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즈시절, 리즈 갱신'의 그 리즈? /
어느 날 퇴근 후에 혼자서 자라 IFC몰에서 쇼핑을 하고 있는데 허즈번한테 전화가 왔다.
‘University of Leeds’ 대학원에서 오퍼를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아까 봐 두었던 맨투맨 티셔츠를 하나 사 가지고 얼른 나왔다(핑계 김에 은근슬쩍 쇼핑했다).
쏜살같이 집으로 가서 허즈번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그 학교가 어디 있는 거야?"
"리즈(Leeds)라는 도시에 있다는데?’"
"리즈? 처음 들어보는 도시인데, 근데 리즈 시절 할 때 그 리즈?"
나중에 알아봤더니 ‘리즈시절 할 때 그 리즈'가 맞았다. 누군가 오픈 사전에 ‘리즈시절’이라는 말을 기원을 설명해주었는데, 현재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하고 있는 앨런 스미스 선수가 과거에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었는데 팬들이 이를 회상하면서 ‘리즈시절’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전성기'라는 뜻으로 쓰이는 관용적 표현이 되었다.
"와 그럼 우리, 리즈에서 리즈시절을 보내는 거야?"
이렇게 해서 우리 부부의 자기 성장, 영국 생활을 기록하는 유튜브 채널명은 ‘꽃부리; 꽃부부의 리즈시절’이 되었다(유튜브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더 자세히).
/ 미지의 도시, 로컬 맛집에 가는 것과 같은 짜릿함 /
몇 주가 지나서 우리 부부는 리즈에 가기로 최종적으로 결정을 했고, 이때부터 ‘리즈’라는 정체모를 도시에 대해 폭풍 조사를 시작했다. 네이버에 ‘영국 리즈'에 관해 검색을 했는데 올라온 블로그나 카페 글이 몇 개 없는 것을 보고 아, 여기는 정말 한국인이 별로 안 가는 동네 구 나하고 직감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리즈는 여행객들이 주로 찾는 도시 런던과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사이에도 딱 중간쯤에 위치해있다. 런던에서부터 버스 타고 다섯 시간, 기차 타고 두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다음으로는 여행책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별로 없다. 영국에 관한 여행책들이 대부분은 런던과 런던 근교만 다루고 있었고, 영국 전체를 다룬 여행책 속에서도 ‘멘체스터, 리버풀' 같은 큰 도시들만 보일뿐 어디서도 ‘리즈'는 보이지가 않았다. 정말 한국인들이 여행을 잘 안 가는 도시구나라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네이버 블로그에도 여행 책에도 잘 안 나오는 곳이라니... 리즈가 정말 미지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내 마음은 불안함과 두려움보다는 설렘과 기대가 컸다. 한국사람들은 잘 모르는 도시에 가서 산다는 것은 마치 ‘현지인만 가는 로컬 맛집'을 찾아내 나만 은밀하게 즐기는 그런 짜릿한 기분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 리즈의 첫인상 /
수개월의 준비 끝에 드디어 우리 부부는 비행기를 탔다. 리즈로 곧장 가는 비행기가 없어 런던 히드로에 먼저 도착했다. 런던에 가는 것은 거의 4년 만이었다. 신혼여행으로 왔었는데, 그때만 해도 이곳에 이렇게 석사 유학생과 그의 와이프로서 다시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밤 열한 시가 넘어서 패딩턴역 근처 호텔에 체크인을 하자마자 뻗었다.
다음 날 아침에 근처에 있는 하이드 파크에 가서 잠깐 산책을 했는데 수많은 런더너들과 강아지들이 아침 산책을 나온 풍경을 보고 비로소 내가 영국에 와 있음을 실감했다. 아쉽지만 런던 나들이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서둘러 짐을 챙겨 킹스크로스 역으로 향했다. 여기서만 리즈 가는 기차를 탈 수 있다. 그렇게 두 시간 반을 달려 ‘리즈’에 드디어 도착했다!
우리가 리즈에 도착한 날은 2019년 9월 1일이었다. 기차에서 내렸는데 드디어 해외살이가 시작되었다는 낭만을 채 느끼기도 전에 이 곳의 쌀쌀한 날씨가 우리를 당황케 했다. 9월 1일에 이 강한 바람과 추위는 뭐지? 긴 팔 셔츠를 입고, 9부 레깅스를 입고 있었는데도 너무 추운 것이다. 물론 런던에서부터 북쪽으로 3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으니 런던보다 추울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물론 나중에 이 곳의 날씨에 적응하고 생각해보니 저 때 한국이 너무 더웠었기에 그 격차가 더 크게 느껴졌던 것 같다.
기차역에는 먼저 리즈에 도착해 생활하고 있던 친구가 우릴 마중 나와 있었다. 한국에서 처음 만났었는데 리즈에서 다시 만나니 너무 반가웠고 무엇보다 그 친구가 우리가 살게 될 기숙사 키를 갖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날이 일요일이라 키를 수령할 수가 없어 친구에게 미리 부탁을 해둔 터였다. 반가움의 인사를 나누고 키를 받고 미리 깔아 둔 우버 앱을 처음 켜서 우버를 불렀다.
"누나, 형 여기는 일요일에는 마트도 네다섯 시면 다 닫아요. 오늘 저녁 굶으실 수도 있겠는데~기숙사 도착하면 짐만 그냥 넣어놓고 주변에 먹을 데 있나 먼저 찾아보세요."
아.. 아니.. 얘가 왜 도착하자마자 겁을 주고 그러지. 그러나 꼭 필요한 정보였다. 벌써부터 24시간 어디서든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는 내 나라가 조금 그리웠다. 앞으로도 한국에서는 당연했으나 이 곳에서는 당연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눈으로 보게 되겠지. 정말 해외 살이 시작이다!
그렇게 친구와는 다음을 기약하고 우버를 탔다. 우버 창밖을 통해 본 ‘리즈 시내'의 첫인상은 모던과 레트로의 콜라보 같았달까. 빅토리아 시대에 지어진 것 같은 붉은 벽돌의 오래됐지만 웅장미가 있는 건물들과 네모 반듯 깔끔한 외형의 갓 지어진 듯한 현대적인 건물들이 한 시선 안에 들어와 어우러졌다.
/ 언덕 위에 있는 전망 좋은 기숙사 /
드디어 구글맵 로드뷰로만 보던 기숙사에 도착했다. 1층 로비에 키를 갖다 댔더니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무거운 캐리어를 달달 끌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웬걸? 그 어느 층에도 우리 집 호수는 쓰여있지 않았다. 우리나라처럼 5층이면 501호 이런 식이 아니라 1호부터 12호, 20호 이렇게 나가는 식이었다. 그런데 우리 집 호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너무 당황했다. 뭐지?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호수에 1년 치 세를 내버린 건가? 사기를 당했나? 갑자기 식은땀이 났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멘털이 붕괴될 지경이었다. 오빠가 일단 그라운드 플로어에(우리나라에서는 1층이 외국에서는 G층인 경우가 많다) 다시 내려가 보자고 해서 갔더니 우리가 탔던 엘리베이터 옆에 엘리베이터가 하나 더 있었다. 알고 보니 엘리베이터를 잘못 탄 것이었다. 왜 아까는 엘리베이터가 하나밖에 안보였을까; 사기당한 거냐고 오빠에게 난리법석 떨었던 게 민망했다;;
드디어 기숙사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신기하게도 사진 하고 싱크로율 100%였다. 안방, 작은 방 이렇게 방이 두 개, 거실 따로, 그리고 주방 공간 따로, 화장실과 샤워실도 다 갖춰져 있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뷰였다. 건물 자체가 힐 위에 있고 우리 집이 또 고층에 있어서 바깥 뷰가 정말 어메이징 했다. 여기서 내가 일년을 산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떨리는 마음으로 왔는데 기숙사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사실 이 집이 나오기 전에 바로 학교 앞에 위치한 ‘원룸형 스튜디오' 기숙사에 지원했다 떨어져서 속상했는데, 그때 떨어진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여기는 학교나 시티센터와 삼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어 버스를 타고 다녀야 하는 불편함이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이렇게 집도 넓고 방도 여러 개고, 무엇보다 강남 한강뷰 부럽지 않은 '힐뷰'의 집에 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월세 가격은 학교 앞 원룸형 스튜디오와 같으니 버스 타는 불편함 쯤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집값 비싸기로 유명한 런던이라면 우리가 이런 호사를 절대 누릴 수 없었을 텐데, 리즈에 살게 돼서 너무 좋다.
/ 우리 집 밑에 해리포터가 사는 것 같아요 /
거실에 서서 창밖을 한참을 내다봤다. 180도를 다 둘러봐도 어느 곳 하나 시선을 가로막는 건물이 없었다. 내 눈 앞에 붉은 벽돌 주택들이 쭉 펼쳐져 있었고 바로 아래쪽으로는 집들이 반달 모양으로 주욱 늘어서 있었는데, 앗 이 모습은 마치 해리포터의 이모 가족, 더즐리네 집 같지 않은가? 이곳은 머글들이 사는 동네가 확실하다. 마치 저 집 백 야드에서 더즐리 고모가 해리를 괴롭히다 마법 주문을 받고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둥둥 떠다닐 것 같다. 밤이 되면 맥고나걸 교수가 와서 지팡이로 저 길에 있는 가로수 불빛들을 다 앗아갈 것만 같다. 내가 자는 사이 해리가 나는 자동차를 타고 호그와트로 떠날 것 같다.
대충 짐을 풀고 주변에 문을 연 자그마한 식당이 있어 저녁은 대충 해결을 했고, 이제 자야 하는데 이불이 없다. 대충 긴 코트를 두 개 꺼내 각자 덮고, 수건을 베개 삼아 자려고 누웠는데 침대에서 밤하늘이 보인다. 별도 하나 반짝이고 비행기도 한 대 지나갔다. 내일 얼른 이케아부터 가서 이불이랑 수건부터 사 와야지. 그렇게 잔뜩 긴장하고 마음이 부푼 첫날밤에 오지 않는 잠을 간신히 청했다.