위험을 직접 '써버리는' 방식으로 제거한다. 자기파괴적인 성향을 고백한다. 오히려 멈추면 더 두려워진다. 프랑스의 한 극단은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출하며 두 명의 주인공이 러닝머신 위에서 끊임없이 달리게 했다. 기다리기를 멈추지 않기, 불안과 위험의 상황에서 안전이라는 메시야적 환상의 미래를 끊임없이 찾아 헤매기.
B의 멈추지 않고 소진시켜 버리기는 A의 것과 다르다. 확인과 인지를 거쳐 두려움 자체를 말소해 버리기 위한 목적으로 두고 '써 버리기'를 하는 A와 달리 B는 목적과 의도 없이 움직인다. 움직임 자체가 불안이다. 불안은 움직이게 하고 또한 움직이며 불안의 상태를 유지한다. *불안의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무의식적 욕구가 있는 듯하다. 불안은 또 다른 형태의 에너지원이기 때문이다. 불안이 주는 힘에 의지한 자는 불안이 만들어내는 자기의 현시를 포기하지 못한다.
B에게 '누운 몸'은 공허와 허무 감각의 장소다. 그러나 공허와 허무 알아차리기는 불안의 숨소리를 집중하게 한다. 그러면 B이 몸은 눕지 못한 것인가? 아니다. B의 내적 세계는 바닥 자체이다. B는 몸의 현시를 향한 두려움 때문에 누구보다 딛고 일어서지 못하는 몸이다. B는 움직임(무용/춤)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을 고백한다. 다시 말해 B는 현시적 움직임에 대한 두려움/딛고 일어서는 몸의 안전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도리어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이며 유영하는 바닥이 된 몸이다.
다시 한번 『공포와 전율』을 들어 설명한다. "어떤 자는 힘에 의해서 위대했으며, 어떤 자는 지혜로 말미암아 위대했고, 어떤 자는 희망으로 인해 위대했으며, 사랑을 통하여 위대했다. 그러나 '그'는 무력이라고 하는 힘에 의해 더욱 위대했고, 어리석음이라는 지혜로 더욱 위대했으며, 미친 희망과, 자기를 증오하는 방식의 사랑을 통해 더욱 위대했다. "
B는 뛰어들어 써버리기, 부테스의 자기파괴적 불안과 그것이 안전과 상관없이 움직여 안전한 상태로 움직여 가지 않는 역설로 현시한다.
C | 공간의 확보, 물리적 공간의 확장은 내적 공간의 확보
C는 잔발로 움직여 공간을 탐사한다. 안전한 공간에 자신이 놓이기를 원하는가? 그러나 C는 멈추지 않는다. 공간의 확보는 공간의 소유를 반드시 의미하지 않는다. C에게 공간은 끊임없는 확장의 욕구이다. 혹은 공간의 탐사, 확장 자체가 그의 불안의 기법이다.
C는 필요한 동작과 불필요한 동작을 확실히 구분하는가? *필요한 동작과 불필요한 동작/의미의 유무/쓸모의 유무는 어떻게 가르는가? C의 '불필요한 동작'은 안전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혹은 안전과 교환하는 일종의 움직임 재화다. *움직임 재화財貨 : 박은혜가 제시하는 고유 개념으로 행위/움직임은 노동으로 확장되는 확실한 재화다. 물리적 결과물 또는 시간 단위의 물물교환 재화보다 본질적이다. 움직임 재화는 추후에 구체적으로 설명하도록 한다. C의 경우, 움직임 재화는 자기 순환적인 방향을 갖는다. 이는 1차원의 자기 순환 재화구조로 안정적인 자기를 구축하는 단계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준다. 자기의 내적 세계, 즉 내적 공간을 안정화하기 위해 외부 세계와 교환하지 않고 움직임과 내적 상태를 교환시키기, 이를 통해 물리적 재화가 되지 못하는 동작(불필요한 동작/무의미한 동작/쓸모없는 동작)을 버리지 않고 사용하기, 탈각되는 자기 재화 재사용하기, 의 수행이다.
C의 공간 확보는 과연 어느 순간에 멈출 것인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두 번째, 세 번째의 리서치에서 가이드의 존재, 안전의 확보가 담보된 상황에서도 C는 잔발과 기본의 패턴화 된 움직임 수행을 멈추지 않았다. 움직임의 결과 템포는 달라도 결국 C도 B와 같이 멈추지 않는다. 멈추지 못하는 자들의 불안, 멈추지 않는 자들의 호흡은 도무지 진정될 줄을 모른다.
그렇다면 과연 C는 B처럼 자기파괴적인가? 오히려 더욱 조심스럽고 함부로 내딛지 않는 작고 세밀한 감각은 최대의 자기방어다. C의 멈추지 않는 공간 확보는 불안과의 단절이 일어날 장소를 향한 갈구다. 그러나 그 장소는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C의 내면에만 존재한다. 따라서 C는 공간이 모두 장악되는 순간을 결코 맞이하지 못할 것이다. * C의 불안, 안전에 대한 욕구는 혹시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D | 자기의 안전과 타인의 안전.
D는 안전의 도움, 가이드의 손이 어느 방향에서 오는지가 중요하다. 오른쪽은 익숙하고 안심되고 왼쪽 또는 뒤에서 오는 것은 의심스럽다. 오른쪽은 선한 것- Right-옮다/ 왼쪽은 그렇지 않은 것, 뒤는 알 수 없는 것, 앞은 나가는 방향의 고전적인 개념을 답습한다.
D는 공간의 대상화로 일회용 안전을 확보한 채 움직인다. 머릿속으로 인지한 공간을 만들어 놓고 예상되는 장소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자신이 만든 지도, 공간의 대상과 실제가 다름을 깨달을 때, 급격한 불안에 시달린다. 오래 누워 있던 자들의 공통적인 문제다. 몸에서 생각으로 흐르는 방향보다 생각에서 몸으로 흐르는 통로가 더 많은 사람의 특징이다. 이런 유형은 '누운 몸'에서 딛고 일어설 때 훨씬 더 많은 고통을 느끼고 자잘한 인지부조화, 실패, 재정립의 과정에서 많은 상실과 포기를 겪는다.
D는 안전하기 위해서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을 기억한다. 생각이 비대하기 때문에 욕망이 다양하고 다양한 욕망이 거주하는 대상화된 공간과 실제를 일치시하는 움직임을 수행하며 많은 양의 정보를 버리고, 수정해야 한다. 자기만의 정보 버리기, 의미 손실하기, 끊임없는 수정 속에 자가당착 빠지기,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에 쫓겨 막무가내로 포기하기.
D는 공간의 재구성을 바탕으로 자신이 딛어 일어날 공간을 확보한다. 때문에 D에게 공간 내의 요소는 모두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 즉 타인의 안전이 자기의 안전이다. 타인의 안전이 확보되는 순간, 다른 말로 타인이 불안을 해소하는 순간 공유된 공간은 안전할 것이므로 비로소 자신은 최소한의 안전이 확보된다. 사회는 이러한 암묵적인 약속으로 개인의 자유를 허용한다.
다시 말해, 자기의 안전을 위한 사회 이룩하기, 타인과 타자들의 세계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나의 욕망을 포기시키기, 포기된 것이 자기의 안전의 요소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기.
*포기/상실이 또 다른 불안/불편으로 야기될 때 안전의 상태는 위협을 받으므로 안전하게 제거되어야 하는가? 그것이 개인, 또는 자아의 일부분일 때, 사회는 과연 어떤 식으로 재화교환을 설치하는가?
*그것이 지극히 사적인 때와 지극히 공적일 때, 모든 경우에 동일한 문법이 적용되는가? 그렇지 않다면 문법은 어떤 구조를 확인해야 하는가?
A, B, C, D 외의 다른 미지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한편, 그러나 또한 하나의 상태를 마주한다. '부유하는 몸'이다. 이는 누운 몸과 다르며 같고 또한 딛고 일어서야 하는 또 다른 상태다. A와 C는 이런 식으로 은유된다.
부유하는 몸이 딛는 것은 누운 몸이 딛는 것과 같은가?
여기서 우리는 '딛기'는 단순히 높낮이의 변화가 아니라 명확한 방향과 의지를 가진 움직임을 의미한다는 점을 깨닫는다. 딛는 것은 일어서기 위함이다. 일어섬은 이동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동이 전제되지 않는 오롯한 일어섬 자체의 욕망은 무의미한가? 움직임은 당연한가? 당연하다. 정지 상태가 시작이 아니라 움직임이 시작이며 생명이 다하더라도 정지는 멈추기 위한 에너지의 응축이 아니라면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것을 수행하며 몸은 누워있다. 멈춰서 부동하기, 그러나 어느 쪽 몸은 반드시 호흡하기 때문에, 딛는 순간 감지하기, 눈동자 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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